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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안의 낯선 자들 ㅣ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줄거리
가이 헤인즈는 열차 안에서 낯선 사람을 만난다. 고향인 매트캐프로 가는 길이었다. 새로운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답고 부유한 연인과 신혼살림을 차릴 계획이었고 건축가로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보일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전에 고향에서 할 일이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미리엄과의 이혼을 마무리하고 불행했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작정이었다. 그 다음에야 삶은 그가 바라는 대로 순탄하게 흘러갈 것이었다. 낯선 사람은 가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떻게든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려 했고, 가이는 낯선 사내를 피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특별전용실까지 가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된다. 그의 이름은 찰스 브루노였다. 가이가 미리엄을 미워하는 만큼, 브루노는 자기의 아버지를 증오하고 있었다. 브루노는 아버지를 죽여 없애고 난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가이에게 말한다. 가이는 얼떨결에 미리엄의 얘기를 브루노에게 털어놓고 만다. 브루노는 가이에게 서로의 걸림돌을 몰래 죽여주는 교환살인을 즉석에서 제안한다. 자신이 미리엄을 죽여줄 테니 가이에게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여달라는 그의 말에 가벼운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는 광기가 숨어 있음을 깨닫고, 가이는 그에게서 황급히 벗어난다.
가이는 미리엄과의 이혼을 담판짓지 못하고 상심한다. 그의 고향 방문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미리엄이 끝끝내 자신의 삶에 끼어들려든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의 미래는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는 사이, 가이는 뜻밖의 소식을 접한다. 미리엄이 누군가에게 살해됐다는 것이었다. 고장났던 기계가 수리를 마친 것처럼, 가이의 미래는 다시 순탄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브루노에게서 온 짤막한 편지가 도착한다. 가이는 열차 안에서 브루노가 지껄였던 교환살인이 실행되었음을 깨닫고 괴로워한다.
건축가로서 그리고 한 여자의 약혼자로서 견실한 삶을 영위하는 가이의 내면은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불안으로 고통받는다. 살인에 대한 동기가 전혀 없으므로 브루노는 당국의 수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다. 미리엄의 살인사건은 미치광이의 소행으로 잠정 결론이 내려진 채 미결 사건으로 남았다. 브루노는 이제 자신이 받을 대가를 요구하기 위해 끈질기게 가이를 찾아와 괴롭힌다. 아버지의 살인계획을 상세하게 적은 편지를 보내오는가 하면, 범행을 위한 권총까지 준비해 건넨다. 가이는 브로노의 제안을 거절하고 경찰에 그를 신고하겠다고 맞서보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결국 가이는 브루노가 지시한 대로 한밤중에 그의 집에 찾아가 브루노의 아버지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브루노의 아버지를 위해 일하던 사립탐정 제라드는 살인사건에 의문을 품고 집요하게 브루노를 수사한다. 제라드의 수사망과 함께 그를 시시각각 죄어오는 죄책감에 브루노의 몸과 정신은 피폐해진다. 제라드는 브루노의 아버지가 살해된 것과 가이의 전처의 살인사건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음을 알아챈다. 새로운 결혼생활과 건축가로서의 커리어를 지켜내기 위해 가이는 제라드의 수사를 버텨내지만, 완전히 망가진 브루노는 가이 부부의 요트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해버린다. 가이는 자신의 죄책감을 나눠 짊어진 브루노의 공백을 느끼면서 모든 죄를 털어놓기로 마음먹는다.
미리엄이 살아 있을 당시의 연인이던 남자를 찾아 그는 휴스턴으로 향한다. 거기에서 가이는 남자를 호텔방으로 불러내 자신이 저지를 죄를 고백하지만, 남자는 그게 뭐 어쨌냐는 듯 시큰둥하게 듣는다. 가이는 그동안 짊어왔던 죄책감이 이토록 가벼운 것이었다는 사실에 허탈함을 느낀다. 그리고 살인죄 같은 건 잊어버리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미리 잠복해 있던 제라드에게 발각되어버리고 만다.
감상
내가 처음 접한 하이스미스의 작품은 『동물애호가를 위한 잔혹한 책』이라는 단편집이었다. 거기에서 하이스미스는 쥐나 닭 같은 하찮은 동물들의 눈을 통해 인간의 위선을 파헤쳤다. 나는 동물애호가는 아니지만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추악한 인간의 본성이 거침없이 폭로되는 이야기들을 읽었다. 그녀가 리플리 시리즈의 저자란 사실도 몰랐던 때였다. 그녀의 작품을 더 읽는다는 것은 그녀가 쓴 추리소설들을 읽어야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추리소설 쪽으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무얼 읽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데뷔작인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골랐던 것이다.
그런데 읽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이런 걸 추리소설이라고 하는 걸까? 자고로 추리소설이라는 것은, 평온한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에 다들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갑자기 천재 탐정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둘러보며 ‘범인은 바로 이 안에 있어!’라고 선언하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었나?(내가 추리소설에 문외한이라는 점,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고정관념이 아니더라도 추리소설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기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는 살인의 대상과 범인이 미리 정해져 있고, 주인공들은 짜여진 각본에 따라 행동한다. 풀어야 할 수수께끼도 없으며 범죄의 모든 비밀은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다. <추리>라는 장르에 대한 기대감은 전혀 충족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던 독서는, 그러나 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내가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죄가, 마치 내가 사주하고 계획한 일인 것처럼 말이다. 기차 안에서 미친놈을 마주친 것이, 그 미친놈에게 전부인에 대한 적개심을 토로한 것이 죄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가이는 죄책감으로 파멸 직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쩐지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다.
이 책의 압권은 아무래도 마지막 장면이다. 가이가 고해성사를 하는 상대방은 그의 죄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가 사람을 죽이건 말건 그게 무슨 대수냐는 반응이다. 그때 느낀 가이의 허탈함은, 인과율의 허구성을 시사하는 듯하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인과율은, 어쩌면 아무런 논리도 없는 헛말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이는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고, 인과율의 충성스러운 부하인 사림탐정 제라드에 의해 발각되어버린다. 가이는 비극적인 결말을 원했지만, 결국 그는 희극적인 체포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하지만 가이는 자신의 운명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완전히 체념해버린다. 이러나저러나 파멸인 것이다. 하이스미스가 그린 책 속 세상은 책 바깥의 그것과 그리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승리하는 쪽은 언제나 제라드 같은 인물인 인과율의 세상 속에서, 나 같은 인간은 파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