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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에릭 라인하르트 지음, 이혜정 옮김 / 아고라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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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는 어린 소녀들의 로망이었다.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던 그녀앞에 유리구두를 들고 짠하고 왕자님이 나타나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  누구나 한번쯤은 신데렐라가 되고 싶어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안에 나도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신데렐라 로망은 그저 로망일뿐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고 괴리감만 가득할뿐 어찌보면 한때의 헛된 꿈일뿐이라는거.                           저자 에릭 라이하르트는 그 신데렐라 로망을 한껏 비툴어  현대사회에서 유리구두를 신는 사람도 없을뿐이며 더이상 유리구두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모순과 좌절만이 뒤따르게 된다고 말한다. 한 예로 모방송사에서 방영하고 하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착하디 착한 신데렐라가 아닌 악하게 될수 밖에 없었던 냉소적인 신데렐라 언니가 주체가 되지 않는가.

<신데렐라>는 내가 독서하는데 있어서 주로 선택하는 요소들을 많이 갖추고 있다. 우선 페이지가 두껍다. 단편보다는 장편을 즐기는 나에게 두툼한 두께감은 그야말로 만족 그자체다 더욱이 쓸데없이 분권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프랑스 소설이라는거 최근 급 프랑스 영화와 소설에 흥미를 가지고 있기에 더할나이 없다. 독특한 소재하며 우리와는 많이 다른 생활관은 문자와 영상으로 그대로 표현되면서도 그들의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분방함을 사랑한다. 그리고 마지막 표지. 흰바탕에 검은색 종아리라인과 하이힐. 나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망설임없이 선택하였다. 

4명의 등장인물 그러면서 각각 다른이야기 그렇지만 하나의 주제를 담고있는 흥미로운 소재를 지녔으면서도 이책 정말 녹록치 않다. 초반에야 대부분의 장편이 등장인물 설명하랴 서로간의 개연성을 찾느라  좀 지루할수 있다 쳐도 등장하는 인물들이 쉬 공감가지도 않을뿐더러 활자에 흡인력이 부족하였다. 오랜만에 참 힘들게 읽어나간 책이었다. 쉽게 포기해 버리는 내가 끝까지 읽어나간것만도 용타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안좋게만 평하고 싶지는 않고 단지 내 취향이 아니었으며 나에게는 쉽지 않은 작품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신데렐라 동화를 모티브로 잡고 이 한권의 책에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 내고 싶었나 보다 그런데 사공이 많으면 산으로 간다고 어쩌면 나의 이해력이 떨어져서 일수도 있지만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공감대를 형성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다보니 거부감마저 들게하는 인물까지 존재한다. 신데렐라? 신데렐라를 꿈꾸는 현대인들의 슬픈 자화상?
내가 지레짐작으로 신데렐라 제목을 보고 혹은 표지를 보면서 대충은 저자의 의도만 파악할뿐 소설에서는 그 이상을 찾기가 힘들었다. (나의 기대치가 높았나?)   

더할나위 없이 멋진 구두가 그 빛을 잃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구두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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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
닉 혼비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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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자체가 슬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잘한다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는 것이 스케이팅이요.스케이팅(스케이트 보드)만이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외치며 스케이팅의 우상 토니호크의 자서전을 4,50번이나 읽어 이제는 달달 외울정도가 되었으며 그와 대화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고 생각하는 이제 열여섯살에 샘. 수학은 잼병이지만 미술에는 재능이있다는 소리를 듣는 나름 뿌듯해도 될터인데 그저 무념무상.
장래 모델이 꿈이 어여쁜 여자친구 앨리시아도 사귀고 친구들과 스케이팅도 하고10대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샘에게 청천벽력같은 그야말로 슬램이 찾아온다. 데이비드 베컴보다 세살, 로비 윌리엄스보다는 한살 위에다 제니퍼 애니스톤보다 네살 어린 16살의 아들을 키우는 서른두살의 엄마가 이제는 할머니 소리를 들어야 한단다. 자신의 인생에서 그것만은 피하리라고 결심했건만 16살에 아빠라니 집안 내력도 아니고서야~~~ 고민의 고민을 해보기도 하고 미래와 과거를 오가는 타임머신을 타보기도 하고 고 엄마와 갔던 휴가지로 가출도 실행해보지만 그시간은 고작해야 24시간. 대범하지도 못한데다 책임감도 그다지 강한것 같지 않은 샘의 최종결론은 그냥 미래가 오도록 놔두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아빠로서의 자리를 찾아가는 샘의 성장소설이다.

