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9. 27. 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05. 서진룸살롱 살인 사건
 
이 사건은 한국 조직폭력배 역사 중에서 길이 남을 사건인 ‘서진룸살롱 살인 사건’에 관한 일이다. 1986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20대 초~중반들의 청년들로 구성된 서울 목포파와 당시 전국구 조직이었던 서방파의 방계조직이었던 맘보파의 작은 시비에서 시작되었다. 어찌 보면 술집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조직폭력배들 간의 기싸움에서 시작한 것이었지만, 이 사건의 주범이었던 고금석이 흉기를 이용해 맘보파의 행동대장을 찌르면서 살인이 시작됐다. 비록 유명하지 않던 조직폭력배였지만 혈기왕성한 청년들로 구성된 서울 목포파는 고금석의 공격을 시작으로 걷잡을 수 없이 잔인한 살인을 시작했다. 모든 상황이 끝나기까지 불과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결국 사건이 벌어지고 1년 2개월이 지난 1987년 10월 대법원에서 직접 공격행위에 가담하지 않았던 두목 장 씨에게는 무기징역, 칼을 들고 일선에서 공격했던 행동대장 김 씨와 고금석에세는 사형이 선고되며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 사건의 여파로 인해 당시의 노태우 정권은 일명 ‘범죄와의 전쟁’을 내세우며 조직폭력배 청산이 시작됐다. 경찰과 폭력조직과의 2년간의 전쟁 끝에 전국구 조폭 시대가 끝나고 만다. 당시 서울 목포파가 설립됐을 당시 조폭계를 정화하겠다는 그들의 야망이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이뤄진 셈이다.
 
이 서진룸살롱 사건의 주범이었던 고금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러한 사건의 범인들은 대개 불우한 시절을 보낸 경우가 많지만 고금석은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섬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어머니는 고금석을 사랑으로 돌봐주셨다. 순하고 예의가 바른 고금석은 마을에서도 칭찬이 자자했으며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를 위해 자가용을 사드리는 게 꿈인 아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하여 체육교사가 되어 어머니께 자가용을 사드리는 꿈을 가지고 있던 고금석을 선배인 장 씨가 눈여겨본 것이다. 그의 자취방에는 같은 고향 출신의 동기와 선배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당시 체육계열의 선후배 문화로 인해 장 씨의 제안을 거절을 힘들었던 고금석은 점차 어두운 세계로 빠져든다. 얼떨결에 싸움에 휘말린 고금석이었지만 그 대가를 큰 돈을 받고 점차 발을 빼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섬마을의 순박한 소년이었던 고금석이 어느새 서울 목포파의 칼잡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생활을 하며 불교에 귀의한 그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피해자들에게 참회하며 삼천배를 올렸다. 무릎이 벗겨져 피가 흐를 정도였다. 남의 목숨을 빼앗은 자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루에 세끼를 먹냐며 한 끼만 먹고 나머지는 다른 재소자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른 재소자가 곤란한 일이 생기면 무조건 도와줬다. 산골 분교 아이들에게 편지와 함께 학용품값 5만원을 매달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참회하는 그를 삼중스님은 그의 사형 집행 후에도 오랫동안 잊지 못하였다. 그의 죄가 없어지지는 않고 죗값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참 많이 변했다고.
 
이 사건을 보고 이렇게 말하면 살인자를 미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고금석이 불쌍하게 보이기는 했다. 이게 고금석과 삼중스님, 그리고 그의 선행이 부각되어 보여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면 과연 ‘고금석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서 어떤 답을 내려야할까. 사람을 그렇게 무 자르듯 좋다, 나쁘다라고 표현할 수는 없다. 그때 그 사건을 일으킨 것도 선배에게 휘둘렸다한들 모두 다 그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감히 나의 의견을 얘기해보자면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물론 이 ‘잘못된’이라는 말이 붙었으니 나는 고금석이 기본적으로는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어린시절, 성격, 주변사람들의 말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책에서 본 내 의견은 그렇다. 그의 죄는 씻을 수 없고 죗값을 받아 사형을 받았지만 나는 과연 고금석처럼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참회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은 없다. 이미 난 쓰레기라는 생각에 반성은 할지라도 이렇게 몸소 매일매일 저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 속에 놓여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중대한 것까지 수많은 선택에 놓이는데 우리는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최선을 선택하고, 어쩔 때는 최악을 피하는 경우도 있다. 언제나 그렇다. 선택을 했다면 책임을 져야 하고 오롯이 그를 짊어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고금석은 ‘책임을 오롯이 진 사람’은 맞는 것 같다.

