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위의 자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에 쓰였다. 화자는 “아마도 올해 1월 중순께의 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는 문단으로 시작함으로써 독자에게 넌지시 시간적 배경을 환기시키고, “망할 놈의 전쟁”이라 뇌까리는 한 남자의 등장으로 끝을 맺음으로써 이 에피소드가 전쟁 중에 일어났음을 주지시킨다. 그러나 정작 이야기가 시작되면 화자의 상념은 전쟁 대신 사회적 관습과 규칙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생각’에 쏠린다.

 

벽 위의 자국을 본 덕분에 공상이 중단되었다는 일견 뜬금없는 안도감은 사실 화자 자신의 생각의 움직임, 즉 어린 시절에 영문도 모른 채 만들어진 연상 작용, 모험과 영웅의 이미지인 깃발과 기사의 행렬 뒤에 살상과 폭력의 현실을 은폐하는 습관화된 사고 작용에 대한 거부감을 반증한다.

 

요컨대 「벽 위의 자국」은 습관과 규칙에 젖은 맹목적 신념이 ‘행동하는 남자들’에 의해 폭력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사유의 조건과 한계, 그리고 가능성에 대한 자기 성찰적인 사유의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행동하는 남자들에 맞서는 실천으로서의 생각하기를 제시한다. 벽 위의 자국은 이미 벌어진 어떤 일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이다. 그리고 이 때 화자가 당면하고 있는 ‘벌어진 어떤 일’은 바로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서 명시하고 있는 세계대전이라 할 수 있다.

 

한 세대의 영국 청년들을 전부 앗아갔다고 할 정도의 사상자를 낸 1차 세계대전은 일상을 깊숙이 뒤흔드는 현실이었고, 울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1915년 친구였던 시인 브룩(Rupert Brooke)이 전사했고, 1916년 레너드 울프가 강제 징집을 당할 뻔했으며, 1917년에는 사촌 둘이 전사했다. 이 시기 울프의 일기와 편지는 애국주의에 호소하며 전쟁의 대의를 강조하는 정치가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출처: 손영주, “생각하는 일이 나의 싸움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사유, 사물, 언어(2014)https://www.kci.go.kr/kciportal/landing/article.kci?arti_id=ART0019132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