'디 에센셜 한강' 중 산문 '종이 피아노'로부터 옮긴다. 어린 시절 피아노 교습을 받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 상 받을 수 없었던 한강 작가 이야기인데 짠하면서도 웃긴다.


Ink sketch of keyboard on ripped paper (2010) By Arman4audio - Own work, CC BY-SA 3.0
* 한강의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출간 당시 기사:[소설가 한강씨 25분짜리 자작음반 내] https://v.daum.net/v/20070114195111680?f=o
cf. 듀오 더 클래식(김광진과 박용준)의 노래 '종이피아노'가 있다. https://www.melon.com/song/detail.htm?songId=5395347&ref=W10600 종이피아노 Paper Piano · 더 클래식 The Classic 전에 즐겨 듣던 노래이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기 전, 봄방학이 시작됐을 때 부모님이 안방으로 나를 불렀다. 엉거주춤 앉는 나에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피아노를 배우라고.
삼사 년 전이었다면 뛸 듯이 기뻐했겠지만 나는 좀 어리둥절했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어지럽게 피아노에 매혹됐던 시기는 홀연히 지나가버렸고, 혼자서 끄적이던 일기나 시에 몰두해 있던 때였다.
괜찮다고 나는 말했다. 별로 배우고 싶지 않다고. 시간도 없을 것 같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네가 배우기 싫어도, 엄마 아빠를 위해서라도 일 년만 다녀줘라. 안 그러면 한이 돼서.
이번에는 어머니가 눈물을 닦으며 말씀하셨다. 내 책상에 일 년도 넘게 붙어 있었던 종이 건반에 대해서. 그걸 볼 때마다 까맣게 타들어갔던 마음에 대해서.
나는 그만 멋쩍어져서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그 숙연한 방을 어서 빠져나갈 생각만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이어 말씀하셨다.
배워보고 재미있으면, 대학 들어가면 피아노도 사주마.
아휴, 우리집에 피아노 놓을 데가 어디 있다구요.
점입가경이라니……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마음이 되어, 실없이 웃으며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2007) - 종이 피아노
• 종이 피아노 ……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비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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