사형이라는 죄목에 대해서는 억울하니 얘기할 건 없고, 그러나 인간은 저렇게 변할 수 있는 거구나. 내가 스스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야 변해지는 거죠. 그걸 배우는 거죠. 저렇게 변해가는구나.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는 떠날 때 보면 알아요. 한 인간의 마지막 모습....(삼중스님 인터뷰 중)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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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9. 24. 토
3.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
1977년 23살의 청년이 한낮에 건장한 체격의 남성 4명의 머리를 망치로 가격해 사망하게 한 사건이 발생한다. 언론에서 그는 ‘무등산 타잔‘이라 불리며 무당촌에 살면서 자신만의 무술을 계승하겠다는 등의 기이한 행동을 했다고 나온다. 과연 그것은 사실이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 둘과 가난한게 살아가던 박흥숙은 수재였다. 학교를 다니던 당시에는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중학교도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하지만 그는 수업료를 낼 돈이 없어(이때 중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었다.) 받은 교과서를 팔고 광주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가족들과 같이 살기 위해 무등산에 지은 움막에서 그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해가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패스하였다. 그리고 이런 가난한 형편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법고시를 준비한다.
그는 언론에서 보도한 ‘무등산 타잔‘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1972년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도심 휴양공간으로 개발이 시작됐다.
케이블카가 지나는 방향 아래쪽에 박흥숙의 움막이 있어 그건 아름다운 전망을 보는데 방해가 될 뿐이었다. 더군다나 6개월 뒤에 열릴 ‘전국체전‘으로 대대적인 도시 정화작업도 펼쳤다.

사건 당일, 철거반원들이 박흥숙의 움집을 무너뜨리기 위해 왔다. 박흥숙은 그들에게 사정을 하고 제발 불만큼은 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다시 움집을 짓지 못하게 불을 지른 것이다. 그때까지도 박흥숙은 화가 났지만 동생들을 타이를 정도로 참고 있었다. 그러고는 이 위에는 아픈 어르신들이 살고 있으니 제발 그 집만큼은 불을 지르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한다. 그러나 결국 그 부탁도 들어주지 않고 불을 지르자 박흥숙은 흥분하여 공포탄으로 위협을 가하고 철거반원 7명 중 4명의 머리를 가격한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결국 박흥숙은 사형을 당하지만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속죄하였다.

당시 1970년대는 산업화와 공업화를 통한 경제성장을 위해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해 저곡가 정책을 강행하고 그로 인해 생계를 위해 시골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하지만 돈이 없었던 그들은 급한 대로 판자촌 등을 만들어 살았다. 그러나 수출이 증가하면서 외국에서 바이어나 관광객들이 오기 시작했다.
외국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 창피했던 정부는 서울에서 살던 빈민들을 광주로 강제로 이주시켜버린다. 정부는 이주민들에게 집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개발을 시작한 강남에서는 아파트나 상가가 들어서면서 도심이 되어가기 시작하고 땅값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있던 부유층들은 값이 오르기 전에 땅을 사놓고 땅값이 아주 많이 오르면 팔아서 수익을 내는 투기를 했다.이러한 재개발 현장을 보면서 돈이 된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판자촌 또한 재개발 구역을 삼고 그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던 사람들을 용역 깡패까지 투입해 쫓아낸다. 결국 있는 사람들은 더 배가 불러가고 없는 사람들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박흥숙은 사건은 무당촌에서 살아가던 인간병기가 일으킨 무차별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자신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 터전을 잃어버린 시민의 분노와도 같은 것이었다. 위에서 시킨 대로 공무를 집행했던 철건반원들도 결국 그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을 하던 시민이었을 뿐이었다.
판자촌과 같은 과거를 우리는 이따금씩 새겨야한다. 국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긴 성장통과도 같았지만 당시 우리의 정부는 이것에 대한 해결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나 가진 사람은 기회를 얻을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다. 그것이 근현대에서는 돈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보다 돈이 중요한 것일까?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에는 솔직히 돈이 중요하지만 돈이 전부는 아니다. 아이러니하지만 난 현재 그렇게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평등하게 살아가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소외되어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들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다. 내가 아직은 뭣도 아닌 사람인지라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적어도 잊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한 개인의 사건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추진해왔던 고도 경제 성장의 그늘 아래서 소외되었던 가난한 이웃들을 우리 모두가 방치해온 결과로 발생한, 도시 빈민 지구의 무주택 문제가 첨예화된 한 표상입니다.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고 말았지만, 그 책임을 오직 박흥숙 군에만 돌려도 괜찮겠습니까?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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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9. 23. 금
2. 공작명 KT 납치 사건
-1973년 일본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윤금호에 태웠다가 구출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를 포함해 공권력이 개입되었다는 증거와 흔적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수사는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1972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유신을 발표하였다. 그래서 김대중이 풀려난 후 언론의 압박을 받았다.
아마 이 사건은 제대로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유신 당시의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와 독재정권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까 싶다.

