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도 크롭이 만든 에라스뮈스 흉상 (1950) 구다(Gouda)에 있으며, 이곳은 에라스무스가 어렸을 때 살았던 곳이다. bust of Ermasmus, made by Hildo Krop in 1950 and situated at Gouda.] By Gouwenaar - 퍼블릭 도메인, 위키미디어 커먼즈
[첼시 올드 교회의 토머스 모어 조각상, 체인워크, 런던. Statue of Thomas More, Cheyne Walk, Chelsea, London. Chelsea Old Church in background.] By Tarquin Binary - 자작, CC BY-SA 2.5, 위키미디어커먼즈
북유럽 르네상스의 선구자들은 (중략)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구자들보다 화려한 면은 부족했으나 기초가 튼튼하고 충실했으며, 개인의 학문적 성과를 내세우기보다 학문을 가능한 한 널리 보급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에라스뮈스와 토머스 모어 경은 북유럽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로 알맞다. 그들은 가까운 친구 사이였으며, 공통점도 많았다. 에라스뮈스보다 모어의 학식이 약간 부족했지만 두 사람은 모두 학식이 풍부했으며, 스콜라 철학을 경멸했다.
또한 둘 모두 재치와 해학을 겸비한 고도로 숙련된 저술가였다. 루터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그들은 사상을 이끌어가는 지도자 역할을 했지만, 이후 세상은 두 가지 면에서 그들과 같은 유형에게는 너무 폭력적으로 흘러갔다. 모어는 순교의 고통을 당했으며, 에라스뮈스는 무력감에 빠졌다.
에라스뮈스도 모어도 엄밀한 의미에서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로 혁명 시대 이전의 기질을 보여 주는 적절한 사례이기 때문에 언급할 가치가 있다. 혁명 시대 이전에는 온건한 개혁을 요구하는 태도가 널리 퍼졌는데, 극단주의자의 반동에 소심한 개혁가가 겁을 먹지 않아도 되던 시대였다. 그들은 신학이나 철학에서 스콜라 철학을 배경으로 일어난 보수적 반동사상의 특징인 체계성도 전부 혐오했다. - 에라스뮈스와 토머스 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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