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맑게 안데르센을 어린이책으로 보고 난 후 가감 없이 잔혹동화로 다시 접했을 때의 놀란 동심이 기억난다.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의 세계는 잔인하고 엄격했다. 이 두 책 - 안데르센 동화집(계림)과 어머니 이야기(미르북) - 의 각기 마지막에 실린 '눈사람'과 '그림자'가 궁금해 읽기 시작했다가 나머지도 전부 다 읽었다. 


'그림자'는 해설에 따르면 "가장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으로 작가 안데르센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사악한 그림자로 표현" 또는 "그림자의 자아 찾기"로 볼 수 있다고. 어떤 면에서는 미운 오리새끼의 변형 같다. 잊고 있던 안데르센의 세계, 인과응보와 권선징악뿐만 아니라 환상과 동경도 가득한. 


빨간구두(발레 분홍신으로 알려진) 이야기는 여전히 끔찍하면서도 매혹적이고, '빵 밟은 소녀' 이야기가 알려주려는 바, 먹을 거 함부로 하면 죄 되어 벌 받는 건 동서고금의 계율인가 보다.












아침이 되자 짙은 안개가 주위에 깔리고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하지만 해님이 떠오르자 나무에 핀 눈꽃이 산호 숲 같았습니다. 그리고 가지마다 반짝이는 고드름이 열렸습니다.

"절대로 저 안으로 들어가선 안 돼. 난로 가까이 가면 넌 녹아 없어질 거야!" "그래도 가 보고 싶어."

눈사람은 하루 종일 창문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중략) 눈사람은 하염없이 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추운 날씨였지만 조금도 즐겁지 않았습니다. 눈사람은 온통 난로에 대한 그리움뿐이었습니다. -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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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겨울의 눈빛
박솔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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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별점은 지극히 주관적으로 기본이 오점만점이고 아쉽거나 애매하면 일점감점하여 사점주는 걸로 잠정적인 규칙을 세워두었다. 이 책은 아직 약간은 유보적인 마음을 표시해두기 위해 소심하게 일점감점하려다가 결국 마음을 또 바꿔 만점. 감이 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그렇다. 이 작가의 스타일과 태도에 관심이 생기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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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이 틱낫한 스님으로부터 배운 만트라:


들이쉬며 

내쉬며

들이쉬며 

내쉬며

꽃처럼 피어나네.

이슬처럼 맑으네.

산처럼 단단하고

땅처럼 든든하네.


엠마 골드만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602110471086958






신화적인 원형들은 거의 다 한 번쯤은 죽음의 계곡이나 지하세계로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다시 살아나온 존재들이지. 슬픔과 분노의 끝까지 가보고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아본 사람들만이 거의 신화적인 삶의 깊이, 높이, 넓이를 획득하는 것 같아.

현경아, 네 이름 속에는 진주가 있어. 이 그림을 봐. 해가 떠오를 때 조개가 입을 열지? 조개의 살 속에서 빛나는 진주가 보이니? 네가 이겨내지 못하면 썩어서 죽게 되고, 네가 이겨내면 보물이 될 거야. 우리 딸은 보물이 될 거야.

여자가 예수와 어디가 안 닮았을까? ‘자지가 없다.‘ 그거 하나뿐 아니겠어? 이 ‘닮았다‘는 말을 ‘가족 유사‘라는 개념에서 보면, 유대인 여자가 아프리카 남자나 한국 남자보다는 훨씬 예수와 생김새가 비슷할 거야. 그런데도 유대인종 출신의 여자는 아직 가톨릭 신부가 될 수 없고, 예수를 전혀 안 닮은 아프리카 남자나 한국 남자는 신부가 될 수 있지.

"야, 페미니스트의 프리 섹스는 너 같은 놈이 달려들 때 노 하고 자유의지를 밝히는 거야. 개새끼!"

