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소설집 '다시 시작하는 아침'에 실린 단편 '곰 이야기'(1996년 제4회 현대문학상 수상작)의 주인공은 새 부인과 함께 작업실 딸린 새 집을 알아보는 중인 화가인데  '숨은 꽃'(1992년 제16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에 잠깐 등장한 화가 - 저자의 분신으로 보이는 작품 속 화자는 어떤 화가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거기에서 과거의 지인을 보게 된다 - 와 동일인이라고 여기며 읽으면 더 흥미롭다.


[양귀자의 '곰 이야기'에서 보는 변한다는 것에 대하여] http://www.sfnews.kr/news/264119

Double portrait of the artist and his wife seen through a mirror, 1911 - Vilhelm Hammershoi - WikiArt.org






나는 벌레처럼 살고 싶지 않았으며, 종종 내일을 위한 벅찬 꿈을 꾸어보고 싶었으며, 흰 눈처럼 순수하게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벌레였고 꿈은 악몽이었으며, 배척당하는 까마귀였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러므로, 네번째 결혼이라는 제의(祭儀)를 통과해서 ‘다른 나로 변하고 싶다’라는 비명의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다. 운명은 내게 놀랍게도 썩은 동아줄이 아닌 튼튼한 동아줄을 내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거울 속의 자기가 기척도 없이 울고 있는 것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많이 울지는 않았다. 그가 거울 에서 시선을 떼버림과 동시에 눈물도 그쳤다. 그는 알고 있었다. 거울 속으로 들여다본 아까의 얼굴이 마지막으로 본 자신의 과거 모습이라는 것을. 다시 거울을 들여다볼 때, 그때 그는 이제까지의 그가 아닐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결정을 한 것이었다.

희망도 없이 눈 뜨는 아침, 문득문득 솟구치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외로운 질문들, 질주하는 현실의 속도감을 이길 수 없어 아뜩해지던 삶의 빈혈. 그랬다. 그들 모두 진실로 새롭게 살 수 있는 피가, 신선한 피가 모자란 사람들이었다. 현실은 악성빈혈이었고 사람들은 수혈을 원했다.

그는 변신함과 동시에 이미 지난 관계들과 완벽하게 단절되었다. 뜨겁게 살아보기 위해선 우선 차갑게 식히기부터 해야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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