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등단작. 십년전 작품이다. 영문본도 있다. 아래에는 저 정도만 옮기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물론.
쇼코와 나는 하굣길에 비디오를 빌려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대부분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였지만 쇼코와 함께 비디오가게에 가면 어떠한 의심도 받지 않고 비디오를 빌릴 수 있었다. 에단 호크가 화가로 나오는 <위대한 유산>, 야한 베드신이 있는 <셰익스피어 인 러브>, 일본 공포영화 <링>, 줄리아 로버츠의 <노팅 힐> 같은 영화들이었다. 우리는 거실의 불을 끄고 녹차를 마셔가며 영화를 봤다. 야한 장면이 나올 때면 할아버지와 나, 쇼코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쇼코에게는 가까운 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겉보기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쇼코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내밀한 우정을 쌓는지 알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속을 열어 보이지 못하는 대신 살을 부딪치며 만날 필요가 없는 외국인에게 외국어로 편지를 써서 보내는 방법을 택했다.
쇼코는 더이상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쇼코의 가상 친구나 일기장 정도였는데, 쇼코는 그냥 그 일기장에 일기 쓰기를 그만둔 것뿐인데, 일기장 주제에 쇼코의 삶에 개입하려고 했다니.
분명히 쇼코도 그때 느끼고 있었겠지. 내가 쇼코보다 정신적으로 더 강하고 힘센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마음 한쪽이 부서져버린 한 인간을 보며 나는 무슨 일인지 이상한 우월감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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