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아르, 여성의 탄생' (케이트 커크패트릭 저/이세진 역)이 아래 옮긴 글의 출처.
Love - Hope, 1934 - Yiannis Moralis - WikiArt.org
시몬 드 보부아르의 「연애편지」https://v.daum.net/v/19991009104000442 '연애편지' 초역본 출간 기사(1999).
1997년에는 미국인 연인 넬슨 올그런(Nelson Algren)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면서 대중은 다시 한번 예상치 못했던 면모에 충격을 받았다. 사르트르에게 편지를 쓸 때보다 훨씬 더 열정적인 밀어를 쏟아내는 다정다감한 보부아르를 본 것이다. - 들어가는 글 - 우리는 보부아르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순회 도시 중 한 곳은 시카고였는데 1박 2일 여정이었다. 거리는 눈에 덮여 있었고 ‘윈디 시티’(시카고의 별칭)는 과연 그 이름값을 했다. 그 도시는 너무 추워서 혼자 돌아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뉴욕에 있는 친구들이 보부아르에게 넬슨 올그런이라는 소설가를 소개해주었다. 거친 사내 같은 외모에 중독자와 매춘부 같은 미국의 어두운 이면을 주로 글로 쓰는 사람이라고 했다.
보부아르는 세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올그런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 상대가 번번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결국 어떤 미국인에게 부탁해서 겨우 연락을 했고 그날 밤 두 사람은 호텔 바에서 만났다.
그는 보부아르보다 한 살 어린 서른여덟 살이었고 키가 크고 늘씬했다. 보부아르는 올그런에게 미국의 빛나는 표면은 이제 많이 봐서 지겹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특급 호텔을 전전하면서 만찬, 강연, 바닷가재 요리의 연속이었다고, 진짜 시카고가 어떤 곳인지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올그런은 그럴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는 "홍등가, 싸구려 독주, 가발 쓴 무용수, 다양한 조합의 악덕"으로 유명한 ‘시카고의 보워리(Bowery)’ 거리에 보부아르를 데려갔다. 통속적인 공연을 하는 클럽에도 들렀고, 흑인 클럽에서 재즈도 들었다. 올그런은 프랑스어를 전혀 못했고 보부아르도 아직 영어가 서툴렀다. 하지만 그날 밤이 끝나기 전에 올그런은 자기가 살아온 얘기를 다 했다.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고 시카고 남쪽 가난한 동네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스웨덴인이었고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지만 어느 쪽에도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일리노이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한 후 미국 남부를 기차로 여행했다. 한번은 텍사스에서 타자기를 훔쳐서 감옥살이도 넉 달 해봤다.
군 복무는 프랑스에서 했고 귀국해서는 뉴욕에서 잠시 지내다가 돌아왔다. 그 외에는 시카고를 떠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글쓰기를 좋아했고 보부아르가 ‘진짜’ 미국을 봐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헤어지면서 둘은 다음 날 또 보기로 했다. 보부아르는 알리앙스프랑세즈 관계자들과 점심을 먹고 자기를 올그런의 집 앞까지 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관계자들은 ‘그’ 동네에 볼일이 있다는 말에 적잖이 놀랐다. 빈 판잣집과 버려진 창고가 즐비한 동네였다. 자동차가 웨스트 와반시아 대로 1523번지에 도착했다. 올그런의 집은 너저분했고 신문과 잡동사니가 발에 채였다. 그래도 주방에는 따뜻하게 불이 피워져 있었고 침대에는 알록달록한 멕시코산 담요가 덮여 있었다. 그날은 보부아르가 침대에 가까이 다가갈 일이 없었다. 올그런은 자기 집 주변 동네를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들은 매서운 추위를 뚫고 돌아다니다가 따뜻한 음료로 몸을 녹였고, 그 후에 보부아르는 프랑스 영사관의 뻣뻣한 신사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러 가야 했다. - 11장 미국으로 간 파리지앵 1947~1948년 "영원한 여성성만큼 짜증스럽고 거짓된 신화는 없다."
1947년 1월, 미국 뉴욕 방문.
2월, ‘전후 작가의 윤리적 문제들’이라는 주제로 미국 순회 강연을 시작하다. 강연 도시 중 하나였던 시카고에서 소설가 넬슨 올그런을 만나 연인이 되다.
7월, 올그런이 청혼을 하다. 보부아르는 그를 사랑하지만 파리를 떠나 일을 하고 글을 쓰는 삶을 포기하지 못한다고 청혼을 거절했다. -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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