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문인들의 산문집 '작가의 계절'은 사계 중 가을로 시작한다. 내 경우 작년 여름에 여름 편부터 읽기 시작, 계절에 맞춰 읽어야지 하다가 어찌어찌 봄까지 다 읽고 가을에 도착했다. 겨울과 봄 사이에 있는 현재, 가을이라고 하니 머나먼 미지의 세계 같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4a2478a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자경단으로 활동했고 조선인 학살을 목격했다고 한다. 





「피아노」는 1925년 5월 잡지 『신소설』에 실린 글이다.

비 내리는 어느 가을날, 누굴 좀 만나려고 요코하마의 야마테 주택가를 걷고 있었다. 주변은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와 거의 달라진 것 없이 여전히 황폐했다. 그나마 조금 변화가 있다면 슬레이트 지붕과 벽돌 벽이 허물어져 켜켜이 쌓인 한쪽 구석에 우거진 명아주뿐이었다. 어느 무너진 집터에 뚜껑이 열려 활처럼 휜 피아노가 보였다. 반쯤 벽에 짓눌린 채 비에 젖어 건반이 반지르르했다.

돌연 누군가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친다’기보다는 건드리는 소리였다. 엉겁결에 발걸음을 늦추고 거칠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겨우 한 음이었지만 피아노 소리가 틀림없었다. 왠지 으스스해서 다시금 걸음을 재촉하려는 순간, 뒤쪽에 있던 피아노가 또 희미하게 소리를 냈다. 뒤돌아보지 않고 얼른 잰걸음을 놀렸다. 나를 떠나보내려 한바탕 불어오는 습기 머금은 바람을 느끼면서.

그 피아노 소리에 초자연적 해석을 보태기엔 난 지나치게 현실주의자였다. 정녕 사람 그림자가 없었다고 한들 허물어진 벽 근처에 고양이라도 숨어 있었을지 모른다.

길로 되돌아가 폐허를 쭉 둘러봤다. 그제야 슬레이트 지붕에 눌린 채 비스듬히 피아노를 덮고 있는 밤나무를 알아챘다. 그건 어찌 되든 좋았다. 나는 그저 명아주수풀 속 피아노만 유심히 바라봤다. 지난해 대지진 이후 아무도 모르는 소리를 간직해온 피아노를. - 피아노 _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1장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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