영국은 청소년 임신율이 유럽에서 최악을 자랑한다고 하는데 비단 남의 나라 이야기만이 아닐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그저 심각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자리에 선 샘과 앨리시아의 모습은 좌절하기 보다는 현실을 수용하고 미래를 꿈꾸는 모습은 대견하고 사랑스럽기 그지 없었다. 시종일관 진지하고 무겁기만 하였다면 그곳에서 희망을 찾을수 있을까? 저자는 샘을 내세워 유머러스로써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그저 평온하기만 한다면 그만큼 지루한 인생도 없을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슬램들을 하나씩 하나씩 헤쳐나가면서 인간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다. 샘도 마찬가지이다. 언젠가는 TH가 칭찬에 칭찬을 할 날이 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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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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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한사람으로써 책과 관련된 제목만으로도 새삼 설레이는 것은 당연한 감정이 아닐까 싶다. 더구나 이번에는 책을 읽어주는 남자란다. 더욱더 궁금하지 않을수 없다. 문득 어릴적 침대맡에 아버지가 읽어주시던 동화책과 낮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곤 하던  아스라한 추억을 떠오르게 하니 말이다. 물론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주어야 할 나이가 되었지만 아주 가끔은 어릴적 아버지가 읽어주시던 그때가 그립기도 하는데 지금 아버지께 책 읽어달라고 부탁한다면 나를 이상한 애 취급할것은 자명할것이기에 참기로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책 읽어달라고 부탁을 한다면 꽁무늬부터 빼느라 바쁠 것이다. 내 목소리가 타인의 귀에 쏙쏙 들어가는 낭낭한 목소리도 아닐뿐더러 괜시리 부끄러워서 제대로 읽질 못하는데 학창시절 교과서는 어떻게 읽었을까나. 물론 그때와는 입장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간혹 어머니께서 책이 아니더라도 간단한 광고문구나 성경몇구절을 낭독하라고 할때도 부모님인데도 쑥쓰러워하는 나를 보면서 후에 나에 아이들에게는 과연 책 한권이라도 읽어줄수 있을런지........,

15살 소년 미하엘은 어느날 간염으로  인해 갑작스런 구토로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되고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여인은 한나라는 36살의 중년 여성이었다. 다음날 감사인사를 하기 위해 한나를 찾아가게 되고 같은 또래에서는 볼수 없는 원숙미와 신비로움을 간직한 한나에게 강하게 끌리게 되면서 그들의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나누기, 그리고 나란히 누워있기라는 의식은 시작된다. 

그러나 영원할것만 같던 의식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버린 한나로 인해 종지부를 찍었고 미하엘에게는 한나를 향한 육체적 그리움과 더불어 그녀를 외면한것에 죄책감만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다시만난 미하엘과 한나. 하필 그곳은 법대생이 되어  나치 강제수용소와 관련된 사건을 참관하기 위해 찾아간 법정이었다. 그곳에서 한나는 수용소의 감시원이었던 과거사에 대한 피의자 신분으로 재판을 받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필사적으로 숨겨온 비밀을 눈치채게 되는데 그것은 왜 자신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했는지 왜 여행지에서 그의 뺨을 때렸는지 그녀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그 비밀을 필사적으로 감추기 위해 끝끝내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종신형을 살게되고 여기에서 미하엘은 또 한가지의 자신 스스로에게 죄를 씌운다. 그 죄는 재판과정에서 한나를 위해 사실을 말할수 있었으나 침묵한 죄이다. 

그후 미하엘은 한번의 방문도 편지도 쓰지 않고 한나에게 수감생활내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보냄으로써  '책 읽어주기'를 계속하였다. 그렇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멀어지지도 한발짝 다가서지도 않고 자신이 정한 테두리안에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하려 한다. 과연 사랑이라고 할수 있을까?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가져간 그녀를 향한 도피는 아니었을까? 아니면 스스로에게 씌워진 죄에 대한 속죄는 아니었을까.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제 갓 성에 눈을뜬 15세 소년을 제어하지는 못할망정 그와 동조하는 한나의 행동은 무책임하고 무절제한 모습이 아닐수 없었다. 차라리 15살이 아닌 25살과 46살이라면 속된말로 "능력좋다"라고나 할수 있지. 최근 미드SUV에 빠져있어서 더욱더 한나의 행동에 동조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밑바탕에는 남녀간의 사랑, 독일 나치의 시대사, 인간 내면의 근간이 자리잡고 있다. 한남자는 배반이라는 원죄를 덜기위해 , 한여인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한 나라는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감추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복잡 미묘한 양상으로 전개되어진다. 

