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재미있게 읽었어. 실무적인 수학이며 통계가 줄줄이 나오고, 아까도 말했지만 문학적인 색채는 적어. 체호프의 과학자로서의 측면이 짙게 드러나 있지. 하지만 나는 거기서 체호프의 순수한 결의를 느낄 수 있었어. 그리고 이따금 그런 실무적인 기술에 섞여 나오는 인물 관찰이나 풍경 묘사가 아주 인상적이야. 사실만 늘어놓는 실무적인 문장도 그리 나쁘지 않아.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히 멋있지. 이를테면 길랴크 인에 대해 서술한 부분도 그렇고. " -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이는 하루키가 그의 소설 「1Q84」에서 주인공 덴고의 입을 빌려 안톤 체호프「사할린 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현지 실태 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사할린 섬」은 1890년, 체호프가 서른 살이었던 해에 유형지였던 사할린 섬에서 3개월간 체류하며 세밀히 조사하고 관찰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오랜 기간 의사로 활동했던 체홉은 의학을 '부인', 문학을 '애인'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체홉의 글은 문학적인 통찰력과 과학적인 객관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특별한 장소와 사람들에 대한 기록으로서 상당한 가치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루키의 소설「1Q84」엔 체홉의 「사할린 섬」에 관한 내용이 십여 페이지에 걸쳐 나오는데 물론 캐릭터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나의 감상은 하루키의 감상과 유사했다. 체홉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사할린 섬의 실태를 객관적인 기록으로 남겼지만 관찰자로서 체홉의 시선은 수치로 표현되지 않는 인간의 본질적인 면면들을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키는 나의 이러한 일반적인 감상에, 작가로서 체홉을 대변하는 이야기들을 더해주고 있어 흥미롭다.

 

 

 

"체호프는 소설가이면서 동시에 의사였어. 그래서 그는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러시아라는 거대한 국가의 환부 같은 곳을 자신의 눈으로 검증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자신이 도시에서 안온하게 살아가는 인기 작가라는 사실에 체호프는 뭔가 불편한 감정을 품고 있었어. 모스크바의 문단 분위기가 지겹기도 했고, 걸핏하면 서로 물고 뜯는 잘난 문학 동료들과도 어울릴 수가 없었지. 본성이 심술궂은 비평가들에게는 혐오감밖에는 느끼지 못했고. 체호프에게 사할린 여행은 그런 문학적인 때를 씻어내기 위한 일종의 순례 행위였는지도 몰라. " - 「1Q84」, 무라카미 하루키

 

 

 

덴고라는 캐릭터를 통한 하루키의 설명에 의하면 "작가로서 중요한 시기에 쓸데없이 왜 그런 의미 없는 짓을 했을까? "라며 수군거리는 주위 사람들, "사회성을 노린 단순한 매명 행위 "라는 비평가들의 목소리, "더 이상 쓸 이야기가 없어서 소잿거리를 찾아 거기까지 갔을 것 "이라는 일부의 의견들 속에서도 결국 체홉은 사할린 섬으로 떠났던 것이다.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었고, 심지어 유형의 땅이었던 그곳으로 말이다. 게다가 아직 시베리아 철도가 가설되기 전이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사할린 섬」의 역자 서문에 의하면 체홉은 당시 불치병이라 여겨졌던 폐결핵이 이미 발병하여 건강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나 역시 이러한 서문을 읽었음에도 막상 글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체홉보단 사할린 섬과 사람들, 존재와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작가인 하루키는 체홉에 대한 생각도 놓치지 않는다.

