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그 길을 묻다는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던 릴레이 인터뷰 모음집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인터뷰어인 안희경 씨는 2013년 12월 재레드 다이아몬드를 시작으로 2014년 5월 스리랑카의 A. T. 아리야라트네를 인터뷰하기까지 22만 리 길을 이동하며 세계의 지성들을 만나 우리가 가야 할 문명의 길에 대한 답을 구했다.



개인적으로 사회과학 분야를 무척 좋아하는데 한 권의 책으로 열한 분의 석학들을 만날 수 있다 하니 더욱 기대가 컸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제레미 리프킨, 노암 촘스키, 리처드 윌킨슨, 지그문트 바우만, 장 지글러, 하워드 가드너,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웬델 베리, 원톄쥔, A. T. 아리야라트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인터뷰이 중 한 분은 이 시대 살아 있는 대표 지성으로 꼽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이었다. 인터뷰할 당시 그의 나이는 88세였지만 목소리와 몸짓에는 청년 같은 기백이 넘쳤고, 눈동자는 형형한 빛을 뿜었으며, 그가 풀어내는 말에는 세밀하게 집중해도 다 품기 힘든 방대한 지식과 사유가 넘쳐났다고 한다. 미리 준비했던 수많은 질문은 물거품이 되었고, 흰 눈송이가 바다로 빨려 들듯 그가 품고 있는 생각들 속으로 저자의 모든 질문과 의도는 녹아버렸다고 한다. 나도 그런 장면을 떠올리며 1925년생 노학자의 발언 하나하나에 겸손히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불안한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예를 하나 들면 <뉴욕 타임즈> 일요판 한 회에 담긴 정보가 18세기 개화기에 살던 가장 똑똑한 남자나 여자가 아는 정보보다 더 많습니다. 그들이 온 생을 거쳐 흡수할 수 있는 양보다 많죠. 이는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적으로 숙달할 수 있는 양이 얼마나 빨리 늘어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 (p183)



그는 이 책의 영어 제목인 「Seeking the Way To Save Our Civilization」의 가장 기본 전제부터 짚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는 인터레그넘(interregnum), 즉 공위(空位) 기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 (p183)



인터레그넘은 두 왕의 재위 기간 사이를 말하는데 옛 왕은 죽고, 새로운 왕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시기를 뜻한다. 이는 옛 방식이 매우 빨리 노화되어 더 이상 적절하게 작동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활동 방식들이 아직 개발되지 않은 상태를 비유한다. 확신하기 어려운 시대라서 불안하다는 것이다.



˝현대의 리스크는 옛날 방식과는 달라요. 매우 유동적이고, 신비롭고, 짙은 안개 속에 있죠. 우리는 위험이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무엇을 강타할지 모릅니다. ˝ (p188)



'지금 개인들은 사회적으로 유발된 문제에 대해 개인이 알아서 자구책을 찾도록 기대 받고 있다고' 말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말을 언급하며 문제는 사회적으로 생산된 건데, 책임은 개인이 지는 이 모든 것의 뒤에는 권력과 정치의 이혼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권력이란 일이 되게 하는 능력이고, 정치는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요즘은 권력이 지구 전체로 작용하고 있다. 금융과 무역이 세계화되었고, 무기 교역과 테러리즘까지도 세계화된 현실에선 모든 종류의 권력이 국가가 조절하는 영역 밖에 거주하게 되었다. 세계화된 권력은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불확실성은 매우 불쾌한 상태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만약에 지금 무엇이 일어나는지 우리가 안다면, 적어도 이론이라도 알 수 있다면, 우리가 변화를 독려할 수 있겠죠. ˝ (p196)



우리의 한 손에는 정치적인 조절로부터 벗어난 권력을 갖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지속적으로 권력의 부재로부터 고통받는 정치를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권력과 정치가 통합된 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도시는 이 둘의 동거가 가능합니다. ˝ (p204)



˝각 도시의 시장들은 다른 도시의 시장이 하는 일을 지켜봅니다. 뭔가 흥미롭다 싶으면 더 자세히 살피다가 쓸모 있다고 여겨지면 자기 시에 적용하죠. 강압 없이, 입법 없이, 경찰 없이! 효율적인 소통 규모이기 때문에 빠르게 옮겨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배우고 있어요. 한 도시에서 시작된 긍정적인 변화가 트렌드가 되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갑니다. ˝ (p204)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순을 피할 수 없다. 서로 협력하고 의존하면서도 배척과 차별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진보를 추의 운동이라고 말한다.



