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에 있는 마린스키 자선 병원의 관사에서 태어났다.] By NVO - 직접 촬영, CC BY-SA 2.5, 위키미디어커먼즈


[스스로에게 도취된 세르기 신부가 다시 유혹이란 시험에 들자 이번에는 무너지는 것도 놀랍지 않다. 궁극적으로 ‘기적’은 그를 파멸시키는 독이 된다. 그러나 파멸의 시점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간단히 말해 세르기 신부는 바로 그 몰락으로부터 부활하며 여기서부터 톨스토이의 수도사는 도스토옙스키의 궤도로 진입한다. 주지하다시피 파멸로부터 시련을 통해 갱생하는 이야기는 도스토옙스키가 즐겨 다룬 테마다.] https://www.kci.go.kr/kciportal/landing/article.kci?arti_id=ART002152544 (윤새라)


한 가지 생각이 세르게이 신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 생각이란, 자신이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라 대수도원장이나 주교가 임명해 준 지금의 지위에 안주하며 사는 것이 괜찮은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율을 실천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가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면 그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고, 그들을 멀리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내면적인 것이 외면적으로 변해 가고, 자신이 지닌 생명수의 원천이 고갈되어 가며, 신의 일이 아닌 인간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고 영혼을 단련하고 기도를 드릴 시간은 적어져 갔다. 어쩌다 기분이 좋은 시간이면 그는 과거에 자신이 샘과 같은 존재였었다고 생각했다.

세르게이 신부의 삶은 기도와 방문객을 만나는 것으로 채워지고 있었지만 오늘 같은 날은 특히 더 힘들었다. 오전에 고위관리가 방문해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고, 이후 바로 한 귀부인과 그의 아들을 맞이했다. 그 아들은 신앙이 없는 젊은 교수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열성적인 신자로서, 신부 세르게이가 자신의 아들과 대화를 나누기를 바랐다. 대화는 매우 불편했다. 젊은 교수는 수도사와 논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세르게이 신부는 이 청년이 신을 믿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고 온화하고 즐겁다는 것을 느꼈다. 세르게이 신부는 젊은 교수와의 대화를 불만스럽게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불타는 램프와 같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느끼면 느낄수록 자신의 내면의 진리의 성화가 약해지고 소멸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내가 하는 일이 신을 위한 일인가, 인간을 위한 일인가?’ 이 문제가 항상 그를 괴롭혔고 도대체 명확한 답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행위를 신을 위한 행위에서 인간을 위한 행위로 악마가 슬쩍 바꿔놓았음을 영혼 깊숙이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느낌을 가지게 된 이유는, 예전에는 은둔생활을 못 하게 할 때 힘이 들었는데 지금은 은둔생활이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방문객들 때문에 번거로움을 느끼고 피곤했으나, 마음속 깊은 곳에선 오히려 그것을 즐겼고, 또한 자신을 칭송하는 소리에 기뻐했다. - 신부 세르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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