이 챕터를 읽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개인적인 성품을 칭찬하고 싶지는 않다. 정치인을 바라볼 때 인성적인 부분을 바라볼수록 편협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게 됐을 때 발생하는 일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 현재의 민주주의의 정치체제가 얼마나 소중한지, 많은 사람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됐다. 그리고 사실은 이 사건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는데 이 기회에 잘 알게 됐다.

모두 다 용서하기로 했다. 정치보복은 나에게서 끝나야 한다. 그러나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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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9. 13. 화

1.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
크게 보면 여성의 사회적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해군 1955년, 해군 대위직에서 불명예제대를 한 박인수가 자신을 해군 대위라고 속이고 몇십명의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하여 잠자리를 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공무원 사칭과 혼인빙자간음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공무원 사칭에 대한 혐의만 인정받고 혼인빙자간음 혐의는 인정받지 못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그 이유는 박인수와 잠자리를 한 여성들은 문란한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판사는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다˝고 이야기까지 했다. 이 사건을 미루어보았을 때 이 시대에는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중요시하는 사회였다. 그 예시와 사건으로 자유부인, 허벅다리 부인, 메이퀸 호텔 추락사 등을 알려주고 보여준다. 성폭행 사건 때문에 열린 재판에서 이미 이렇게 된 거 서로 결혼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어이없는 사례도 있다.

이 시대는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전쟁 이후 모두가 자유와 평등을 외치게 되는 과도기적인 시대였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여기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사회. 2022년 현대에 들어서는 과연 여성은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볼 수 있을까? 요즘엔 어쩌면 그때와는 다르게 더 복잡하고 예민하다고 볼 수 있다. 요즘엔 극단적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이 된 성별싸움 때문에 이런 문제에 대해 얘기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사실 어느 집단에나 극단적인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아직도 우리는 제대로 된 성평등 인식을 배우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채 단편적으로, 극단적인 주장만을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어서 이러한 현상이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인식 문제는 단순히 몇년에 걸쳐 바뀌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예전보다 평등을 중시하는 현재도 미래에 가서는 후퇴적으로 보일 수 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평등을 중시하는 현재에도 이런 성별 문제는 일어나고 있는데 어째 옛날보다 더 언급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되어 안타깝다. 정작 정말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인터넷의 과열 때문에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성은 왜 이렇게 사회적 약자 취급을 받을까? 얕은 내 지식을 이용해 말해보자면 신체적 차이 때문에 생겨난 남성중심사상이 아직까지도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고대에는 사냥을, 중세에는 전쟁을, 우리나라의 과거에는 노동 중심 사회였다. 이때에는 신체적으로 뛰어난 남성이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 당연한 시절이었다. 그때에는 바깥에는 남성이, 집 안에서는 여성이 담당하는 것이 당연해졌고 전쟁이나 노동은 사람의 생명, 생계와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 때 생겨난 남성중심사상이 아직까지는 내려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예전처럼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지도 않고 일을 하는 것이 꼭 신체적 노동일 필요는 없어졌다. 또한,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인식까지 퍼진 현재 성평등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얘기할 때 여성이라는 범위는 넓다는 것과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였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화두되는 것 같다.
솔직히 나도 이런 문제를 좀 피하는 편이었는데 그래도 성차별적인 발언은 되도록이면 하지 않으려고 한다. 요즘 드는 생각은 우리 세대가 진보적인 아랫세대와 보수적인 윗세대에 낀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역할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지는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문제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실생활에서 조금이라도 경계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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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9. 02. 금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떻게 회피에서 벗어났나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어린 시절 굉장히 예민하고 소극적인 아이였다. 오죽하면 매일 옷을 바꿔입는 것에도 예민하여 매일 똑같은 옷을 입었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의 병 때문에 미야자키의 마음 속 불안도 커져만 갔다. 어머니는 오랜 시간 투병을 했기 때문에 미야자키는 투정이나 불만을 쉽게 터놓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투병 생활 중이었지만 존재감이 강한 여장부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칭찬을 거의 받은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안전 기지로써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청년기까지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잘 펼치지 못하였다. 만화가라는 자신의 꿈을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가쿠슈인 대학에 진학할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안전 기지 역할을 해주었던 사람은 미야자키의 형과 중학교 시절 은사님이었다. 당시 가쿠슈인 대학에는 만화 동호회가 없어 아동문학 연구회에 드나들었다. 그는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나서부터 회피하는 습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당시에는 좌우 이념이 아직 대립하던 시기였는데 대학가에는 좌익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처음에는 정치에 관심없던 미야자키는 서서히 그 분위기에 감염되었다. 미야자키의 친가는 전쟁 중 군수공장을 경영하며 큰 돈을 벌어들인 것에 대한 죄책감도 한 몫했다. 그 시절을 부끄럽게 여겨 어머니와 아버지에세도 반항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와 그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며 그 지배 속에 있던 자신을 밖으로 내걸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도에이 동화에 취칙하게 된 미야자키는 춘투 기간에 일어난 사내 노동운동에서도 선두에서 깃발을 휘둘렀다. 그후 정치적 활도을 하지는 않았지만 약자를 위해 싸우려는 마음은 그의 작품 세계에 큰 기조를 이루게 된다. 또한 미야자키는 생텍쥐베리에게 영향을 받아 어린이를 테마로 다루었다.
이처럼 회피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미야자키는 자신 이외의 존재를 위해 싸우는 공동체 정신으로 자신을 일채화 시켜 가면서 회피와 책임에서 도피하는 행동을 중단하고 전향적인 길을 택한다.

