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9. 02. 금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떻게 회피에서 벗어났나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어린 시절 굉장히 예민하고 소극적인 아이였다. 오죽하면 매일 옷을 바꿔입는 것에도 예민하여 매일 똑같은 옷을 입었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의 병 때문에 미야자키의 마음 속 불안도 커져만 갔다. 어머니는 오랜 시간 투병을 했기 때문에 미야자키는 투정이나 불만을 쉽게 터놓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투병 생활 중이었지만 존재감이 강한 여장부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칭찬을 거의 받은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안전 기지로써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청년기까지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잘 펼치지 못하였다. 만화가라는 자신의 꿈을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가쿠슈인 대학에 진학할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안전 기지 역할을 해주었던 사람은 미야자키의 형과 중학교 시절 은사님이었다. 당시 가쿠슈인 대학에는 만화 동호회가 없어 아동문학 연구회에 드나들었다. 그는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나서부터 회피하는 습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당시에는 좌우 이념이 아직 대립하던 시기였는데 대학가에는 좌익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처음에는 정치에 관심없던 미야자키는 서서히 그 분위기에 감염되었다. 미야자키의 친가는 전쟁 중 군수공장을 경영하며 큰 돈을 벌어들인 것에 대한 죄책감도 한 몫했다. 그 시절을 부끄럽게 여겨 어머니와 아버지에세도 반항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와 그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며 그 지배 속에 있던 자신을 밖으로 내걸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도에이 동화에 취칙하게 된 미야자키는 춘투 기간에 일어난 사내 노동운동에서도 선두에서 깃발을 휘둘렀다. 그후 정치적 활도을 하지는 않았지만 약자를 위해 싸우려는 마음은 그의 작품 세계에 큰 기조를 이루게 된다. 또한 미야자키는 생텍쥐베리에게 영향을 받아 어린이를 테마로 다루었다.
이처럼 회피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미야자키는 자신 이외의 존재를 위해 싸우는 공동체 정신으로 자신을 일채화 시켜 가면서 회피와 책임에서 도피하는 행동을 중단하고 전향적인 길을 택한다.
몰랐는데 오늘이 책 마지막이엌ㅅ다. 마지막 챕터 자체는 좋은 말이라 통째로 밑줄긋기에 넣는다.
다른 사람과 인연을 맺는 일에는 번민이 동반된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분명히 하려면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야만 하고, 책임이나 실패의 위험부담도 생겨난다.
그러니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는 게 더 편하고 안전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어느 경우에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책임이나 위험부담도 회피하며 살아가는 것만큼 공허한 삶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가는 것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위험을 피하려고 힘들게 찾아온 기회를 포기하거나 인생의 가능성을 좁혀버리면, 그것으로 정말 위험을 피했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 필요한 것은 불안이나 공포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라, 그것들 앞에 과감히 자신을 드러내고 맞서는 게 아닐까. 불안이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은 자신의 인생으로부터도 도망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계속 도망쳐봤자 마지막 순간에는 죽음이 쫓아와 당신을 집어삼킨다. 스스로를 관 속에 집어넣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오고 관 속에 들어가게 된다. 마지막은 모두 똑같다. 죽으면 불에 타 재가 된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즉 마지막은 파멸과 절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과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모두가 패배자이다. 어떤 도전도 결과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마지막은 실패다. 이것은 불편의 진리이다. 우리는 그 결과를 선택할 수 없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도전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그뿐이다. 도망치며 살 것인가, 불안이나 공포와 맞서며 살 것인가? 상처받는 것을 피하려고 자신의 인생으로부터 계속 도망칠 수도 있고, 도망치는 것을 그만두고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며 살 수도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당신 자신의 몫이다. 거꾸로 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도전할 수 있다. 결과는 실패라 하더라도 도전할 자유가 있는 것이다. 실패라는 결과에만 사로잡혀 살 것인가,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가능성이라는 과정을 음미하며 살아갈 것인가. 결국 인생은 결과에 의미가 있지 않다. 그 묘미는 과정에 있다. 도전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피하면 인생이라는 과일을 맛보지 못한 채 썩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일은 어차피 썩게 마련이다. 그러니 썩기 전에 먹는 게 무슨 문제랴.
-알라딘 eBook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오카다 다카시 지음, 김해용 옮김) 중에서 - P295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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