나에게 결코 쉬운 작품이 아니었다. 쉽다고 생각하고 읽다보면 어느새 그들의 내면심리를 이해할수가 없다가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고 철학적인 문제를 맞닥들이게 되면 마치 눈앞에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답답함을 동반하기도 하는 둥 완독을 하였지만 결코 다 읽었다고 할수 없는 개운치 않음을 동반한 작품이라고 할까. 그런데 기회가 되면 다시한번 읽어보고 싶기도 한 작품이기한 묘한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를 완독할즈음에 동명 영화인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영화에서 여우주연상 수상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책에서는 한나의 감정을 나로써는 이해될듯 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던 예민하면서 신비롭고 복잡한 사연을 지닌 한나라는 캐릭터를 케이특 윈슬렛이 어떠한 표현했을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탁월하였기에 오스카상을 받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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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애무
에릭 포토리노 지음, 이상해 옮김 / 아르테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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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어머니가 될수 있는가?
 
저자는 붉은애무를 통해 아버지는 무엇이며, 어머니는 무엇인지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될수 있는가 라고 질문을 던진다.
나는 먼저 질문에 답을 하고 시작하려한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혹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역할을  부재에 따른 보충일뿐 완벽하게 채운다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된다.  특히나 서로가 서로의 존재자체가 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신문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말들처럼 '어머니가 아버지 역할까지 하느라 고생하셨다고 이제는 그 고생에 보답할 차례라고'
이렇듯 대신일 뿐이다. 
 
<붉은 애무>는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시에 되려했던 한 사내의 비극을 그려내었다.
펠릭스는 자신의 전부였던 아들 콜랭을 뺑소니 사고로 인해 잃는 사고를 당했다.
사고의 고통을 가슴을 뭍어두고 일에만 열중하던 그에게 화재가 났다는 전화한통으로 현장으로 달려간 그가 접한 사실은 모자의 실종뿐이었다.
이일은 계기가 되어 가라앉아 있던 아들에 대한 기억이 다시금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고, 이야기는 아들을 잃은 상실감으로 하루하루를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펠릭스의 행보를 통해 과거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의 아들과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과정을  서로 교차시켜가면서 진행한다.
 

펠릭스는 홀어머니 밑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모르고 자라났고. 홀연히 떠나버린 마리로 인해 콜랭은 어머니의 존재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였을까 . 콜랭이 겪게될 고통을 대물림해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엄마의 빈자리를 메우고자 결심하면서 낮에는 아버지로써 밤에는 어머니로의 영역을 교대하면서 급기야는  아빠인지 엄마인지 모를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면서 위태롭게 한편으로 만족스럽게 경계를 넘나들게 되지만
갑작스럽게 귀환한 마리로 인해 한순간 제자리를 찾게되고 엄마였던 펠릭스는  이세상에서 없어져야할 존재가 되어버린다. 
아빠로 50%, 엄마로 50%, 100%의 사랑을 콜랭에게 주었던 펠릭스로써는 엄마의 사랑 50%의 상실감은 회복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상태였고 콜랭의 거부는 촉매제일 뿐이었다.
" 너무 큰 사랑이 아이를 죽일수도 있다는 거 아세요, 마레스코씨?
펠릭스는 사랑을 하는 방법에서 사랑을 주는 방법에서 미숙아였던 것이다. 결국은 콜랭에 대한 과도한 사랑이 재앙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이책을 읽는 많은 독자들은 대단한 반전이라고들  하지만 이미 내용의 줄거리를 알고 있던 나에게 새삼스레 반전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단순히 반전의 대단함만을 생각한다면 괜찮은 한편의 미스터리 소설이다. 그러나 반전속에 숨겨진 부재로 인한 결핍, 상실로 인한 허무함, 정체성의 혼란등 인간의 내면 또한 섬세하면서 탁월하게 그려내었다는 것이다.
저자 에릭 포토리노는 이 소설에서 기존질서에 대한 위반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슬프고 허무하다. 
철저하게 작가의 의도대로 등장인물 한사람 한사람이 결핍된 자들만으로 응집되어 있을 뿐인지라 한사람이라도 펠릭스 옆에서 제대로 된 사랑을 보여주었다면 비극은 없었을테니 말이다.
너무나 화창한 날씨의 그날이면 따스한을 맛보았을텐데 스산한 초겨울 참바람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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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뜨는 여자
파스칼 레네 지음, 이재형 옮김 / 부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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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파도에 떠밀리다