"당신이 나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 왜 내게 결혼했나 안 했나를 물으시는 거죠? 당신은 내가 남자 학자였다면 감히 이런 질문을 못 했을 거에요. 저는 당신이 한 행동이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모는 부활한 여성의 교회를 만들고 싶어. 세상에 치여서, 이 가부장제에 치여서 병들고 죽음까지 내려갔던 여성들이 그 억압과 금기를 깨고 다시 부활하는 교회 말이야. 그 교회의 새 교우 환영식은 이렇게 하고 싶어. 먼저 목사가 새 교우가 오면 사과를 하나 주고 깨물어 먹게 하는 거야. 그리고 새 교우에게 최근에 깬 억압의 금기가 무엇인지 물어봐. 그러면 그는 자신이 최근에 깬 억압의 금기에 대해 전 교인들에게 고백하는 거지. 신앙고백이 끝나면 목사와 전 교인이 아멘 하면서 다 같이 자기 앞에 놓인 사과를 깨물어 먹는 거야. 죄인으로 몰렸던 우리 어머니 이브를 기억하면서.

어떤 여성신학자들은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파라다이스에서 철없이 사는 어린아이 같은 인간에서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지는 역사적 인간으로 변화했다고 주장해.

이모는 이모 친구들과 영화 보러 가서, 흥행을 위해 여자를 구타하고 강간하는 장면을 많이 보여주는 영화가 있으면 친구들하고 영화에 대고 막 소리질렀어. "여자 강간하지 맙시다!" "아, 거 여자 때리지 맙시다!"라고 말이야.

엠마 골드만 같은 페미니스트는 "내가 춤을 출 수 없는 혁명이라면, 나는 당신들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어"하고 그 당시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던 남자들의 혁명을 비웃었던 것 같아.

이 만트라 전체를 한꺼번에 외울 필요는 없어. 꽃처럼 활짝 피어나고 싶은 날은 "꽃처럼 피어나네"만 하고, 단단한 사람이고 싶은 날은 "산처럼 단단하네" 하고 걸으면 되는 거야. 네게 가장 필요한 힘을 우주로부터 선물받는 거지.

‘잘 노는 사람이 신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싶어. 잘 놀 수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지. 자기를 왕자님이나 임금님, 아니면 나르시스 같은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모자람에 대해 웃고 넘어갈 수가 없어.

축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언젠가는 노예적 억압을 뚫고 저항하고 일어날 힘도 있는 거야.

"그러나 네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네가 더 많이 사랑할수록 다른 사람을 더 괴롭히게 된다." - 틱낫한

여신을 사랑하라. 그리고 용감하게 죄지어라. 그녀가 너를 여신들의 대동세상으로 이끌어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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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창작과비평 여름호 수록작, 2014년 문지문학상 수상작이다.





남자는 추워서 코트를 여미며 말했고 기타를 메고 가방을 든 채로 코트까지 여미니 뭔가 아주 바빠 보였다. 나는 왠지 화가 치밀어 아니 치미는 화를 참을 수 없어 당신 내일 뭐 해 이제 뭐 해 다음 주는 뭐 해 소리를 질렀고 남자는 내 어깨를 흔들었다. 나는 앞뒤로 흔들거렸다. 힘이 없어서 서 있을 힘만 있는 사람처럼. - P43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들과 함께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겨울에는 눈이 오고 눈이 아무것도 가져다주지도 가져가주지도 않는다. 이 눈을 맞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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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owf5fFsg_4 Chopin: 12 Etudes, Op. 25 - No. 11 in A Minor "Winter Wind" 손열음



겨울 산속에 있다 보면 죽은 나무에도 꽃이 피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해가 뜨자마자 그 꽃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도 보게 된다고. 햇빛이 서서히 산 아래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태백산맥 너머에서 누그러진 바람이 불어오면 금세 봄이었다. 그러면 둘은 고원을 내려가야 했다.

추위는 여전했지만 바람이 볼에 닿는 느낌은 하루하루 달라졌다. 영원히 겨울일 것 같았던 횡계고원에도 봄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고원 밑에는 봄이 완연했다. 송천을 덮고 있던 얼음도 어느새 녹고 천변가로는 꽃다지 꽃이 노랗게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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