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겨울 창작과비평 창간호 수록작 김승옥의 '다산성'은 장편이 되려다 만 작품이라 그런지 다소 어수선한 감이 드는데 그의 촉수로 캐취한 1960년대의 끔찍한 황량함이, 역설적으로 대조적인 '다산성'이란 키워드를 통해, 그 자신 인간이자 남성으로서 지닌 폭력성과 함께 생생하게 드러난다.

사진: UnsplashArnelle Balane






"제 친구들 중엔 한 방울만 혀에 대보고도 그게 진짜 커피인지 가짜 커피인지 가려내는 놈들이 있죠. 전 모두 진짜 같기도 하고 모두 가짜 같기도 해서 아직 커피 마실 자격이 없나봐요."

커피 얘기, 살갗 얘기가 숙이에겐 얼마나 짐스런 화제였다는 것을 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 여자가 천사라고 해도 날개가 등에서 솟아나 있기 때문에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천사가 아니라 잠자리날개로 지어진 옷을 입었기 때문에 하늘을 날 수 있는 천사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무꾼에게 옷을 도둑질당하고 나면 별수없이 땅에서 베를 짜고 아이를 낳으며 살아야 하는 그런 천사였다는 것을 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찻잔이 비자마자 나는 계속해서, 영화에 대한 얘기, 방송극에 대한 얘기, 해외 토픽란에서 본 얘기, 내가 어렸을 때 본 만화에 대한 얘기, 유머를 모아놓은 책에서 읽은 얘기, 내 직장인 신문사에서 주워들은 얘기, 심지어 외국의 유명한 작가나 철학가 들의 에피소드까지 오 톤쯤 늘어놓았다. 내 얘기들의 무게가 드디어 그 여자의 고개를 들어올리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 여자는 내처 미소를 띠거나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며 웃거나 하면서 내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재미있게 듣고 있는 중이니 어서 계속하세요’라고 그 여자가 마음속에서 말하고 있으리라고 내 속 편한 대로 정하고 나서 나는 그런 얘기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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