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나답게 살 것인가 - 내 삶의 의미를 찾는 네 가지 질문
에밀리 에스파하니 스미스 지음, 김경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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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십억명의 사람들이 여전히 종교에서 의미를 찾고 있지만 종교는 이상 예전의

권위도 신뢰도 가지지 못한다. 종교가 한때 의미를 찾는 유일한 길이었지만 지금은

수없이 많은 하나에 불과하다. 이렇듯 의미규명이 불투명해진 세상 속에서

' 답게 사는것' 어렵다. 먼저 출발부터 어렵다. ' 답다는 ' 무엇인가에서

벌써 말문이 막힌다. 대답할 명분도, 주제도, 내용도 우리는 가지지 못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저자는 ' 삶의 의미는 오직 나만이 결정할 있다' 선언한다.

인생이 무게를 알기에, 삶의 버거움을 겪고 있기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수긍은 된다. 거창한 이유는 없지만, 대단한 목표나 가치관도 가지지 못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묵묵히 해나가며 가족과 사람들을 돌보며 조금 나은

미래를 향해 작지만 한걸음 내딛는것 자체가 이미 '존재의 의미'이며 '살아갈 의미'이다. 


저자의 '너를 뛰어 넘는 기쁨을 누려 봤는가?'라는 챕터가 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한계를 구분지어 놓고 산다. 어쩌면 평생 번도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채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저자는 한계를 뛰어넘는 기쁨을 말한다. '천장'이라고

표현하는 한계, 혹은 벽을 뛰어 넘을 비로소 별을 있게 되고 밖을 있게 된다.

스스로를 제한하려 하지 말고 도전해야 한다. 한계 너머에 존재하는 희망은 어쩌면 지금

보다 훨씬 나은 미래일 것이다. 그러면서 허상에서 벗어나는 것과 관점의 변화를 이야기 한다.

우리는 종종 한계를 뛰어 넘어 보겠다는 무모함을 가지게 되고 무모함은 스스로 허상을

만들게 되고 허상을 향해 어이없이 빈주먹을 날리게 되는 오류를 범한다. 허상은 아무리

깨고 넘으려 해도 여전히 존재한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허상을

버려야 한다. 허상은 욕망의 분신이다. 욕망은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끌며 ' 다운 ' 아닌

만들어진 나에 몰입하게 만든다. 이렇게 허상에서 벗어나면 관점의 변화가 생기고 바라보는

것이 달라진다. 시각도 넓어지고 편향적이고 굴곡된 시선이 바르게 펴진다. 이때부터 사물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 그래서 제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에서는 이것을 '초월적 경험'이라고 표현하지만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왜곡과 편협함에서 벗어나 관대한 시선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책은 쉽지 않다. 지식적 방대함과 깊이가 책장을 넘기기 부담스럽게 무겁다. 그러나 다양성과

풍부함에 금방 매료된다. 저자의 말처럼 삶을 산산조각내는 상처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충만한 삶을 살도록 성장시킨다. 그래서 역경과 어려움을 즐길 아는

지혜로움과 용기가 필요하다. 일단 부딪혀 보고 견뎌보고 애쓰고 힘써 보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실패할지라도 그만큼 성장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의미의 '이라고 말하는 마지막 구절이 가슴에 닿는다. 

"인간다운 삶은 자기가 아닌 다른 , 다른 사람을 향한다. 채워야 의미이자 언젠가 만나게

다른 사람. 자신을 잊을수록,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명분을 얻음으로써

사람다운 삶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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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마미아 푼돈 목돈 재테크 실천법
맘마미아 지음 / 진서원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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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재테크에 대한 책은 넘쳐나고 그중 대부분은 자기 잘난척 수준에 그치는

진짜 좋은 케이스들이 주류를 이룬다. 일반적으로 실천 가능한 것들 보다는

어쩌다 운이 좋거나 하필 그때 그게 통해서 이룰 있는 것들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삶에서 실행 있는 방법들을 찾던 차에 책을 만나게 됐고 '푼돈'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매력을 느끼게 되어 명절을 보내며 단숨에 읽어 내려 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책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올릴것 같은 글귀가 있다.

' 이거 아는건데.' 문제는 그냥 아는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알면 실천해야 하는데 아는게

끝이다. '그림의 '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그것을 입에 넣어서 먹어야 맛을 있고

행복할 있는데 쳐다만 보며 침만 질질 흘리고 있는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다. 


