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박은 초기의 서양 철학 해체에서부터 이후의 윤리학과 정의, 국제주의와 우애, 환대에 대한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사상 관련 논의에 이르기까지 데리다가 밟아온 지적 궤적을 신중히 따라왔다.
이 과정에서 스피박은 데리다의 사상이 지닌 잠재적 유용성을 강조하여, 식민주의 담론과 당대의 글로벌 경제 그리고 ‘제1세계‘와 ‘제3세계‘ 사이의 국제적 노동 분업 문제 등에 효과적으로 비평적 개입을 해왔다.
스피박은 1976년 데리다의 난해한 저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를 번역함으로써 미국 지성계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데리다가 영어권에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때, 스피박은 이 책을 번역 출간하며 데리다의 해체 철학을 학문적, 비평적으로 소개하는, 비범하고 인상적인 ‘옮긴이 서문‘을 덧붙였다.
스피박은 데리다의 서양 철학 해체를, ‘제3세계‘ 지식인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논쟁을 확장 심화시키는 데 동원해왔다. 즉 식민주의의 문화적 유산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소할 것인가, ‘제1세계‘ 다국적 기업이 ‘제3세계‘ 노동자들을 계속 착취하는 상황을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제대로 기술할 능력이 있는가, 서구 페미니즘이 ‘제3세계‘ 여성들의 역사와 삶, 투쟁을 기술하는 데 적합한가 하는 것 등이다.
"내가 자란 곳에서 처음 데리다를 읽었을 때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그가 철학적 전통을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해체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흥미를 느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장한 인도의 교육체계에서 철학세계의 주인공은 보편적 인간 존재였고, 그 인간 존재를 내면화하는 수준에 접근했을 때 우리도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지 말해주던 그 전통을, 프랑스에서 누군가가 해체하려는 것을 보았을 때, 내게는 그것 역시 흥미로워 보였다." (1990년 인터뷰)
데리다의 지적 기획에 대한 스피박의 관심은 단순히 철학적인 차원만은 아니었다. 그 관심은 부분적으로 유럽 식민주의의 정당성을 제공한 바로 그 서구 사상의 전통을 ‘해체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스피박의 글이 암시하듯이, 실제로 데리다의 서구 인문주의적 주체의 해체는 포스트식민적 사고의 문맥에서도 생산적으로 쓰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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