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겨울 창작과비평 창간호 수록작 김승옥의 '다산성'은 장편이 되려다 만 작품이라 그런지 다소 어수선한 감이 드는데 그의 촉수로 캐취한 1960년대의 끔찍한 황량함이, 역설적으로 대조적인 '다산성'이란 키워드를 통해, 그 자신 인간이자 남성으로서 지닌 폭력성과 함께 생생하게 드러난다. 아래는 '다산성'이 실려 있는 주요 출판사 단행본들이다. 


"제 친구들 중엔 한 방울만 혀에 대보고도 그게 진짜 커피인지 가짜 커피인지 가려내는 놈들이 있죠. 전 모두 진짜 같기도 하고 모두 가짜 같기도 해서 아직 커피 마실 자격이 없나봐요."

커피 얘기, 살갗 얘기가 숙이에겐 얼마나 짐스런 화제였다는 것을 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 여자가 천사라고 해도 날개가 등에서 솟아나 있기 때문에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천사가 아니라 잠자리날개로 지어진 옷을 입었기 때문에 하늘을 날 수 있는 천사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무꾼에게 옷을 도둑질당하고 나면 별수없이 땅에서 베를 짜고 아이를 낳으며 살아야 하는 그런 천사였다는 것을 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찻잔이 비자마자 나는 계속해서, 영화에 대한 얘기, 방송극에 대한 얘기, 해외 토픽란에서 본 얘기, 내가 어렸을 때 본 만화에 대한 얘기, 유머를 모아놓은 책에서 읽은 얘기, 내 직장인 신문사에서 주워들은 얘기, 심지어 외국의 유명한 작가나 철학가 들의 에피소드까지 오 톤쯤 늘어놓았다. 내 얘기들의 무게가 드디어 그 여자의 고개를 들어올리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 여자는 내처 미소를 띠거나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며 웃거나 하면서 내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재미있게 듣고 있는 중이니 어서 계속하세요’라고 그 여자가 마음속에서 말하고 있으리라고 내 속 편한 대로 정하고 나서 나는 그런 얘기들을 했다.

"오늘 낮엔 무얼 하셨어요?"

나는 값을 받는 듯한 태도로 물었다.

"옆집 마당 위에 고추잠자리떼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있었어요. 그 집 마당에 코스모스가 많이 있잖아요? 그 위를 잠자리떼들이 마치 공중에 가만히 떠 있는 것처럼 하고 있었어요."

그 여자는 얼굴을 빨갛게 하고 그러나 고개는 숙이지 않고 성우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요?

내가 물었다.

"별루 생각 없었어요. 내년엔 우리집 마당에도 코스모스를 심어야겠다는 생각 좀……"

"코스모스 정말 좋지요? 고향엘 가느라고 가끔 기차를 타면 철둑 양쪽으로 코스모스가 피어 있곤 했지요. 한때는 코스모스 라인이라구 해서, 라인이란 건 영어로 줄이란 말이잖아요? 전국 철로 양쪽에 코스모스를 심게 했다는데, 요즘은 기차를 타도 그게 없어졌어요. 가뭄에 콩 나기로 어느 시골 정거장에나 좀 심어져 있곤 하지요."

그 여자 얘기의 분위기에 맞추느라고 기껏 한 내 얘기는 그러나 마치 쇼펜하우어가 잉크병에 돈을 숨겨놓고 쓸 만큼 의심쟁이였다는 얘기를 하는 투가 되어버려서 나는 자기의 얘기에 화가 났다.

"코스모스도 좋지만 잠자리떼가 참……"

그 여자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 고추잠자리……"

고추잠자리에 대한 내 나름의 회상이 또 나올 판이었다. 나는 그 여자의 말에 감동한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더 긴 소리를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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