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264 : 아름다운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
고은주 지음 / 문학세계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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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 이육사. 저항시인 이육사에 너무 익숙한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양반과 선비에 대해

양반 혹은 사대부는 벼슬아치를 두고 하는 말이고 이는 신분계급 철폐와 함께 사라졌고 선비는

인격적 개념으로 결코 사라질 없고 세속의 고난을 초월하여 천명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려는 군자의 이상이라 말하며 자신이 '선비'임을 자처했던 이육사.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아호도 지니고 있지만 자신의 수인번호인 '264' 숙명처럼 받아들여 가슴에 품있던 남자,

펜을 없을 총을 들었고 총을 없을때엔 펜을 들었던 남자 그는 분명 선비였다.

하나의 선비가 있다. 자신은 육사처럼 강인하지 않아서 고문을 견뎌내지 못할것이기에 아예

가장 친한 지기였던 육사의 행적조차 묻지 않았던 신석초 선생의 모습에서도 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의지와 길을 끝까지 걸으려는 결의와 지기와 함께 하려는 선비의 열망이 느껴진다.

 

수부선행(水浮船行)

물이 배를 띄워서 나아가게 한다는 말로 육사가 자신을 도와 독립군 군자금을 지원한 일창한약방

주인인 일창 할아버지에게 써서 보낸 초서체로 휘호로 비록 항일 운동 일선에서 활동하지

않았지만 물심양면 뒤에서 도왔을 이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영화 '봉오동 전투' 보면

군자금을 전달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는지 보여준다.) 그들이 모두

배를 띄워 올려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것이다. 


이타적이고 비본능적일 인간은 짐승과 구별된다. 인간만이 누릴 있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죽음의 길을 선택한 그들은 어쩌면 순간 가장 행복했을 것이다. 육사가 광야(曠野)에서 놓아

불렀던것처럼 우리 역시도 그런 날을 고대하며 살아가야 할것이다. 육사가 광야의 '' '넓을

' 아니고 ' '이다. 만주 벌판 같이 넓은 곳이 아니라 크기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빼앗긴

들판인 광야는 우리의 선배들이 바라 보던 바로 그곳이고, 우리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던 바로 그것이다. 


'2부인은 어떠냐고', 자신은 어떠한 형태로든 당신 곁에 있고 싶다고 말하는 여인과 이름을

어찌부르던  첩이라는 천박한 이름을 미화시킨것에 불과하며 그녀를 법률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첩이 불과한 2부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육사. 이들은 분명 사랑을 하고 있다.

그들이 주고 받는 대화에 그것이 담겨있고, 그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행동 하나하나에 그것이

들어있다. 그들은 처절한 가슴앓이를 하며 서로를 향하고 사랑을 표현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럼에도 인스턴트 사랑에 휘감긴 오늘 우리에게 사랑은 부럽다.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것임을 여인은 안다. 그래서 여인은 그의 삶과 그의 의지를 이렇게 쓴다.

'그가 꿈꾸는 세상, 내가 범접할 없는 세계, 그곳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것이며 결코 헛되다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진 그런 사람이었다.' 문학평론가 방민호는

육사를 시대에 피어난 떨기 매화였고 매화의 참된 가치는 정녕 봄이 아직 오지 않은

겨울이여서야 빛나는 법이고 그는 어두운 밤의 시대를 밝힌 아리따운 별빛이라고 말한다. 낮을

사는 사람들은 별빛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짙은 어둠이 지나야 밝은 아침이 오듯

우리는 짙은 어둠의 터널을 지나 해방을 맞이하지만 육사는 그곳에 없다. 그의 작품 '광야'에서

놓아 부른 '백마 왕자' 이미 우리에게 있지만 퇴계의 후손으로 태어나 한학을 배우며

붓을 들었던 남자, 도쿄로 유학하고 베이징으로 유학하며 펜을 들었던 남자, 의혈단이 난징에

세운 군관학교에서 총을 들었던 남자, 끝내 총을 기회는 얻지 못했으나 총탄보다 단단한

모국어로 강철 무지개 같은 시를 남겨 놓고 떠난 남자.


