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9. 24. 토
3.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
1977년 23살의 청년이 한낮에 건장한 체격의 남성 4명의 머리를 망치로 가격해 사망하게 한 사건이 발생한다. 언론에서 그는 ‘무등산 타잔‘이라 불리며 무당촌에 살면서 자신만의 무술을 계승하겠다는 등의 기이한 행동을 했다고 나온다. 과연 그것은 사실이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 둘과 가난한게 살아가던 박흥숙은 수재였다. 학교를 다니던 당시에는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중학교도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하지만 그는 수업료를 낼 돈이 없어(이때 중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었다.) 받은 교과서를 팔고 광주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가족들과 같이 살기 위해 무등산에 지은 움막에서 그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해가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패스하였다. 그리고 이런 가난한 형편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법고시를 준비한다.
그는 언론에서 보도한 ‘무등산 타잔‘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1972년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도심 휴양공간으로 개발이 시작됐다.
케이블카가 지나는 방향 아래쪽에 박흥숙의 움막이 있어 그건 아름다운 전망을 보는데 방해가 될 뿐이었다. 더군다나 6개월 뒤에 열릴 ‘전국체전‘으로 대대적인 도시 정화작업도 펼쳤다.
사건 당일, 철거반원들이 박흥숙의 움집을 무너뜨리기 위해 왔다. 박흥숙은 그들에게 사정을 하고 제발 불만큼은 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다시 움집을 짓지 못하게 불을 지른 것이다. 그때까지도 박흥숙은 화가 났지만 동생들을 타이를 정도로 참고 있었다. 그러고는 이 위에는 아픈 어르신들이 살고 있으니 제발 그 집만큼은 불을 지르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한다. 그러나 결국 그 부탁도 들어주지 않고 불을 지르자 박흥숙은 흥분하여 공포탄으로 위협을 가하고 철거반원 7명 중 4명의 머리를 가격한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결국 박흥숙은 사형을 당하지만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속죄하였다.
당시 1970년대는 산업화와 공업화를 통한 경제성장을 위해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해 저곡가 정책을 강행하고 그로 인해 생계를 위해 시골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하지만 돈이 없었던 그들은 급한 대로 판자촌 등을 만들어 살았다. 그러나 수출이 증가하면서 외국에서 바이어나 관광객들이 오기 시작했다.
외국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 창피했던 정부는 서울에서 살던 빈민들을 광주로 강제로 이주시켜버린다. 정부는 이주민들에게 집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개발을 시작한 강남에서는 아파트나 상가가 들어서면서 도심이 되어가기 시작하고 땅값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있던 부유층들은 값이 오르기 전에 땅을 사놓고 땅값이 아주 많이 오르면 팔아서 수익을 내는 투기를 했다.이러한 재개발 현장을 보면서 돈이 된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판자촌 또한 재개발 구역을 삼고 그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던 사람들을 용역 깡패까지 투입해 쫓아낸다. 결국 있는 사람들은 더 배가 불러가고 없는 사람들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박흥숙은 사건은 무당촌에서 살아가던 인간병기가 일으킨 무차별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자신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 터전을 잃어버린 시민의 분노와도 같은 것이었다. 위에서 시킨 대로 공무를 집행했던 철건반원들도 결국 그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을 하던 시민이었을 뿐이었다.
판자촌과 같은 과거를 우리는 이따금씩 새겨야한다. 국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긴 성장통과도 같았지만 당시 우리의 정부는 이것에 대한 해결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나 가진 사람은 기회를 얻을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다. 그것이 근현대에서는 돈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보다 돈이 중요한 것일까?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에는 솔직히 돈이 중요하지만 돈이 전부는 아니다. 아이러니하지만 난 현재 그렇게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평등하게 살아가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소외되어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들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다. 내가 아직은 뭣도 아닌 사람인지라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적어도 잊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한 개인의 사건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추진해왔던 고도 경제 성장의 그늘 아래서 소외되었던 가난한 이웃들을 우리 모두가 방치해온 결과로 발생한, 도시 빈민 지구의 무주택 문제가 첨예화된 한 표상입니다.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고 말았지만, 그 책임을 오직 박흥숙 군에만 돌려도 괜찮겠습니까?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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