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스트 7.8월호에 발표한 장강명의 단편소설 '적당한 자의 생존'은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활용하여 코로나 시대 한국 노동현실의 한 단면을 묘사한다.

Bertolt Brecht, 1961 By Adolf Hoffmeister - CC BY-SA 4.0, 위키미디어커먼즈


올해 나온 브레히트 번역시집 '꽃을 피우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격'(공진호 역)의 목차에는 '나, 생존자'가 보인다(아래 옮긴 글 참조).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 전반부에 ‘돌격대’라는 인물이 나온다. 하고 다니는 행동거지와 스타일 때문에 극우파로 오해 받지만 실상은 정치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성실하고 고지식하지만 독특한 고집이 있고 주변 분위기를 잘 파악하지 못해 놀림감이 되는 캐릭터다. 나는 커맨더 형님이 젊은 시절에 돌격대와 비슷한 청년 아니었을까 상상한다.

커맨더 형님은 기어이 내게 주기적 한숨 호흡법이라는 요령까지 전수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에는 명상보다 낫다는 그만의 노하우였다. 숨을 두 번 들이쉬고 한 번 길게 내쉬는 것인데, 스탠퍼드대 의대에서 사람들에게 여러 호흡법으로 숨을 쉬게 하면서 찾아낸 방식이라고 했다.

가끔은 읽던 책을 센터로 들고 가서 점심시간에 계속 읽기도 했다. 점심은 센터 직원들과 다 같이 먹었고, 저녁에는 남는 밀키트를 숙소로 들고 와서 조리해 먹곤 했다. 모든 사람들과 거리를 뒀고, 늘 우울한 표정이었고,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이런, 이거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 토오루랑 좀 비슷하잖아, 옆에 나오코도 없고 미도리도 없지만, 하고 생각했다. 그즈음에는 혼자서 그런 괴상한 생각들을 많이 했다. 그런 생각들을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흠칫 놀란 적도 몇 번 있다.

커맨더 형님은 돌격대처럼 사라졌다. 그는 L처럼 아무 인사 없이 그냥 단체 카톡방을 나가버렸다. 우리는 처음에 그가 실수로 단톡방을 나간 줄 알고 다시 초청하기도 했다. 커맨더 형님은 응하지 않았고, 우리 중 몇몇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스터 누님도 전화를 걸었다. 커맨더 형님은 어느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우리는 인사팀을 통해 커맨더 형님이 회사를 그만두었음을 알게 되었다.

브레히트가 쓴 시의 원제는 ‘나, 생존자(Ich, der Überlebende)’다. 독문학자이기도 했던 김광규 시인이 이 시를 한국어로 옮기면서 제목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 바꿨다. 같은 시의 영어 제목은 그냥 ‘생존자(The Survivor)’다.

독일어 시에서 꿈에 나타난 친구들은 화자에게 "Die Stärkeren überleben"이라고 말한다. 김광규 시인은 이 말을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로 옮겼다. 영문 시에는 같은 문구가 "Survival of the fittest", 즉 적자생존(適者生存)으로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가장 적합한 자(the fittest)의 생존’이라는 표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살아남기 위해 가장 적합한 자가 될 필요는 없다. 남들보다 좀 더 적합한 자(the fitter)이기만 하면 된다. - 장강명, 적당한 자의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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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3-09-04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밑줄쳐주신 적자생존관련해서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이라는 관점이 사소한 차이 같으면서도 뭔가 새로운 느낌을 주는거 같아서 좋았습니다.

서곡 2023-09-04 22:57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적자생존에 대해 제 경우 이런 생각을 전에 해 본 적이 없는 듯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요 말씀대로 큰 차이 아닌 것 같지만 참신하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9월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즐라탄이즐라탄탄 2023-09-04 2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고맙습니다. 서곡님 9월도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