그는 분명 오늘 우리의 속에 살아서 마르지 않는 강물과 같은 의기로 ' ' 위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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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수업
성호승 지음 / 경향BP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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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감정을 가진다. 서로간애 느껴지는 폭이 다르고 경험의 차이가 있을 모두는

감정을 가진다. 때론 그것에 휩쓸려 정신줄을 놓기도 하고, 때론 너무도 무감각한 그것으로

인해 오해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우린 감정들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담백하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너무 과하지도 너무 모자라지도 않은 '적당한' 그것이 좋다.

과하면 넘침이 부담스럽고 모자라면 부족함이 아쉽지만 담백함은 이미 자체로 충분하기에

부담이 없다. 우리에게 부정적 의미가 너무 강한 '적당히' 바로 그런 상태이다.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알맞은 상태인 좋은 말을 '적당주의나 대충대충'등의 부정적 의미로 사용해 버려

조금은 퇴색됐지만 '적당히' 좋다. 자사의 저작이며 사서 하나인 중용(中庸)이 바로

것이다. 여기서 ''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이고, '' 평상(平常) 뜻한다. 인간은 본성에

의해 움직여지기에 본성을 연마하여 항상 치우침 없이 도리에 맞게 떳떳하고 변함이 없는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것이 '적당'이다. 그런데 이게 어렵다. 그래서 나는 아직 '적당히' 안된다. 


사는건 비슷한 모양이다. 각기 다른 삶의 공간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삶은 공간 속에서 겨우겨우

버텨내며 견디고 살아내는 중이다. 저자도 그렇고 저자의 책을 읽는 이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사랑때문에 아파하며, 만나고 헤어짐의 순간에 고통스러워하고, 삶이 주는 무게에 눌려 허덕이기도

하며, 사랑을 만나 최고로 행복하기도 하며 대부분 그렇게 살아간다. 특별할것도 그렇다고 모자랄것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것이 삶이고 인생이다. 인생에 때론 위로가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한데 저자는 이를 '감정 수업'이라고 표현한다. 


속엔 다양한 사건들과 사연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생각이 젊다. 읽는 내내 20대의 아련한 추억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시간도 흐르고 세월도 많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랑은 가슴저며오고

아리다. 사랑 때문에 울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최고의 행복을

느끼기도 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정말 소중한 존재이고 나의 감정이 중요하기에 항상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책을 통해 알았다는 어느 독자처럼 우리는 이렇게 글을 통해 한자락 성장한다. 내가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인지 세상 모두가 돌아서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문구가 마음에 들어 온다. 세상이

모두 돌아 선다고 해도 만은 나를 믿어주고 나를 신뢰하고 나를 끌어 안을 있었으면 좋겠다.

삶의 기준이 오롯이 나로 시작되고 나로 끝나는 삶을 살아야갰다.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정작

중요한 '' 잃어 버리는 어리석음이 아닌 세상이 존재하는건 '내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당당함으로

세상 속에 뛰어 있는 단단한 마음이 필요하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도전하지 않는 자에게는 결코 한뼘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무대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기다림없이 사람 마음을 얻을 없고, 배려와 이해 없이 사람의 마음을 가지려는

것은 욕심이다. 사랑 역시 나를 던지는 노력과 나를 내어 있는 의지가 필요하다. 시간을 만드는

사랑은 없다. 사랑은 뭐든지 있게 만든다. 


저자가 말하는 '부디' 대목이다. '어떠한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도망가지 않으며 나라는 끈을 끝까지

부여잡고 이겨낼것'.

부디 그런 삶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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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여자들
설재인 지음 / 카멜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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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날이 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몸은 축축 늘어지고, 의식은 몽롱하고, 눈에 힘은

점점 풀리고, 그런데 잠은 오지 않는. 저자의 글이 그렇다. 강렬한 임팩트는 없지만 잔잔함이

멈추지 않고 흐르며 잔파문을 일으키는데 넘실거림이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청소년의 시선에서, 성인의 시선에서 그리고 방관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그녀의 주변은 그냥 우리 주변에서 흔히 있는 그런 모습들이다. 몇가지를 제외하면(대부분

몇가지는 드러내지 않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엄마의 유언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시대를

거슬러 오르기도하고 뛰어 넘기도 하고 새로운 상상력을 동원하기도 하며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타 소설들이 그렇듯 하나씩 밝혀지는 사연들은 또다른 이야기가 되고 자극이 되어 기대감을

승시킨다. 


