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ns of Edward IV of England 1880 By Pedro Américo -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즈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 '런던탑'에 나온 두 왕자 이야기를 밑줄긋기로 아래에 옮긴다. 어릴 때 동화나 만화로 읽은 것 같다. 희미하게 장면이 그림으로 떠오른다.

형이 아름답고 맑은 목소리로 무릎 위의 책을 읽는다.

"자신의 눈앞에 자신의 죽어가야 할 때의 모습을 그려보는 이야말로 축복 있을진저. 날이 날마다 앉으나 서나 죽음을 기도하라. 머지않아 주 하느님 곁으로 가는 이, 무얼 두려워하리오……."

아우는 세상에 둘도 없는 슬픈 목소리로 ‘아멘’을 뇌인다. 때마침 멀리서 불어오는 초겨울 찬바람이 높다란 탑을 흔드는가 하자, 벽이 무너질 듯 쿵 요란스레 울리기 시작한다. 아우가 화들짝 형 어깨에 얼굴을 가져다댄다. 눈처럼 하얀 이불 한 귀퉁이가 훌러덩 뒤집혀진다. 형은 또 읽기 시작한다.

"아침이라면 밤이 되기 전에 죽는다고 생각하라. 밤이라면 내일이 있음에 매달리지 마라. 각오야말로 고귀한 것. 누추한 죽음이야말로 또 한 번의 죽음이로다……."

아우는 또 ‘아멘’을 뇌인다. 그 소리가 덜덜 떨고 있다. 형은 조용히 책을 덮고 작은 창문 쪽으로 걸어가 바깥을 보려 한다. 창문이 높아 키가 닿지 않는다. 걸상을 가져와 그 위에 올라서서 발돋움을 한다. 자욱한 검은 안개 저 끝에서 희미한 겨울해가 비추인다. 도살한 개의 생피로 그 한 곳만 오려내어 물들인 듯한 느낌이다. 형은 "오늘도 또 이렇게 저무는가?" 하고 탄식하며 아우를 돌아다본다. 아우는 단지 "추워."라고만 대답한다. "목숨만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큰아버님한테 왕위를 물려줄 텐데." 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아우는 "어머님을 만나고 싶어."라고만 말한다. 이때 저쪽에 걸려 있던 태피스트리 속 여신의 나체상이 바람도 없는데 두세 번 너풀너풀 움직인다.

홀연히 무대가 빙빙 돈다. 탑 문 앞에 여자가 홀로 검은 상복을 입고 꿈인 양 서 있다. 얼굴은 창백하고 까칠하게 여위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넘치는 부인이다. 이윽고 자물쇠 따는 소리가 들리고 끼익, 하고 문짝이 무겁게 열리자 안에서 사내가 하나 나와 부인 앞에 공손히 절을 한다.

"만나는 걸 허락받았는가?" 하고 여자가 묻는다.

"아니옵니다." 측은하다는 듯 사내가 대답한다. "만나게 해드리고 싶어도 국법이 추상같사오니 체념해 주시옵소서. 제 힘이 못 닿음을 용서해주소서." 그리고는 갑자기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문 채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호 안쪽에서 농병아리 한마리가 훌쩍 튀어오른다.

여자가 목덜미의 금목걸이를 풀어 사내에게 건네며, "그저 한순간 얼핏만 보아도 한이 없겠네. 내 이 소망을 그대는 들어주지 않으려나." 하고 간절히 청을 넣는다.

사내는 목걸이를 손가락 끝에 감고 생각에 잠기는 눈치다. 농병아리가 휙 물 속에 잠긴다. 잠시 후 사내가, "옥지기는 옥의 법을 부수지 못하옵니다. 왕자님들은 별 탈 없이 있사오니 그리 아시고 돌아가 주시옵소서." 하며 금목걸이를 되돌려준다. 여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돌위에 떨어진 목걸이가 쨍 날카롭게 운다.

"도저히 못 만난다는 얘긴가?" 여자가 묻는다.

"황송하오나." 문지기가 단언한다.

"검은 탑 그림자, 단단한 탑벽, 인정 없는 탑지기." 여자가 중얼거리며 하염없이 운다.

이 단편은 사실처럼 죽죽 내려썼지만 실은 그 태반이 상상의 산물이므로 읽는 이는 그런 마음으로 읽기를 바란다. 탑의 역사에 관해서는 희곡적으로 재미있을 듯한 사건만 골라 삽입했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군데군데 부자연스러운 흔적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가운데 엘리자베스(에드워드4세의 왕비)가 유폐 중인 두 왕자를 만나러 오는 장면과 두 왕자를 죽인 자객의 술회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리처드3세> 속에도 있다. 셰익스피어는 클라렌스 공작이 탑 속에서 살해당하는 장면을 그릴 때는 정공법을 이용,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왕자를 교살하는 장면을 그릴 때는 암시적 수법을 이용, 자객의 말을 빌려 이면에서 그 모양을 묘사하고 있다. 일찍이 이 희곡을 읽었을 때 그 점을 제일 재미있게 생각했으므로 그 취향을 그대로 이용해보았다. 그러나 대화의 내용, 주위의 광경 등은 물론 내 공상으로 셰익스피어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 런던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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