˝인생의 만년에 와서야 도달한 결론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그것은 똑바로 뻗은 직선이 아니었습니다. 젊어서 상상할 때 진보란 얽히고설킨 장애 없이 똑바로 앞으로 나아가는 행진이라고 여겼습니다. 구부러진 비틀림 없이 말이죠. 그러나 실제 진보는 추의 운동 같습니다. ˝ (p205)



우리에겐 자유와 안전이 모두 필요하지만 결코 자유와 충분한 안전을 가질 수는 없다. 우리는 뭔가를 얻으면 뭔가를 잃기 때문이다. 문명 속에서 산다는 것은 서열 지어진 환경 안에 있다는 의미이고 사람들은 더 안전해지기 위해 더 많은 개인적인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 



˝불행은 말이죠, 사람들이 사실상 무제한의 자유를 구하고 싶어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엄청난 안전을 투항시키는 데서 오고 있습니다. ˝ (p208)



그가 청년기였을 땐  '일생을 거는 프로젝트를 만들라'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말이 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젠 그런 조언이 유효하지 않다고 말한다. 요즘 학생들에겐 당장 내년에 할 프로젝트라도 있으면 행복하겠다는 말을 듣기 때문이란다. 그럼에도 그는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행복이란 문제로부터 자유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에요. 대신 행복은 문제를 극복해나가는 것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문제없는 인생은 행복의 레시피가 아닙니다. 이는 지루함의 레시피입니다. ˝ (p212)



행복은 어려움을 직면하고 극복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도 상업적인 마케팅에 의해 잘못 이끌리고 있다고 말한다. 마케터들이 이런 문제들을 단박에 해치울 해법들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복이란 우리에게 삶의 실제를 직시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견을 달자면 약이냐 요리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아플 때마다 처방을 받기 위해 약국으로 달려갈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건강을 도모해 나갈 것인지 말이다.



˝우리는 권력과 정치를 재혼시켜야만 해요. ˝ (p215)



우리가 행동으로 다시 심어내고 재생하고 뒤바꿔내는 전환이 없다면 우리는 못난 이데올로기를 대치하는 아름다운 이데올로기를 가질 수 없을 거라고 그는 말한다.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믿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찾아 나설 것이고, 그 답은 세상에 나올 거라고요. 나는 당신 세대가 그 길을 이루도록 모든 행운을 전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그 대안들은 어딘가에서 당신들이 발견해주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창조해야 합니다. 기회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거니까요. 저는 그저 사회학자일 뿐입니다. 당신에게 어떻게 살라고 조언해주는 카운셀러가 아니에요. 우리의 삶에 어떤 선택 상황이 놓여 있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할 뿐이죠.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 (p216)



내가 바우만의 인터뷰에 이끌린 이유도 그가 구체적 방법보다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우만의 말대로 진보가 추의 운동이라면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만 볼 것이 아니라 왜 뒤로 밀려나갔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막연한 기대나 희망보단 다음 세대가 다치지 않게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인상 깊었던 인터뷰이 중 또 한 분은 스리랑카의 간디라 불리는 A. T. 아리야라트네였다. 스리랑카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가난한 나라인데도 모든 교육이 무상이며 GDP가 비슷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삶의 질을 가늠할 수 있는 지수가 월등히 높다고 한다. 아리야라트네는 스리랑카 최대의 민중 조직인 사르보다야 운동의 창시자다.



