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김영하의 첫 소설집 '호출' 수록작 '전태일과 쇼걸'(1997)에 등장한 전혜린이다.
뮌헨 2018 Pixabay로부터 입수된 Joe님의 이미지
그 남자는 그녀를 만난 지 일 년 만에야 그녀가 자신의 삶을 통해 연기하는 배역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그건 전혜린이었다.
그녀의 본질은 전혜린이었을 뿐, 임수경이나 로자 룩셈부르크는 아니었다. 그녀는 일 년 내내 혼란스러워했다. 전혜린의 캐릭터는 고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충분히 매력적인 배역이었다. 그녀는 출신 여고의 학생회장이었고 후배들의 우상이었다. 그러나 대학은 달랐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바람 앞에서 전혜린은 필요치도 않았고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80년대는 전혜린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하물며 용납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그즈음에 이르러 분명히 깨닫게 된 그녀는 더 이상 문학과지성사에서 발행한 시집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그 남자의 머릿속에 남은 그녀의 잔상은 전혜린, 또는 그 티를 아직 못 벗은 여자에 불과했다.
결국 그녀는 전혜린을 버렸다. 그것까지가 그 남자가 그녀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그녀가 전혜린을 버린 순간, 그 남자는 그녀를 떠났다.
전혜린과 해고 노동자. 슈바빙의 가스등을 그리워하던 그녀. 방학이면 독일문화원을 들락거리며 독일어를 배우던 여자. 그 남자에게는 그녀의 이야기가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꾸며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 전태일과 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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