사랑은 그런것 같다. 자신의 마지막을 맡길 있는 마음, 서로의 모습이 어떠해도 한결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있는 그런게 사랑인것 같다. 자신의 유골을 혜순 아줌마에게 전해달라고 엄마의

유언에는 사랑이 담겨있다. 마지막이 아닌 영원을 향한 간절함을 담은 사랑 사랑을 담은 유골함이

전달 되자 다른 사랑은 숨이 막히고 가슴이 아려 온다. 이런게 사랑이다. 


하나의 사랑이 있다. 자신의 어깨를 툭툭치며 던진 '죄송합니다' 반하고, 지리를 몰라 해맬것

같아 던진 '관찮으시겠어요' 반하고, 2차에도 '' 말하는데 반해 사람은 결국 결혼까지 골인한다.

그런데 남자는 어이없게도 미로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말하기를 마치고 숨이 멎어버린다. 흔한

 '사랑해' 마디 없이. 그래서 절절하다. 


삶은 혼자다. 누군가가 곁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도 결국 혼자다. 저자도 그랬다. 결국 혼자였고

여전히 혼자고 앞으로도 혼자이다. 다만 혼자있는 나를 어떻게 끌고 가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을

우리는 책에 등장하는 여자들처럼 여전히 혼자다. 그녀가 직장에서 혼자였듯, 집에서 혼자였듯,

공연장 열광 속에서 혼자였듯, 그리고 학교의 현장 속에서 혼자였듯 철저히 혼자다. 우리는 그렇게

혼자 살아가며 결국 살아내는 것이다. 저자가 "어쨌든, 살아남아 서른이 된것' 처럼 우리도 살아남아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지하철 내선순환과 외선순환의 차이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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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과 친구 되기 - 좋은 삶을 위한 내밀한 사귐
클레멘스 제드마크 지음, 전진만 옮김 / 책세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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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사형 당하는 알프레드 델프 신부와 반역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회퍼, 사람에겐 죽음의 문턱이라는 공간적 유사점과 순간 타인을 위해

복을 빌어 주었다는 행위적 공통점이 존재한다. 환경의 동물인 사람이 자신이 처한 극한의 상황

앞에서 자신이 아니 타인의 복을 있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음이며

자체로 이미 충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 자신과 함께 여행 하는 '이라는 부제를

달아도 무방할 책은 낯섬에 마주하는 설레임과 동시에 지혜의 깊은 우물에서 건져낸 통찰을

우리에게 준다. 


공정함 혹은 공평함 이라는 개념은 '왜곡되지 않은, 분명함, 방해 받지 않는, 정당한' 등으로 대체

있는데 공정함이 견고하게 작용되기 위해서는 양자에게 동등한 대우가 전제되어야하나 현실은

온통 불공정과 불공평 뿐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신약성경에 나오는 '포도원 농부의 품삯'이야기를

예로 들어 공평함에 대해 설명한다. 포도원 주인은 각각의 일꾼들에게 하루치의 임금을 주기로

약속하고 각기 다른 시간에 일꾼을 불러 일을 시키고 일을 마친 약속한 임금을 지급한다. 이에

처음부터 와서 일하던 일꾼이 자신이 노동시간이 가장 길었음을 이유로 반발을 하자 이렇게 말한다.

'너와 약속한 품삯을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 포도원 주인은 각각의 일꾼들에게 하루치의 품삯을

주기로 약속을 하고 데려와 일을 시켰다. 그리고 하루치의 품삯을 지급했다. 이것이 '공평함' 이다.

모두가 동일하고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닌 정해진 , 약속되어진 , 서로 지켜야 하는 것을

지키는 것이 공정함이고 공평함이다. 저자는 이를 신비(인간이 없는 이상의 )라고 표현한다. 


'삶을 살다'

문장 앞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삶을 살다. 누구나 살아간다.그럼에도 삶을 산다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힘겨운 여행이다. 더구나 삶을 산다는 것은 이미 제목만으로도 무게감이 느껴진다.

삶은 수없이 많은 시간의 점들이 모여 생명을 점유해 가는 일련의 과정이고 우리는 기회 또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하는 카이로스(kairos) 시간을 살아간다. 


