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기 재일 한인 노동운동사를 전공한 정혜경 박사가 지은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의 2장 '잘못된 출발, 아시아태평양전쟁, 패배를 껴안은 일본' 중 '3 그럼에도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선택했다'의 '1941년 12월 8일, 패배를 껴안은 일본의 선택'을 읽었다.
Poster by Allen Saalburg issued in 1942 by the 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 United States National Archive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즈 * [네이버 지식백과] 진주만 공습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082502&cid=43667&categoryId=43667 공습일은 현지(진주만) 기준 7일, 일본 기준 8일이다.
[80년 만에 가족 품으로…태평양전쟁 강제동원 희생자 영면 2023. 12. 5.]https://v.daum.net/v/20231205170336914
1937년 중일전쟁은 반짝 승리를 안겨주었다. 일본 군대는 상하이를 거쳐 난징을 넘어 중국 내륙과 남부 지방으로 중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길어지는 전쟁은 민중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희생을 요구했다.
식량을 비롯한 각종 일용품의 배급제도는 일상을 조이는 불편함이었다. 배급제도는 먹거리에서 양말, 수건 등 모든 일용품으로 확대되었다.
일상의 불편함이 늘어나자 전쟁에 대한 염증이 높아졌다. 물론 세상이 무서워 드러내놓고 "왜 전쟁을 크게 벌여 이 고생을 시킨담!" 같은 불평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책을 지지하고 고통을 감수하는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1939년 9월 1일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유럽이 움직이자 중국 전선에 갇힌 일본도 움직였다. 1940년 9월 22일, 일본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 지역을, 그리고 이듬해에는 남부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다. 이제 동아시아를 벗어난 일본군이 갈 곳은 미국의 영토였다.
1941년 12월 8일 오전 6시, 라디오는 대본영육해군부 발표를 보도했다. 첫 문장은 "제국 육해군은 오늘 8일 미명未明, 서태평양에서 미국·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갔다"였다. 그리고 그날 천황은 선전宣戰 조서를 내렸다.
개전 당시 미국의 국민총생산은 일본의 12배에 가까웠다.
누가 보아도 열세였다. 그런데 군부는 오히려 이 점을 이용해 국민을 결속시키고자 위기를 강조했다.
선동은 통했다. 천황의 선전 조서를 접한 지식인들은 "역사는 만들어졌다. 세계는 하룻밤 사이에 변모했다. 감동에 몸을 떨면서 무지개처럼 흐르는 한줄기 빛의 행방을 지켜보았다. … 일본 국민의 결의는 하나로 불타올랐다. 상쾌한 기분"이라며 감격을 나누었다.* *가토 요코,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서해문집.
국력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일본 군부와 정부 고위층이 전쟁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만주 침략에서부터 시작한 잘못된 선택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악수惡手였다.
일본 수뇌부는 만주조차 돌려주어야 할 상황이 올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졌다. ‘여기서 후퇴하면 미국의 군사적 지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리해질 것’이므로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선택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일본은 패배를 껴안았다. 일본의 민중은 물론, 식민지와 점령지 민중들도 고통을 당했다.
* 일본 학계에서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를 포함한 15년간의 전쟁을 ‘광의의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를 ‘협의의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 구분하고, 태평양전쟁 이후를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요시다 유타카 지음, 최혜주 옮김(2013), 『아시아태평양전쟁』, 어문학사,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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