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Going to See Grandma (aka Mrs. Chase and Child), 1889 - William Merritt Chase - WikiArt.org
여성 작가 여섯 사람이 쓴 단편집 '나의 할머니에게'에서 가장 뇌리에 남은 건 손보미의 '위대한 유산'이다. 오래된 큰집과 피아노, 계급적인 갈등과 철없고 가엾은 아이가 있는 이야기. 다소 어색 살짝 과장된 느낌의 문체가 독특하여 호불호가 갈리겠다.
작년에 수상한 이상문학상 대상작 제목이 '불장난'( 창작과 비평 2021 가을호 발표) - '위대한 유산'에도 화재가 난다. 저자가 불에 끌리나 보다.
손보미의 장편 추리소설 '사라진 숲의 아이들'도 담아둔다.
Children Playing with Fire, 1947 - Rufino Tamayo - WikiArt.org
성인이 되어 유산으로 물려받은 할머니의 집을 처분하러 돌아온 ‘나’는 이제 자신의 소유가 되었음에도 "침입자라도 된 것 같은"(116쪽) 기분에 시달린다. 이처럼 한집에 살았지만, 누구도 거기에 속하지는 않았던 여자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건 텅 빈 가계도인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그 집이 불길에 휩싸이며 타버릴 때, 이 거대한 집의 주인으로 가계도의 정점에 있던 할머니는 어쩐지 종이호랑이처럼 느껴지는 구석이 있다. 더불어 소멸해가는 집을 바라보는 ‘나’와 아주머니가 후련해 보이는 건 지나친 감정 이입일까. - 발문_황예인 · 아직은 아니지만, 동시에 이미 할머니가 되어
이 소설에는 내가 지난 1년 동안 써온 여러 가지 작품의 모티프들이 뒤섞여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작년 여름에 썼던 짧은 소설 「크리스마스이브」(원래는 ‘크리스마스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지만, 『맨해튼의 반딧불이』에 실을 때 제목을 바꾸었다)로부터 비롯되었다. 어머니를 떠나 할머니 집에 머물게 되는 어린 소녀─이 모티프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고 그 후로 다른 소설들을 쓸 때도 나는 계속 그 영향권 안에 있었다.- 작가 노트
그녀는 커튼을 친 후, 가지고 온 책을 뜯어서 러그 위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손이 곱아서 뜻대로 되지가 않았지만, 그녀는 거의 필사적으로 그렇게 했다. 그리고 라이터 불을 종이에 붙였다. 불이 붙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 포기하면 안 돼.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테이블 러너를 몇 장 가지고 왔다. 그러고 나서 종이 위에 올려놓은 후 다시 라이터 불을 붙였다. 아까보다는 불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지만, 이번에도 결국은 꺼지고 말았다. 다시 거실의 서랍장 하나를 분리해서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고 애를 써보았다. 역시나 실패였다. 그래도 잠깐의 온기가 그녀를 덥혀주었고, 그녀는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다.
그녀는 거실로 나가보았다. 커튼에 불이 붙어 있었다. 아래로부터 타오른 불길은 커튼의 위까지 솟아 있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할머니의 코트로 불길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코트에 불길이 번졌다. 뜨거워서(방금 전까지 그토록 원하던 불꽃이었는데!) 그녀는 코트를 집어 던졌다. 불길이 순식간에 러그와 쌓아놓은 책과 테이블 러너 위로 번졌다. 그리고 결국엔 소파에도.
그녀는 화재 현장을 실제로 접한 건 처음이었고, 불에 타는 소리가 원래 이렇게 요란한 건지 어쩐 건지 알지 못했다. 불길하게, 끊임없이 마음을 요동치게 만드는 소리. 마음속의 무언가가 계속 잘그락거리며 운동하게 만드는 소리. 침묵에 잠겨 있던 지난 세월을 보상받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존재를 뽐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건 마치 마지막 포효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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