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검은 꽃’을 읽고 바로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었다. 김영하 작가님의 글을 몰아서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에. 전에 어떤 이웃님이 서평을 써 놓으신 것을 보고 뭔가 ‘살인자’이야기라 무서워서 꺼려진다고 얘기했더니 살인이 이 소설의 주는 아니라고 읽으면 짧고 잘 읽힌다고 하시면서 추천해주셨다. 또 ‘힐링 캠프’에서도 이경규 mc가 영화감독으로서 이 소설이 탐난다는 얘기에 영화로 각색도 괜찮은 이 소설에 대해 궁금증이 점점 커져있었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 때 부담 없이 펼쳐들고 2시간 만에 뒤에 평론과 김영하님의 소설에 대한 후기까지 후루룩 읽을 수 있다.
작가님은 분명히 책을 쓰기 엄청 어려웠을 거다. 내용은 치매에 걸린 살인자가 기억한 내용을 적은 노트를 기본으로 소설이 전개된다. 살인자에다 알츠하이머라니! 일단 그 사람이 되어서 감정을 적어야 하니 분명히 자신이 살인자와 알츠하이머라는 질병 안에 들어가 부유했을 거다. 내가 읽기에는 이 책은 소설이라는 포맷의 한 편의 긴 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와 같은. 한 마디로 얘기해 보면 미친놈의 헛소리를 늘어놓은 게 바로 이 소설이다. 그러나 미친놈에 천하의 나쁜 놈인데 이상하게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다. 그것은 바로 내 안에 어쩌면 미친 부분과 나쁜 부분이 분명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계속 연쇄살인을 했었고 25년이 지난 지금은 한 가족을 죽이고 살려놓은 수양딸 은희 만을 키우고 수의사로 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 박주철이라는 사나이를 만나는데 느낌이 꼭 주인공과 닮은 살인자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친한 안형사는 근처에서 연쇄살인범을 찾고 있지만 그는 주인공을 의심하지 않는다.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뱀의 눈이었다. 차갑고 냉혹했다. 나는 확신한다. 그때 우리 둘은 서로를 알아보았다.(20-21)
가끔 자신이 살인자의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한 생각을 한다.
30년 동안 꾸준히 사람을 죽였다. 그땐 정말 열심히 살았다. 공소시효는 다 지났다. 나가서 떠들어도 된다. 미국 같으면 회고록을 출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욕하겠지. 하려면 하라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생각해보면 나도 독한 놈이다. 그렇게 오래 하던 살인을 딱 끊었다. 어떤 기분이냐면, 글쎄, 배를 팔아버린 뱃놈 혹은 퇴역한 용병 같은 기분이다. 모르긴 해도 6.25나 월남전에서 나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놈들도 있을 것이다. 그놈들이 다 밤잠을 설치고 있을까? 아닐 거다. 죄책감은 본질적으로 약한 감정이다. 공보나 분노, 질투 같은 게 강한 감정이다. 공포와 분노 속에서는 잠이 안 온다. 죄책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나는 웃는다. 인생도 모르는 작자들이 어디서 약을 팔고 있나.(44)
십계명 중 처음 하지 말라는 그 살인을 밥 먹듯 저지른 정말 최악의 사람. 그러나 자신을 정당화한다. 나보다 더 못된 사람이 있다고. 그리고 딸만 살려달라는 그 말을 듣는 자신은 일말의 양심이 있어 은희라는 딸을 키웠다고 생각한다. 박주철은 결국 은희와 결혼하겠다고 하고 이 말에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치매에 걸린 노인네는 자신이 끊임없이 살인을 했던 젊은 시절의 기억 덕분인지 은희라고 생각했던 자신에게 오는 요양보호사를 죽였다. 은희는 원래 은희 엄마를 죽인 그 때 어린 은희를 죽였었다. 한 마디로 정말 의심의 여지없는 극악한 놈이었던 것이다. 공소시효가 다 된, 수없이 많은 시체가 대나무 밭에 밑에 있었다. 다행히 최근에 죽인 요양보호사의 죄로 아마도 그 치매 노인은 벌을 받게 될 거다. 다 늙어서 그에 대한 처벌을 받는 것. 그게 무슨 소용인가? 기자와의 대화가 인상깊다.
한 남자가 찾아와 만났다. 기자라고 했다. 그는 악을 이해하고 싶다고 했다. 그 진부함이 나를 웃겼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악을 왜 이해하려 하시오?”
“알아야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말했다.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악이 아니오. 그냥 기도나 하시오. 악이 당신을 비켜갈 수 있도록.”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덧붙였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144-145)
이 책을 읽다보면 정말 극악과 극광기에 대한 경계가 애매해 진다. 나는 예전에 솔직하고 올바른 것이 최대한 바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종의 윤리에 대한 결벽증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법이 권력을 뒷받침해주는 용도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다. 그냥 정의와 자유에 대한 번드르르한 보기 좋은 말을 섞어서 권력의 이익을 아주 멋있게 포장한다.
죽이는 것은 나쁘다. 남을 사라지게 하는 사람은 정말 나쁘다. 나의 기준도 다른 관점으로 돌아보게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것은 내 친구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내 친구의 큰 아빠는 돌아가셨다. 그것도 10년 전에. 근데 할머니는 아직 그 아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다만 그 아들이 시간이 없고 바쁘기 때문에 안 온다고 생각한다고 하신다. 그 얘기를 듣고 몇 번을 물어보았다. 정말 큰아버지가 살아계신다고, 죽음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고 계시냐고. 그렇다고 했다. 과연 이건 나쁜 행동인건가. 기억에 대한 평화가 옳은가 아니면 현실의 충격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여기에서 주인공 살인마는 이야기한다. 원래 나에게 시를 가르치는 선생의 시집이 형편없어서 죽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살려주었다. 그 선생은 자신이 나의 자비로 인해 원래보다 더 오랜 인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르고 있겠지. 하지만 살인마는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만난 사람도 인연이라며 은희 엄마를 죽인다. 그리고 은희 또한 죽였다. 그리고 다 늙어서 보험을 가입하며 내가 죽으면 은희에게 상속해주겠다고 했지만 보험설계사는 죽을 위험이 아닌 “너무 살” 위험을 생각해 보라고 한다. 어쩌면 죽는 것도 재앙이지만 살아가는 것도 재앙일 수 있다는 새로운 시점의 변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본 많은 영화가 떠올랐다. 최근에 봤던 잠깐만 기억하는 여인의 일을 그린 ‘당신이 잠든 사이에’ 좋은 배우들과 좋은 원작이 있었지만 어느 화면의 씬 때문에 긴장이 다 풀려버려 아쉬웠던 영화. 요즘 핫 했던 ‘인터스텔라’를 만든 천재 감독의 출세작 ‘메멘토’(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름답지만 슬픈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 영화와 이 소설은 확실히 다르다.
마지막으로 김영하 작가는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이야기를 만들면서도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이 될지 자신조차 알 수 없다고 한다. 다 쓴 후에 내 내면에서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고 고뇌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고. 어쩌면 글쓰기가 그래서 매력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라는 존재는 의외로 자율성이 적다. 첫 문장을 쓰면 그 문장에 지배되고, 한 인물이 등장하면 그 인물을 따라야 한다. 소설의 끝에 도달하면 작가의 자유성은 0에 수렴한다. 마지막 문장은 앞에 써놓은 그 어떤 문장에도 위배되지 않을 문장이어야 한다. 무슨 창조주가 이래? 이럴 리는 없다.(171-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