비슷한 종류의 책을 읽어 봤으나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책은 '디테일'하다.

세부적이고 자세하고 적극적이다. 예를 들자면 블로그 운영으로 부수입을 챙길 있는 '애드

포스트' 잔돈을 안쓰게 되는 점에서 착안한 '잔돈 만들기' 같은 방법이나 자신 만이 아는

비밀 장부를 만들어 비자금을 만드는 방법은 참신하고 친절하다. 그냥 정보만 제공하는것이

아니라 방법과 노하우까지 전수 한다. 물론 이런것들을 통해 수익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잊지말자. 지금 우리는 '푼돈'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특별히 눈에 들어 오는 것은 '복리통장'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한 부분이다. 은행원들에게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을 수식을 통해 알기 쉽게 정리해 놓아 보는것 만으로도

이해가 가능해졌고 더불어 통장 선택의 방법들까지 알려주는 섬세함이 돗보였다. 그리고

주식을 접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으나 실행하기 어려운 '주식 풍차돌리기'(순환식

적립투자) 소개하는 챕터의 문구가 마음에 든다. '실패의 교훈을....' 그렇다. 저자도

실패했다. 본인이 실패해보니 어떻게 하면 성공할 있는지 알게된 것이다. 경험을 통한

지식의 전달은 그만큼 설득력과 신뢰감을 가진다. 물론 방대한 양의 '주식 풍차돌리기'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책을 읽는다면 어느정도 기본 흐름과 매도와 매수 시점과

방법까지 있으리 만치 쉽게 설명한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한다. '매도와 매수 때를 제외하고는 HTS(home trading system)

켜지 말고 하루종일 차트를 들여다 보며 전전긍긍하지 말고 시간에 업무에  충실해서

고과를 높여 연봉을 올려라'. 절대 공감한다. 전적으로 매달릴거면 차라리 사표를 쓰고

그쪽으로 가는게 맞다. 어설프게 이도저도 아닌 모습은 둘다 놓치기 십상이다. 본업이 아니고

부업이라면, 푼돈을 이용한 부수입이 목적이라면 업무에 집중하는 편이 현명하다. 


책의 마지막장을 넘기며 10년만 빨리 이런 정보들을 자세히 알았으면 조금 현명한 재테크를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과 지금이라도 실천 가능한 것들이 있음이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가진다. 만약 그대가 사회 초년생이라면 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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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1시간 쓱 보면 툭 나오는 영어 공부법
성재원 지음 / 베프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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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잘한다와 못한다의 차이는 무엇일까? 같이 영어를 배우고 공부했는데

확연한 실력차이를 느끼게 되고 언제부턴가 강박으로 자리한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는 것은 정말 가능한 일인가? 영어를 조금이라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졌을 질문들에 책은 친절하게 답변해 준다. 


먼저 지금껏 우리가 해왔던 영어 공부 실패의 원인은 꾸준함, 단어 개수, 말하기

세가지로 정리된다. 항상 의욕은 앞서나 그냥 의욕일뿐 꾸준함이 없다.

작심삼일이다. 시작은 뭔가 대단한것처럼 출발을 하나 삼일이나 길어야 일주일 정도

지나면 흐지부지해지고 만다. 동일한 행동을 15 정도 반복하다보면 습관이 된다고

하는데 습관이 되기도 전에 포기하다 보니 포기하는것이 습관이 되버렸다. 그러면서

'나는 언어에 약한가봐'라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만든다. 언어에 약한것이 아니라

의지가 약한 것이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 우스개 소리로 그럼 3 마다

작심하면 되겠네 라고 했는데 그말이 정답이다. 반복하고 계속하고 꾸준히 하는 사람을

이길수는 없다. 


두번째로 '단어'이다. 결국 내가 얼마나 많은 단어를 알고 사용하는가가 성패를 좌우한다.

저자도 이야기하듯 1000 이내의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85.5%, 2000 단어 이내가

93.4%인데 이는 중학교 영어 교과서 수준이다. 아는 단어가 적다보니 문장 연결이 안되고

의사전달도 안되고(물론 만국 공통어가 있긴 하다) 그러니 흥미가 줄어들 밖에 없다.

