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 날씨 때문인지 마음이 산란해져 읽고 있던 책들이 아닌 딴 책을 집어들었다. '작가의 계절'이라고 일본 작가들의 산문집 중 여름 편을 펼쳐 그 중 여성 작가 하야시 후미코의 글로부터 옮긴다. 제목은 '시원한 은신처' - 며칠 전만 해도 얼마나 더웠었나. 지금은 비바람으로 서늘하고 스산하다.

하야시 후미코 동상 利用者:おすぽん - 投稿者自身による作品, CC 表示-継承 3.0,https://ja.wikipedia.org/w/index.php?curid=345354による






하야시 후미코는 1932년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도쿄 신주쿠에 집세 50엔짜리 2층집을 빌려 지방에서 행상을 하던 부모님을 모셔왔다.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살게 됐지만, 타고난 방랑자 기질로 인해 그녀는 글을 쓰다 막히면 훌쩍 여행을 떠나곤 했다. 돈이 바닥날 때까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돌아와선 단편과 수필 등을 써서 받은 원고료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시원한 은신처」는 1934년 9월 출간된 『부엌 잡담』에 실린 글이다.

한여름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한여름 밤에 켜진 등불은 매우 서정적이라 좋다. 오랫동안 전등을 쓰다가 1년쯤 파리에 살며 처음으로 램프를 사용해봤다. 램프 불빛은 계절에 따라 느낌이 달라져서 변덕스러운 내게는 밤 방문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래서 일본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시골에서 찾아낸 붉은색과 녹색으로 칠한 종이 갓이 달린 고풍스러운 양등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불빛 아래서 펜을 휙휙 움직인다. 더없이 마음이 편안하다.

나는 생각한다. 여름밤에는 오래된 차가운 우물이 있고 복숭아나무 잎이 무성하며 창가에 양등이 놓인 소박한 은신처 하나쯤 갖고 싶다고. 여름밤이 좋아서일까. 펜을 움직이다가 지치면 문득 가칠가칠한 방 안을 둘러본다. 이윽고 외로워진다.

복숭아나무 잎이 무성하고 차가운 오래된 우물이 있는 시원한 은신처를, 나는 무더운 여름밤마다 어린아이처럼 꿈꾼다. 그런 생각이 듦은 필시 혼자 지내는 생활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어서일 텐데, 이처럼 시원함을 좇는 동안이 행복한 때인지도 모른다.

대가족 사이에서 사치를 부리지도 못하고 번거로운 일투성이에 여유 없는 생활이긴 해도 가슴 한구석에 숨통이 트이는 시원한 은신처를 만든 것만으로도 구름처럼 자유로울 수 있다. 원고지를 껴안고 글로 먹고사는 가난한 사람이 부릴 법한 사치란 이 정도이리라. - 하야시 후미코, 시원한 은신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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