삶이란 본래 계획한 대로 맞아 떨어지지 않고 흘러간다. 비록 실현 가능한 인생계획(Lebensplan)

세우지만 인생은 계획에 못미치고 빗나가고 벗어나기 일쑤다. 영화 기생충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되거든, 인생이. 애초부터 아무 계획도 없으니까 어떤일이

벌어져도 상관없는 것이야' 처럼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인생계획은 현실이다. 현실은

안에서 살아내는 것이고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기에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을 산다. 그러면서 타인의 삶에 무엇인가를 각인시키고 동시에 타인은 우리의

삶에 무언가 새겨 넣는다. 누구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없고 혼자 살수도 없다. 외부에서 볼때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도 인간의 삶이 타인의 삶에 각인 시키는 역동성은 모든 인생에 작용한다.

 

자신을 위한 사용설명서를 작성하고 그대로 살아내는 것도 괜찮은 삶일것 같다.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며 자신을 많이 알아가고 자신을 깊게 생각하고 결국 자신과 사귀게 되는 바로 지점에서

우리는 또다른 나와 만나게 된다. '내면의 '으로 풍부한 공간에서 다른 나와 떠나게 되는

'행복여행'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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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팔이 의사
포프 브록 지음, 조은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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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가짜가 판을 치고 존재하는 것은 어딘가에 진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어난지

3주된 염소의 부랄 두쪽을 사람의 고환에 집어 넣어 왕성한 성욕을 찾게 한다는 말도 안되는

야기로 시작한 책은 뛰어난 창의력과 섬뜩이는 통찰력으로 끝을 모르게 치닫는다.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만 42, 밝혀지지 않은 숫자는 가늠하기도 어려운 희대의 살인 사건이고 사기 행각이지만

책을 읽는 내내 드는 생각은 '대단하다'이다. 집요하게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며 다가오는 그를

감당하기에 사람들은 너무 약하다. 실험실의 쥐를 다루듯 자신에게 포획된 제물(?)들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하는 그의 엽기적인 행각은 이쯤되면 광기라기 보다는 예술에 가깝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욕망은 동일하다. 정력이 강해져서 활발하고 힘찬 성생활을 평생하길 소망하는

남자들이나, 젊고 예뻐보이기 위해 무슨짓이든 하는 여자들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별반 다르지 않고

모두가 그의 친절한 먹잇감이고 포획거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건강 문제에

더욱 집착하며 그중에서도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계층이 가장 취약했다. 작은 물건 하나를 사면서도

신중한 그들이지만 유독 '건강'이라는 문제 앞에서는 분별력을 잃고 파국으로 달려간다.


그의 야망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처음 사기의료행위를 시작한 이후 라디오 방송국 송전탑을 세우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의학적 조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사람들의 맹목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주지사에

출마하기도 하는데 놀랍게도 그를 지지한 이들 중에는 개신교 목사도 있었다니 그가 얼마나 치밀하고

명석한 사기꾼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있다. 


그는 지속적으로 '' 초점을 맞췄고 군중과 개인의 심리를 지배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특별한 재능을 지녔으며 남자와 페니스의 관계가 남녀관계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하다는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주당 평균 14000달러( 시세로 치면 연간 대략 640만불 이상)라는 당시 의사들의 수입의

몇십배가 넘는 막대한 부를 거둬 들인다. 


책을 세밀하게 읽다보면 브링클리에게 화가 나기 보다 무지하고 욕심으로 가득찬 허영 덩어리 인간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무지한 백성이 나라를 망친다' 처럼 그들의 허영과 욕심과 무지가 브링클리를

만들어 냈고 강력한 그를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곁에도 수없이 많은 브링클리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정치가로 권력자로 의사로 선생으로 종교인으로 혹은 선량한 시민으로 위장하고

호시탐탐 먹잇감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100여년전의 허술함이 아닌 정교하고 조직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무지와 욕심의 허점을 파고 든다. 


책을 읽으며 몇번이고 길을 잃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많아서인지 그만큼 정확한 진술을 하기

위해서인지 많은 등장 인물들과 사건들로 혼란스러웠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기적에 대한 갈망' 인간을 잠재적 욕망 덩어리로 만들었고 여전히 우린 그것들에

어텐션(attention)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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