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임하십니다. P137
사람은 누구나 완벽을 추구한다. 입으로는 '너무 딱딱하고 인간미가 없다'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어느정도 '완벽중독'에 빠져있다. 그런 우리에게 '불완전한 삶'을 이야기하며 '있는 모습 그대로'를
전하는 전하는 저자의 글은 반갑다. 곽선희, 김지철 목사님의 뒤를 이은 소망교회 3대 목사라는
점보다 그가 예배설교학자라는 점에서 그가 말하는 '불완전함'의 의미가 기대된다.

누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께 실망할때가 있다. 이때 중요한것은 우리의 반응이다. 성경에 나오는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마리아와 마르다의 모습처럼 우리의 모습도 분명 갈릴것이다.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동일하게 실망하고 아쉽지만 그래도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마르다와 여전히 그 절망의 자리에서 낙담하며 머무르는 마리아. 이 둘의 모습에서 세상과 주
님과의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방황하는 우리의 현실을 본다. 누구나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그 어려움은
각자에게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특별히 가족의 죽음은 상실감과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데
이때 우리의 시선이 중요하다. 쉽지는 않겠지만 무엇을 보며 무엇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혼자뿐만 아니라
개인의 미래 역시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마르다는 절망의 그 순간 주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다시금
희망을 떠올린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하다. 바라보는 만큼 꿈꿀 수 있고 꿈꾸는 만큼 이룰수
있다. 무엇을 바라보며 무엇에 집중하느냐는 그 사람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한다.

저자는 우리의 무분별하고 무지한 '성령받기'에 대해 경고하며 '성령 임재의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성령은 선물이다. 그런데 이 선물을 자신이 받고 싶은 것으로 받아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러다 보니
성령의 다양성에 대해 인정하려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만으로 제한하려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각기 다른 모양으로, 다른 육체로, 다른 속성으로 만드셨기에 어떤이는 극적이고 열광적인 체험을 통해
성령을 허락하시기도 하지만 또 어떤이에게는 조용하고 잔잔하게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을 경험하게
하신다. 어느것이 정답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자신의 기질과 성향에 따라 성령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성경은 성령 임재의 다양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마가복음에서의 성령 임재는 예수님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한 음성을 듣는 것으로 시작하고(막1:9-10), 사도행전에서는 성령 받은 사람들이
방언하며 소리치며 밖으로 나가는 모습으로 나타낸다.(행 2-3장) 한 곳에서는 '증언'으로 한 곳에서는
'들음'으로 성령 임재가 나타난다. 들음으로 주님을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이 있다. 바울이 그러했고,
성 어거스틴이 그러했고, 마틴 루터가 그러했다. 그들에게 성령의 임재는 들음에서 시작했다.
우리는 종종 광야에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다. 광야에서 우리는 배고프고, 지치고, 힘이 다 빠져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의지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주를 바라 볼 때, 바로 그때 함께하시며 일하시는
성령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곳에 성령이 계신다. 하나님의 성령은 강력한 능력이나, 강력한 소리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마가의 다닥방에서만, 예배 현장에서만, 뜨거운 찬양 가운데만 임재하는 성령이
아니라 힘들게 살아가는 삶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그 자리에, 사탄이 우리를
넘어 뜨리려고 하는 그곳에도 성령이 함께 계시고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의 영의 눈을 열어 일하시는
그리고 함께하시는 그 분을 보아야 할 것이다.
세상 어느 누구도 완전 할 수는 없다. 당대 의인이었던 노아(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6:9) 역시 그랬다. 세상을 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모든 인류가 죽어도
살아 남아야 할 사람으로 하나님이 의해 선택 된 노아. 그는 당대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 만큼 경건한
의인이었고 하나님의 기대에 걸 맞게 사람들이 조롱하는데도 불구하고 산에서 방주를 그것도 무려
120여년 동안 만들었을 만큼 신실한 인물이었다. 그런 노아가 홍수 이후 성경에 드러나는 모습은
'노아는 농사를 시작했고 어느날 포도주를 잔뜩 마시고는 하체를 드러낸채 잠이 들었다'는 이야기 뿐이다.
성경은 노아와 같은 위대한 인물, 의인이며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자 당대의 완전한 자였던 노아에게도
실수가 있었다는 것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인간은 여전히 완전할 수 없는 존재이고 실수하는 존재이다.
완전한 사람도 완전한 공동체도 없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언젠가는' 불완전한 존재가 되고 만다.
실수 하는 인간, 허물 많은 인간, 죄 속에 빠져 있는 인간,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문제는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내탓이요'하면서 상대방을 가르키는 오만함이 아니라 눈물로 마음으로 무릎으로
받아들이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모두 완전한 사람들이라면 예수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된다. 우리의 추하고 부족한 모습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덮는 구원의 역사를 감당하셨다. 그 분은 우리의 수치를 덮어 주시며 여전히 우리에게로 향하신다.
이 책은 '완벽'이라는 허상을 쫓느라 심신이 모두 지쳐있는 우리 청년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도 없고 완벽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을 향했던 시선이
주님에게로 집중되는 삶을 살아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