최근 읽은 프랑스 소설로 내게 좋은 인상을 남긴 카롤린 봉그랑에 <밑줄긋는 남자>와 같이 발랄하거나 사랑스럽지는 않을 지언정 가끔 접한 프랑스 영화의 황당함과 독창성에 혀를 차는 경우가 생기듯이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니 결코 만만치 않은 소설일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왠걸 서술이나 형식기법이 기존에 접해보지 못한 생소함과 이렇게 텍스트의 절제미는 당황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로인해 인해 200페이지도 안되는 책을 자그만치 2주라는 시간을 소요하고서야 완독하였지만 그동안 나는 올가미에 갇혀 있었다. 처음 몇페이지를 읽으면서 신선함과 텍스트의 매력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대로 덮고 다른 책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도무지 책의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않고 뽐므라는 사과같은 여성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또다시 책을 집어들고 어떻게든지 <레이스 뜨는 여자>의 의미를 찾고 이해해보려는 지금의 내모습이 어릴적 처음으로 같던 피서지 바닷가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대면서도 헤엄쳐보려던 그때처럼 텍스트 파도에 떠밀려 버둥거리면서 간신히 육지에 닿았지만 다음에 재독하게 된다면 제대로 유영해보고 싶은 마음과 함께 영화도 찾아보아야 할듯 싶다. 그러나 당장은 영화까지 받아들이깅는 과부하가 일어날것만 같기에 당분간은 자제하려 한다. 

뽐므는 사과같이 겉과 속이 반들반들한 여자이다. 결코 아름답다고 할수 없으나 나름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뽐므는 꽉찬 느낌을 준다. 아버지는 어릴적 집을 나가고, 어머니는 술집에서 일했으며 열여덟살이 된 뽐므는 시골을 떠나 파리에 와서 미용일 보조가 되고 술집을 그만둔 어머니는 유제품 판매원으로 일하면서 생활을 이어나간다. 같은 미용실 동료 마릴렌과 함께 떠난 여름 휴가에서 미래의 박물관장을 꿈꾸는 에므리를 만나 사랑을 하고 동거를 하게 되지만 처음 뜨거웠던 감정도 순종과 순응만 알고 자기주장이라고는 없는 뽐므에게 차츰 싫증을 내었면서 예정된 이별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이별하는 순간조차도 "아, 좋아요!"에 이어 "알고있었어요"라는 말과 함께 짐을싸서 그 집을 나온다. 이제 뽐므는 사랑을 잃고 슬픔에 빠져있지만 그것 못지않게 스스로의 미숙함과 무가치함에 수치심을 느껴버린 그녀는 거식증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면서 세상과 단절을 시도한다.그리고 몇년후 정신병원에 에므리와 뽐므는 재회하게 된다는 통속적인 연애소설의 맥을 잇는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스포일러가 될수 있는 줄거리를 나열함에는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닌 철학적이고 사회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레이스 뜨는 여자>는 인간에게 있어 소통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어릴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수동적인 모습에 길들여져 있었고 스스로는 침묵하고 있을지언정 대화가 오고가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짚어내는 소통방식을 가진 뽐므와는 반대로 연인인 에므리는 귀족집안 출신이라는 사회적 배경을 지니므로써 본연의 뽐므보다는 자기식대로 변화시키려는 이기적이고 권위적인 행동과 그녀의 소통방식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소통이란 일방통행이 아닌 양방향 통행으로 시작되어 지는 것이다. 한쪽은 침묵이 배려라는 일방성과 또 다른 한쪽은 자기식대로 길들이려는 일방성은 제대로 소통을 이루어 내지 못하였고 소통단절은 뽐므에게 세상과의 단절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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