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평론가가 나쓰메 소세키의 네 번째 장편 '태풍'에 대해 썼다. 1907년 작 '태풍'을 토마스 만의 대표적 단편인, '태풍'보다 4년 전에 나왔다는 1903년 작 '토니오 크뢰거'에 견주어 읽는 대목이 짧지만 흥미롭다. 신 평론가는 우리 시대를 빗대어 "신자유주의라는 '태풍' 속에서 (인)문학이라는 '나비'가 처해 있는 상황"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타매'라는 단어가 나와 사전에서 찾아둔다. (타매 唾罵 몹시 업신여기거나 더럽게 생각하여 침을 뱉으면서 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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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의Krzysztof Niewolny
일본 학자의 저서 '나는 소세키로소이다'가 신형철 평론가의 이 해설에 참고서로 쓰인다.
친구가 표상하는 화사한 부르주아의 세계 앞에서 토니오가 자신을 ‘길 잃은 시민’이라 자인한 것처럼 다카야나기는 ‘세상의 외톨이’(8장)임을 아프게 깨닫는다. 이 자각이 근대 부르주아 세계 속에서 도대체 (인)문학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고통스러운 물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비록 작가 자신이 시라이의 삶에 더 동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소세키가 학자(시라이의 세계)의 편에 서서 부자(나카노의 세계)를 타매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라는 ‘태풍’ 속에서 (인)문학이라는 ‘나비’가 처해 있는 상황이 어떠한지를 여기서 새삼 말할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다카야나기는 (그리고 우리는) 백 년째 방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이 소설의 불행한 현재성이다. - 신형철, 백 년 동안의 방황-태풍의 보편성과 현재성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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