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라스의 글쓰기'(알랭 비르콩들레 지음 / 이은숙 옮김)로부터
뒤라스의 묘 (몽파르나스 묘지) By Spreevogel - Own work, CC BY-SA 4.0, 위키미디어커먼즈
https://blog.naver.com/minumworld/222500306087 뒤라스의 '태평양을 막는 제방' 편집자 후기인데 이 글에 뒤라스 묘소 방문기가 들어 있다.
Plaque Marguerite Duras, 5 rue Saint-Benoît, Paris 6e By Celette - Own work, CC BY-SA 4.0, 위키미디어커먼즈
뒤라스의 배우자였던 로베르 앙텔므가 쓴 책이 우리 나라에 '인류'란 제목으로 번역출간되었었다(현재 절판).
1972년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기껏해야 오후 4시였다. 날씨는 잔뜩 찌푸렸었다. 생브누아* 거리에 있는 뒤라스의 서재는 회색빛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 생브누아 거리 5번지에 뒤라스의 집이 있다. 뒤라스는 이 집에서 학업, 결혼, 집필, 레지스탕스 운동 등 많은 것을 겪었다. 특히 이 집은 독일 다하우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남편을 헌신적인 간호로 살려낸 장소다. 뒤라스는 이 시기의 체험을 일기 형식의 『고통』(1985)에서 비장한 문체로 그려낸다.
언젠가 그녀가 말했다.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았다. 그 후 갑자기 모든 것이 내게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지성에 눈을 떴다." 이때부터 뒤라스는 결코 아우슈비츠를 잊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남편인 로베르 앙텔므 때문만은 아니다.
이 고독에 마주 서서 "그녀는 쓴다". 마치 오렐리아 슈타이너처럼 "그녀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녀라는 이 "화석" 같은 존재에게는 오직 그것만이 남아 있다. 방랑자의 유일한 짐처럼 그녀에게는 깨지지 않는 그녀의 가족, 아우슈비츠, 그 시대의 모든 절망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 책을 1997년 프랑스에서 막 돌아온 선배가 건네준 귀국 선물로 받았다(그 선배는 지금 그 사실을 기억조차 못 한다). 이 책의 첫 문단을 읽는 순간 푹 빠져들었다. 마치 저자가 뒤라스를 만나면서 뒤라스라는 작품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틈틈이 번역하던 중 저자에게 뒤라스에 대한 강의를 듣고 싶다며 편지를 썼다. 마침 한국연구재단의 박사후 연구 지원을 받은 터라 바로 파리로 떠났다. 저자는 당시 파리가톨릭대학ICP에서 뒤라스의 ‘『고통』에 나타난 시적 앙가주망’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다. 나 역시 뒤라스의 자전적 글쓰기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고통』의 앙가주망 문학의 특성을 계속 연구하려던 참이었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또 저자의 소개로 만난 낭시대학의 도미니크 드네스 교수는 뒤라스와 함께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미테랑 대통령과의 친분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려주었다. 뒤라스는 미테랑 대통령을 만나러 갈 때 옷차림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며, 그녀 주변에는 늘 젊은 군단들이 따라다녔다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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