그런데 단어라는 녀석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먹여 주거나 강제로 주입시켜준다고

기억 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본인의 노력이 요구된다.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수능

만점자들의 인터뷰를 책으로 엮은 '그들은 당신처럼 공부하지 않았다' 보면 매일 1시간씩

공부하게 되면 1년이면 365시간, 3년이면 1000 시간 이상의 갭이 생기는데 차이는

어느것으로도 극복할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을 단어에 접목 시키면 하루에

5단어씩만 이해하고 암기한다면 1년이면 1800 단어의 갭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산술적인 정의가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노력과 시간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말하기'이다. 솔직히 평생을 영어를 배워왔고 어느정도 왔던 나도 외국인 앞에

서면 말문이 막힌다. 신기하게도 영어를 잘하는 한국 사람과의 대화는 편하고 쉬운데 그들

앞에만 서면 여지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한다. 이유는 한가지다. 안해봐서 머리 속에만

들어 있는 것이다. 신구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니들이 게맛을 알어' 처럼 맛보고 느끼고

해보지 않았기에 낯설고 두려운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어도 그것을 먹지

않으면 그냥 '그림의 '이다. 부딪쳐봐야 하고 많이 말해봐야 실력이 는다. 영어 솔직히

어렵고 지루하고 재미없다. 그런데 이렇게 놓고 있다보면 영어는 그냥 딴나라 말이고

'굳이 내가 나라에 가서 살것도 아닌데...'라는 자위를 하게 되고 어느새 저만큼 뒤쳐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저자처럼 '스터디'라는 방법을 쓰든, 산책을

하면서 내지는 운동을 하면서 하던 어떤 방법이든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시도해

보아야 한다. 


긍정적인 감정일때 학습의 능률과 효율이 오른다는 연구 결과 처럼 즐기면서 해야 한다.

무조건 열심히 하려고만 하지 말고 어떻게든 재미있고 즐기면서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어차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우리에게 영어는 분명 끝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이다. 페이스

조절을 해서 완주하는것이 중요하지 무리한 스퍼트를 내서 잠깐 반짝하다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끈기를 가지고 하나씩 하나씩 나가다 보면 어느새

만치 앞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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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기대선 여자 빙허각
곽미경 지음 / 자연경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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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와 칠거지악과 남존여비로 대표되는 조선의 어느시기(정조무렵) 대립과

갈등이 아닌 사랑과 지켜야만 하는 의리를 가지고 자주적 삶을 개척하려는 여인의

삶을 저자의 재치있고 맛깔스런 글로 표현한다. 건륭제와의 '허공에 기대서는' 대한

논쟁에서도 세손과의 짜릿함 만남에서도 예의 저자의 필력과 깊이는 발휘된다. 자신의

삶과 생각을 글에 녹여 내는 것이 글쓰는 이의 본분이라면 시대의 아픔과 충돌을 녹여내는

면에서나 관행과 관습과의 무한 대립을 그려내는 부분에서도 본분을 다한다. 


빙허각(憑虛閣). '허공에 기대어 산다'라는 뜻대로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를 개척해 나간 그녀의 삶은 비록 문헌이나 기록에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기에 작가적 상상력이 어느정도 가미되었을법하나 그 역시도 조선시대의 여인임에는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드러나기도 한다, 페미니즘인듯 하지만 오히려 주체적 실존주의에

가까운 내용들은 남녀간의 사랑보다는 가슴절절한 '의리'라고 표현하는게 옳을 것만 같은

그의 삶은 지고지순을 최고의 덕목으로 알고 살았던 조선시대 여인들에게 혁명적으로

다가갔을법도 한데 실상 우리는 그녀에 대해 별반 아는게 없다. 이는 역사의 기술이 철저히

남성중심으로만 되었던 시대의 탓인지, 혹은 그의 주체적 삶과 기술들을 별반 하잘것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린 당시 주도세력들의 치졸한 편견인지 여튼 그에 대한 기록은 과히

많지 않다.


그럼에도 빙허각 이씨와 남편(서유분)과의 사랑은 절절하다. 직접 옷을 지어 입히기도 하고

꽃술을 담궈서 시를 나누며 마시기도 하고 아이들의 연이은 죽음 앞에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몇차례나 죽음을 선택하는 그녀를 어김없이 살려내는 모습들은 가슴 절절하다. 특히나

남편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이하는 둘의 사랑은 가슴시리도록

치열하다. 그렇게 별을 좋아했던 유분은 먼저 별이 되었고, 별빛이 쏟아지는 듯한 눈을 가진

소녀 선정도 별이 되어 밤하늘에서 반짝인다. 그것도 유분의 별 옆에서. 