 

 

 

"사할린 섬은 많은 의미에서 그를 압도했어. 그렇기 때문에 체호프는 사할린 여행을 소재로 삼은 문학작품은 단 한편도 쓰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건 쉽게 소설의 소재로 삼을 수 있을 만큼 어중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 환부는 말하자면 그의 몸의 일부가 되었어. 어쩌면 그것이 그가 원하던 것이었는지도 모르지. " - 「1Q84」, 무라카미 하루키

  

 

 

평소 책 읽는 것만큼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가 사람과 장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인데 이유는 몰라도 어릴 때부터 영화 보단 다큐멘터리를 더 좋아했었다. 아마 완결된 이야기로서의 구조보다는 약간의 거리를 둔 관찰자의 시선으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걸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다. 체홉의 「사할린 섬」은 조용하고 차분하게 집중할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톤의 다큐멘터리를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특히 권력에 의한 우연성이 인간의 삶을 굴복시키는 상황들에 대한 체홉의 날카로운 통찰력이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다. 체홉의 단편소설을 읽다 보면 삶의 정수를 파고드는 그의 통찰력에 감동을 받게 되곤 하는데 이는 소설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였다.

 

 

 

체홉은 가장 밑바닥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유형수들을 바라보면서 인간이 어떻게 인간성을 잃어가는지에 대해 주목한다. 그리고 정책의 부조리함도 조목조목 지적한다. 유형수들뿐만 아니라 사할린의 원주민인 길랴크 인과 아이누 인의 생활 풍습 역시도 세세하게 기록하는데 이때 체홉의 예리한 관찰력이 돋보였다. 하루키도 이 부분을 인상적으로 읽었는지 길랴크 인에 관한 부분을 「1Q84」에서 상당 부분 인용하고 있다. 어쩌면 작가의 능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관찰력이고, 나머지는 쓰는 데에 필요한 인내심과 노동이 아닐까 싶다. 특별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찾아내고, 보편적인 것에서 특별한 것을 보는 능력이 작가의 능력이지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갖기 위해 작가들 저마다 노력하는 것 같다. 글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것일 테니 말이다. 사할린의 경험 이후 체홉은 소설에서 희곡으로 영역을 넓혀 갔고, 그 희곡들은 러시아와 세계의 수많은 극장에서 상연되는 불후의 작품으로 남았다.

 

 

 

"눈을 감자 덴고는 인적 없는 오호츠크 해의 찬 바닷가에 홀로 서서 깊은 사색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체호프의 어디에도 둘 데 없는 우울한 사색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 땅 끝의 대지에서 그가 느낀 것은 압도적인 무력감이었으리라. 19세기 말에 러시아 작가로 산다는 것은 아마도 달아날 곳 없는 통렬한 숙명을 등에 짊어지는 것과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그들이 러시아에서 도망치려고 하면 할수록 러시아는 그들을 제 몸뚱이 안으로 삼켜 버렸다. " -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은 특수한 상황의 실태 보고서 임에도 마지막 페이지까지 무심히 읽을 수 없었던 것에서 체홉의 진가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를 인용한 하루키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체홉을 찾아 읽기도 했을 테니 하루키 역시 비범하다 말하고 싶다. 나 역시 사할린 섬을 읽으며 몇 년 전 읽었던 하루키의 소설이 떠올랐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필요한 부분만을 찾는 게 아니라 추억을 더듬 듯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엔 체홉과 함께 혹한의 시베리아를 거쳐 거칠고 삭막한 유형지의 땅을 경험했고, 다시 하루키와 함께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를 듣는 여정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체홉과 사할린 섬, 하루키의 1Q84, 그리고 나, 우연과 필연이 만나 만들어가는 독서의 여정이 의미 있게 느껴진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11-26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6 1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5-11-30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호프의 사할린섬은 페이지가 많지 않은 책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상당히 두꺼운 책이네요.^^
제 서재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물고기자리님, 오늘도 따뜻하고 좋은 시간 보내세요.^^

물고기자리 2015-11-30 20:25   좋아요 1 | URL
네, 체홉이 직접 정성스럽게 작성한 미주까지 포함해 570여 페이지 정도의 분량인데 섬세한 통찰을 담고 있어서 지루하거나 길다는 느낌이 들지 않더라고요. 제 취향의 기준이지만 말입니다^^ 서니데이님이 리뷰하신 책이 마침 제 관심분야라 읽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담아 놓았습니다ㅎ 서니데이님도 오늘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