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개 숙여 내 그림자를 내려다 보았다.'
이 책에서 가장 오랜 여운을 남기는 문장이다. 아주 오래전 타는 듯한 목마름과 갈증으로 나라라는
권력과 맞서던 그 때, 지쳐있던 내가 내려다 본 그 그림자는 잔뜩 어깨를 떨구고 축 늘어진 팔에
서 있기 조차 힘든 허수아비와 같았다. 아니 허수아비는 잘 서 있기라도 하니 그보다도 못해 보이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그림자를 잘 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림자를 보게 되는
그 순간 대부분은 지쳐 고개를 떨구고 있다. 가장 힘든 그 순간, 유일하게 자신과 함께하는 존재,
그것이 그림자다.
나는 비를 좋아한다. 비가 쏟아지면 차에 올라타 바흐의 첼로 모음곡이 들어 있는 CD를 크게 틀고
무작정 달린다. 때론 새터로, 때론 강화로, 때론 강변북로를, 그렇게 달리다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마치 엄마의 자궁에 들어 있는 아이의 평안함을 느낀다. 본네트와 차의 지붕위를 때리는 빗소리에
어우러지는 첼로의 중후함은 한껏 사치를 부릴만한 충분한 이유를 제공한다. 거기에 케냐AA나
에디오피아 시다모가 있으면 그곳이 천국이다. 저자도 비를 좋아한다. 비오는 날이면 '술 한잔'이
생각나고, 비오는 날이면 '누군가'가 생각나고, 비오는 날이면 그냥 좋다. 고등학교 시절 그냥 비가
좋아서 학교가 있던 신사동에서 대림동 집까지 몇시간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난 며칠을
죽을 고생을 했다.
'울음'
남자는 태어나서 세번 울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누군지 꼭 보고 싶다. 개뿔. 그럼 난 이미 아주
오래전에 남자가 아니다. 울고 싶으면 울면 된다. 창피하고 쪽팔릴것 같으면 숨어서 울면 되고 그도
안되면 마음으로 울면 된다. 울 수 있을 때 울 수 있는 것도 용기다. 우리에게 그런 용기가 없을 뿐이지
울 수 있는 조건과 상황은 이미 충분하다. 가슴이 식어버려 못 울고, 마음이 강팍해져서 못 울고,
남들의 시선 때문에 못 울고, 뭘 그리 울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이 많은지. 저자는 울지 못했던 완벽한
시간을 보냈고, 사랑한다는 것 그리워 한다는 것은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천천히 울었고,
집으로 가는 엄니의 뒷모습을 보며 말할수 없는 마음만 두 눈에 젖어 들었다.
'가끔, 나에게 애쓰지 않는 하루를 선물한다.'
이 책에서 두번째로 마음에 드는 문장이다. 그런 날이 있다. 뭔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 뭘 해도
손에 잡히지 않아 그냥 손 놓아 버리고 싶은 날, 정말 손 하나 까딱하는 것 조차 싫어 그냥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 그리고 이마저도 사치인 그런 날이 우리에겐 존재한다. 너무 나를
위해 애쓰다 하루 정도는 나에게 소홀한, 그냥 방치해 두는 그런 날이 나도 좋다. 그날은 침대에서
마음껏 시간을 보낸다. 뒹굴뒹굴 하다 허리가 너무 아프면 그제야 일어난다. 그리고 방마다 청소를
한다. 그냥 몸으로. 굳이 끼니를 챙겨 먹지도 않는다. 당연히 세수도 안한다. 현관 문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오로지 집안에서만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졸리면 잔다. 우리에겐 가끔 뭔가 목적을 정해
놓지 않은 이런 일탈이 필요하다. 뭘 해야만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음에 살아내는 것이다. 문 밖
세상에서 하루를 선물하는 저자와는 조금 다르지만 나에게 선물하는 이 하루가 나는 좋다.
유별남 작가의 사진은 언제 보아도 느낌이 좋다. 느끼는 감성과 시선이 사람 냄새가 나서 좋다. 빛과
어둠의 조화로 만들어 내는 그의 작품은 늘 나에게 도전을 준다. 이 책에 들어 있는 모든 글의 말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아무튼, 품절된 하루가 또 지나간다.' 그렇다. 우린 매일 매일 품절된 하루를 지나
보낸다. 열정적으로 살았던 나를 위한 선물로 살았던 이도저도 아니게 살았던 우리에게 시간은 멈춤이
없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우리에겐 '아무튼, 완벽한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참 자연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