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말러' 중 '06_알마, 뮤즈인가 악처인가'를 읽고 발췌한다. 당시 비엔나에 팽배한 반유대주의를 엿볼 수 있다. 구스타프와 알마는 서로에게 강력하게 이끌렸나 보다. 두 사람은 스무 살 가량 차이가 난다.
말러 부부가 결혼식을 올린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칼 성당 사진: Unsplash의Carrie Borden
[첼로의 음유시인 미샤 마이스키, 새 앨범 발매](2018년8월 기사)https://www.sedaily.com/NewsView/1S3EANK3LK
구스타프 말러 - 아다지에토(첼로와 하프를 위한 편곡) by 미샤 마이스키
카를대성당은 말러의 인생에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장소다. 하나는 알마와 결혼식을 올리며 사랑의 결실을 이룬 곳라는 것, 다른 하나는 그 결혼식이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말러가 평생 동안 유일하게 실천한 가톨릭 종교의식이었다는 것이다.
유대인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이 말러의 인생 내내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게 종교는 사회생활을 불편하게 만드는 정치적 걸림돌이었지 실존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종교를 자신의 본질과 분리해서 생각할 줄 알았기에 그는 스스로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도 열등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말러가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을 가톨릭 성당에서 올린 까닭은 약혼자 알마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알마는 말러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유대인을 경멸하는 유대인이었다. 그녀의 친아버지 에밀 야콥 신들러는 저명한 화가였다. 유대인이었지만 루돌프 황태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제국화가상을 받을 만큼 생전에 높은 명성을 누렸으며, 죽어서는 빈 중앙묘지 내 저명인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빈 시립공원에는 지금도 그의 기념 조각상이 남아 있다.
아버지에게서 예술적 기질을 물려받은 알마는 회화에도 소질이 있었지만 성악가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음악에 대한 열정 또한 남달랐다. 피아노 연주와 작곡을 즐기던 그녀는 당대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진 바그너 숭배에 가담했고, 유대인이면서도 그 음악에 내재한 반유대주의에 자연스럽게 휩쓸렸다.
알마의 어머니는 남편 신들러가 사망하자 남편의 제자인 카를 몰과 재혼했다. 몰 또한 당시 분리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빈 사교계에서 잘 나가던 아르누보 화가였다.
말러와 알마가 지인이 초대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처음 만나 1902년 3월 9일 카를대성당에서 전격 결혼식을 올리기까지는 겨우 4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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