몰랐는데 오늘이 책 마지막이엌ㅅ다. 마지막 챕터 자체는 좋은 말이라 통째로 밑줄긋기에 넣는다.

다른 사람과 인연을 맺는 일에는 번민이 동반된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분명히 하려면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야만 하고, 책임이나 실패의 위험부담도 생겨난다.

그러니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는 게 더 편하고 안전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어느 경우에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책임이나 위험부담도 회피하며 살아가는 것만큼 공허한 삶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가는 것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위험을 피하려고 힘들게 찾아온 기회를 포기하거나 인생의 가능성을 좁혀버리면, 그것으로 정말 위험을 피했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 필요한 것은 불안이나 공포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라, 그것들 앞에 과감히 자신을 드러내고 맞서는 게 아닐까. 불안이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은 자신의 인생으로부터도 도망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계속 도망쳐봤자 마지막 순간에는 죽음이 쫓아와 당신을 집어삼킨다. 스스로를 관 속에 집어넣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오고 관 속에 들어가게 된다. 마지막은 모두 똑같다. 죽으면 불에 타 재가 된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즉 마지막은 파멸과 절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과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모두가 패배자이다. 어떤 도전도 결과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마지막은 실패다. 이것은 불편의 진리이다.
   
우리는 그 결과를 선택할 수 없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도전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그뿐이다. 도망치며 살 것인가, 불안이나 공포와 맞서며 살 것인가? 상처받는 것을 피하려고 자신의 인생으로부터 계속 도망칠 수도 있고, 도망치는 것을 그만두고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며 살 수도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당신 자신의 몫이다.
   
거꾸로 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도전할 수 있다. 결과는 실패라 하더라도 도전할 자유가 있는 것이다.
   
실패라는 결과에만 사로잡혀 살 것인가,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가능성이라는 과정을 음미하며 살아갈 것인가. 결국 인생은 결과에 의미가 있지 않다. 그 묘미는 과정에 있다. 도전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피하면 인생이라는 과일을 맛보지 못한 채 썩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일은 어차피 썩게 마련이다. 그러니 썩기 전에 먹는 게 무슨 문제랴.

-알라딘 eBook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오카다 다카시 지음, 김해용 옮김) 중에서 - P295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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