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도시 기행 2(유시민)의 '빈, 내게 너무 완벽한'으로부터 발췌한다. 


링(순환도로)과 슈테판 대성당, 성벽 해체에 대해 이 기사 초반이 유용하다:http://jmagazine.joins.com/forbes/view/337948


Postcard with Emperor Franz Josef, 1908 - Koloman Moser - WikiArt.org

슈테판 성당은 링의 중심에 있다. 이곳을 탐사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사라져 버린 ‘1857년 이전’의 풍경을 상상해 보고 싶어서였다. 왜 하필이면 1857년인가? 황제가 수백 년 동안 빈을 둘러싸고 있었던 대성벽을 헐어내기로 결단한 게 바로 그때였다. 도시는 생물처럼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대성벽의 해체는 빈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작고 낡은 중세 도시였던 빈은 고치에서 빠져나온 나비처럼 날개를 활짝 폈고 19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완전히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했다.

오스트리아는 헝가리(동), 스위스(서), 이탈리아(남), 독일과 체코(북)에 둘러싸인 완벽한 내륙 국가다.

평지의 도시에는 높고 튼튼한 성벽이 생존의 필요조건이었다.

빈의 대성벽은 합스부르크제국의 심장을 보호하는 갑옷이었다. 정략결혼으로 영토를 획득했고 전쟁에는 지극히 무능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도시 전체를 둘러싼 대성벽을 축조하고 바깥에 외성벽을 한 겹 더 쌓았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합스부르크제국 왕실이 유럽에서 첫손꼽는 부자였다지만, 빈에 귀족이 많았다지만, 오스트리아가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지만, 빈에 부자만 사는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이리도 모든 것이 호화로울까? 여행하는 동안에는 답을 듣지 못했다. 나중 《세기말 빈》(칼 쇼르스케 지음, 김병화 옮김, 글항아리, 2014)을 읽고서야 알았다.

요제프 황제를 오늘의 빈을 창조한 주역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가 통치했던 19세기 후반에 빈은 예술·건축·문학·의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럽 최고 수준의 도시가 되었다. 우리가 지금 보는 빈은 어쨌든 그가 성벽을 철거한 덕분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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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빈의 링 스타일
    from 에그몬트 서곡 2023-10-02 15:42 
    빈 도시계획도 1858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즈유시민의 '유럽 도시 기행 2'에서 읽은 오스트리아 빈의 대성벽 해체와 근대화가 재미있어서 살림지식총서 '빈 - 예술을 사랑하는 영원한 중세 도시'(인성기 지음) 중 '프란츠 요제프 1세 시대의 빈' 편으로부터 '건축: 링의 역사주의 건축 양식'의 내용을 발췌한다. 유시민 작가가 쇼르스케의 책 '세기말 빈'을 언급하는데 여기에도 인용되고 있다. 인성기 교수의 저서 '빈 모더니즘'도 올려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