저자는 첫 인터뷰 대상자가 정해지기 이전부터 마지막 인터뷰이는 스리랑카의 아리야라트네 박사라고 마음에 품었단다. 사르보다야 운동의 실천 덕목은 불교의 팔정도라고 하는데 고전적인 방식이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안운동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시각을 갖춰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개인, 가족, 이웃, 그리고 나라가 스스로의 전망을 가져야 해요. ˝ (p413)



˝우리네 삶은 물질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정신적인 부분이 함께 존재합니다. 마음과 물질이 우리의 삶을 이루는 형식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적 개발까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 (p413)



˝세월호가 물에 잠길 때 나도 울었어요. 세계가 함께 울었습니다. 뒤늦게 드러나는 보도를 보니 역시 구조의 모순 때문이었습니다. 대체 그 어린 목숨이 잠길 때까지 조직의 꼭대기에서는 무엇을 한 겁니까? 언론은 누가 주무른 걸까요? 조직의 꼭대기를 좌우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돈, 권력을 부르짖는 사람들인 겁니다. 권력과 돈이 그들의 종교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이런 참사가 발생하는 겁니다. 우리는 권력과 돈이 우두머리가 된 사회적 순위를 교체해야 합니다. ˝ (p413)



당장의 돈 흐름을 살리겠다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땅도 주고 권리도 팔지만 초국가적 기업들은 성장이 아닌 가난을 만들고 떠난다고 그는 말한다.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아 성장지수만 높이고 결국에는 빈곤만 남는다는 것이다.



˝길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까지 고려하자는 거지요. ˝ (p416)



아리야라트네는 사르보다야 운동이 스리랑카 전체 마을의 3분의 1인 1만여 마을이 참가하며, 50년 동안 지속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비결을 이렇게 말한다.



˝그 답은 정치적 중립에 있습니다. ˝ (p424)



그들은 지독하게도 독립적으로 행동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며, 기업이나 단체의 지원을 받기도 하지만 아무런 조건이 없을 때만 받는다고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기 때문에 지금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습니다만, 동시에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 (p425)



사르보다야 운동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들 대신 아리야라트네가 한국의 대통령에게 전할 메시지를 그대로 옮겨 적어보려고 한다.



˝그래요, 제가 좀 오래 살았으니까 감히 말을 꺼내보겠습니다. 마담 프레지던트, 부디 기억해주세요. 당신의 첫 번째 목표는 당신의 모든 권력과 돈, 지식, 지혜를 모아 당신의 내각과 각계 리더들이 이 한 가지를 마음에 새기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네 단어입니다. 'The Last, The First'예요. 마하트마 간디가 우리에게 남긴 말입니다. 진정한 개발은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약한 그 사회 속 마지막에 놓인 사람이 이익을 얻도록 하는 겁니다. 당신 나라의 번영을 부자나 중간 계층에 맞춰서 꾸려가면 안 됩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약한 사람이 조금 성장할 때, 나머지 모든 국민도 혜택을 보게 되는 거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 부자들에게 말하세요. 부는 반드시 가난한 이들과 나눠야 한다고요. 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세요. 그 권력으로 사람들을 억압하지 마세요. 당신의 권력도 국민과 나누세요. 민주주의는 국민들이 생각의 자유, 결사의 자유, 결정의 자유를 누리는 겁니다. 인간으로서의 자유는 반드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약속되어야 하는 겁니다. 저는 정치권력을 잡아본 적도 없고, 재산도 없는 노인입니다. 그저 나이 많은 행복한 사람으로서 드리는 조언이에요. 당신도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 (p438)



인터뷰어인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소 팔아 대학을 다녔던 30년 전 청년들은 졸업과 함께 정규직이 되었지만, 대출로 대학에 다니는 그들의 자식들은 무보수 인턴을 버텨낼 재력과 스펙 쌓기에 투자할 자금 지원이 없으면 서른까지 이어지는 아르바이트, 혹은 마흔이 되어도 잡기 힘든 정규직 전환 기회를 바라보며 가난과 울적함을 버텨야 한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 (p8)



요즘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공허해 보인다. 불안해 보인다. 늘 화가 나 있는 듯 보인다. 사회의 흐름이 곧 우리들의 표정 같기만 하다. 그래서 문명, 그 길을 묻고 있는 것이고, 떠도는 마음들이 서로 공감하고 협력하여 희망 쪽으로 다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열한 분의 지성들이 문제점을 파악하거나 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고 있지만 결국 우리들의 답은 우리 스스로가 찾아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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