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어지는 장면은 유스케가 연출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다. “우리 헤어지는 게 어때? 그게 나을지도 몰라./ 내일 목을 매자. 고도가 안 오면 말이야./ 만일 온다면?/ 그럼 살게 되는 거지.”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삶의 지속을 의미했다.] 출처: '요청하는 이미지와 지연되는 말들- 드라이브 마이 카(2021)를 중심으로 살펴본 하마구치 류스케의 대화들' 올해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 (소은성)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100572
나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초반에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나오는 것을 보며 과잉 같다고 느꼈다. 장식적 과잉 말이다. 하루키의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며 나는 크게 세 가지에 꽂혀 있었던 것 같다. 1. 하루키의 원작, 2. 체홉의 연극 바냐 아저씨, 3. 한중일 다국적 캐스트의 의미. 그러다 보니 나는 이 세 개의 큰 틀로 영화를 파악하기에 여념이 없어 다른 요소들은 부차적으로 밀어둔 감이 있었다. 그 결과, 영화에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을 끼워넣은 것을 불필요한 인용이라고 회의적으로 여긴 게 아닐까 한다. 그런데 위 평론을 읽으며 문득, 감독이 하루키의 원작과 (원작에 원래 있던) 체홉의 연극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동원한 여러 장치 중의 하나로써 '고도를 기다리며'를 전주로 배치했다는 생각이 든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들은 결국 '드라이브 마이 카'의 두 주인공들과 겹치며, 업무를 수행하면서 여정을 함께 겪은 드라이버 미사키('바냐 아저씨'의 소냐를 연상시키는)가 영화를 끝낸다. 더 이상 속절 없이 고도를 기다릴 필요 없이, 기존의 세계 밖으로 나아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