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경 박사의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 중 '2장 잘못된 출발, 아시아태평양전쟁, 패배를 껴안은 일본'으로부터

만주의 관동군(1944)


[제국 일본에겐 전쟁과 승리의 방정식이 있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29104.html 이시와라 간지의 세계최종전쟁론이 소개된다.






만주를 차지한 일본 군부는 공격의 대상을 중국 본토로 설정했다. 그러나 이시와라 간지는 중일전쟁으로 확전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1937년 당시 국력으로 전선의 확대는 잃을 것이 많았다. 만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이 쳐들어오는 날에는 만주마저 잃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 침략 당시 이시와라 간지가 걸었던 길은 후배들을 자극했다. 후배들은 상부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으킨 행동으로 인해 출세한 선배가 부러웠다.

이시와라 간지가 우려한 상황이 곧 현실로 되었다. 1938년 10월, 한커우漢口와 우창武昌, 한양漢陽 등 우한武漢 3진을 점령하고, 1939년 2월 중국 남부 하이난섬海南島을 차지한 후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일본군의 승전보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중국을 관통한 후 동남아를 거쳐 미국으로 가려던 세계최종전쟁의 발걸음은 일단 멈췄다. - 3.그럼에도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선택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우리가 지켜야 할 인류 보편의 가치'(정혜경)의 '2장 잘못된 출발, 아시아태평양전쟁, 패배를 껴안은 일본' 중 '3.그럼에도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선택했다'로부터 옮긴다. 

관동군 사령부(1935)


[가상 인터뷰] 이시와라 간지 https://v.daum.net/v/20060731181509665?f=o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일본은 침략전쟁을 택했다.

이시와라 간지는 1929년부터 착실한 준비에 들어갔다. 2년 후인 1931년 9월 18일, 일본 육군 관동군 참모 자격으로 만주 침략에 나섰다.

일본은 러일전쟁 후 러시아로부터 획득한 관둥저우 방비와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은 중동철도의 남쪽 지선인 남만주철도를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관동군이었다. 이시와라 간지는 모략을 사용해 전쟁을 일으켰다. 관동군이 일본 측 철도의 선로 일부를 스스로 폭파하고 중국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는 방법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림원 '여학생'(다자이 오사무) 연보로부터

다자이와 미치코의 결혼식


올해 여름에 발간된 다자이 오사무 산문집 쏜살문고 '마음의 왕자'도 담아둔다.






1939년 30세 1월 8일, 이부세 부부의 중매로 야마나시 현 쓰루 고등여학교 교사인 26세 이시하라 미치코와 결혼식을 올리고 고후 시에 살림을 차림.

1941년 32세 6월 7일, 장녀 소노코가 태어났고, 모친 병문안차 10년 만에 고향 가나기의 생가를 방문함. 11월에 문인 징용령에 의해 징발되었으나 흉부질환으로 면제 처분을 받음. 12월 8일, 태평양전쟁으로 전시체제에 접어듦. - 연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평양 전쟁 개시일을 담은 '12월 8일'은 열림원 다자이 오사무 컬렉션 '여학생'에 실려 있다.

다자이 오사무(1940)


딴 출판사의 다자이 오사무 전집 5권 '정의와 미소'수록작이다.





"이제부터는 힘들어지겠네요."전쟁 얘기를 하려 했는데, 이웃 아줌마는 며칠 전, 통장이 된 얘기인 줄로 안 모양이다."아, 아뇨,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질 못했어요."부끄러운 듯 말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쑥스러워졌다.

이웃 아줌마도 전쟁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통장의 무거운 책임에 대해 긴장하고 있는 듯싶다. 이제부터 통반장 일도 힘들어질 것이다. 연습 때와는 달라질 테니까. 막상 공습이라도 당하게 되면 그 지휘의 책임은 중대해질 것이다.

목욕탕에 갈 때에는 길이 밝았는데 돌아오는 길은 이미 어두컴컴하다. 등화관제(燈火管制)를 하는 것이다. 연습이나 훈련이 아니다. 마음이 묘하게 긴장된다. 하지만 너무 어두운 게 아닐까. 이렇게 어두운 길은 이제껏 걸어본 적이 없다. 한 걸음, 한 걸음, 더듬거리듯 나아가고 있지만, 갈 길은 멀고 어둠은 더욱 짙어간다. - 12월 8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혜경 박사의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이 아래 글의 출처이다.

사진: UnsplashRyan Parker  cf. USS 애리조나 기념관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87XX40800037






국력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일본 군부와 정부 고위층이 전쟁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만주 침략에서부터 시작한 잘못된 선택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악수惡手였다.

일본 수뇌부는 만주조차 돌려주어야 할 상황이 올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졌다. ‘여기서 후퇴하면 미국의 군사적 지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리해질 것’이므로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선택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일본은 패배를 껴안았다. 일본의 민중은 물론, 식민지와 점령지 민중들도 고통을 당했다.

* 일본 학계에서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를 포함한 15년간의 전쟁을 ‘광의의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를 ‘협의의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 구분하고, 태평양전쟁 이후를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요시다 유타카 지음, 최혜주 옮김(2013), 『아시아태평양전쟁』, 어문학사, 1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