그렇게 살다간 그녀의 삶이 부럽고 아쉽다. 그렇게 당당하게 살 수 있음이 한 없이 부럽고,

그럼에도 여전히 뛰어 넘지 못한 벽이 못내 아쉽다. 허공에 기대선 것처럼 어느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주체적 삶을 살아간 그녀의 모습이 궁금하다. 아름답고 멋지고 매력적인

빙허각이라는 인물의 삶이 오롯이 담겨있는 이 책은 오랜만에 읽은 가슴 뜨거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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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고 있어 - 거리 위 아이들을 향한 양떼 목사의 마음
이요셉 지음 / 두란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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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타협은 거창하고 대단하게 오지 않는다. p182

녀석이 말하는 싸움법은 때리는 것이 아니라 맞는 것이었고,

피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p186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시작된다"

제도교회가 너무너무 싫어서 스스로 가나안교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현실 앞에 저자가 던지는 고백은 화살이 된다. 그렇다. 지금 교회는 세상의 집중포화에

너덜너덜해지고 고유의 고귀함마저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세상을 걱정하던 교회가

어느새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어 버린 암담한 현실 앞에 고개가 숙여진다. 

사역자의 이름으로 도저히 없는 , 사역자들이 거닐 없는 시간,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만나기 힘든 아이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어디인가. 그럼 아골골짝 들은

어디인가? 이것, 저것, 그것 빼고 남는 그곳에서 찾는게 우리가 목놓아 부르는

골골짝인가? 이런 허울 뿐인 편견을 버린 저자가 부럽다. 십여년 이상을 청년사역을

나로서도 견디기 힘들었던 시선과 말들을 꿋꿋이 견뎌내며 길을 걷고 있는 저자의

열정이 부럽다. 그런 저자의 주제는 이렇다. 


'복음을 듣기만 하는 세대' 

너무 많이 들었다. 특히나 부모가 교회를 다닌다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그들이 만난

예수를. 그러다 보니 정작 자신의 예수는 없다. 모두가 남의 예수만 가득하다보니 삶의 변화가

없다. 아니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뿐 아니라 삶과 행동이 다른 그들을 너무나도 알기에

아이들의 마음엔 이미 '그런 예수라면 믿어요' 가득하니 백번 천번 들어도 변화는 없다.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다. 그리고 변화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게 우선인데 자꾸 다른 사람을 보며 정죄한다. 그러다 보니 복음을 듣기만

한다. 우리도 이런데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 먼저 믿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한다. 바르게

믿어야 하고 믿어야 한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예수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 문자로 예수가 아니라 삶에서 드러나는 예수를 만나야 하며 예수를

믿어야 바르게 말할 있다.

 


우리 전도사님이 좋아하니까 찬양을 듣고 우리형이 싫어하니까 앞에서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아이들의 배려는 도무지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현실을 맞닥뜨리는 나에겐 충격이다.

배려없는 목회자, 교인, 교회가 결국 높은 철옹성을 쌓고 자기들만의 천국을 만들어가다 보니

세상속에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할 교회가 점점 세상과 멀어지는 것이다. 배려는 내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인데, 우리 주님도 그렇게 사셨는데 뒤를 따르겠다고 제자임을

자처하는 우리의 현실은 암담하기만 하다. '그리스도인의 타자성'이라는 기독교 윤리학의 가장

중요한 항목을 글로만 배웠지 도무지 마음과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지독한 자기애에 빠진

우리들의 현실 또한 안타깝다. 물론 나도 여기에 포함된다. 


한걸음에 읽고 마지막 장을 넘기며 마음이 무거워진다. 자신의 반기독교적 이성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리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 그것을 쫒기만 했던 자신이 떠올라 고개를 떨군다.

주님은 결코 자신이 가시지 않은 길을 따르라고 하시지 않는다. 이미 걸어가신 길을, 이미

이겨 놓으신 승리의 길을 따라오라고 걸으라고 말씀하신다. 사실을 믿지 못한채 여전히

세상의 것을 기웃거리는 나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라고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이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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