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이 사람은 인도계 미국인이다. 나랑 만난 적도 없고 나라도 종족도 다르다.심지어 나이도 다르다.그런데 첫 이야기를 보는 순간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왜?내가 겪었던 그대로의 이야기가 이 책에 수록되어 있었다. 우리 부부에게도 '잠시 동안 일어난 일'이었던 그 어두웠던 일이.단편 한 편 한 편이 뇌리를 찌르고 폐부를 건드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만약 이 사람이 내가 겪은 일보다 더 늦게 책을 냈더라면, 한국인이라면, 만약 내 지인이었다면.난 이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했을거다."어떻게 내 이야길 뻔뻔하게 소설로 쓸 수 있지?"또 이 책을 읽으면서 난 이 소설이 떠올랐다.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 할레드 호세이니.남자로서 아프가니스탄 안의 선 굵은 일을 연결하며 탄탄한 스토리를 만들어 온 작가.줌파 라히리의 단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산만하게 인물이 얽혀있던 '그리고 산이 울렸다'도 차라리 단편이라면 좋았을 텐데.줌파 라히리의 이 단편은 그렇다.다양성이 존재하는 미국에 들어온 신기한 문화를 가진 인도인들.그들의 평범한 이야기가 미국만의 특색 있는 문화와 섞여 대작이 됐다.다른 한 편으로 특수한 부류들에 대한 이야기면서 내 이야기일 수도 있는 보편성이 숨어있는,신비한 매력을 가진 책이다.이 책 안 아홉 가지 이야기가 하나로 관통하지만 단편만이 주는 매력을 십분 살린 명작이다.난 이 책을 '단편 소설 입문서'로 추천하고 싶다.
이 책 안에 각 이야기가 주는 흐름을 내 나름대로 분류해 보았다.첫째, 부부를 포함한 외부와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잠시 동안의 일, '축복받은 집', '세 번째 이자 마지막인 대륙'둘째, 인생을 살면서 겪는 모순.'섹시(sexy)', '질병 통역사', '비비 할다르의 치료기'셋째, 말과 마음이 다른 경우.'진짜 수위(두르완)', '파르자다 씨가 저녁 식사에 왔을 때', '센 아주머니의 집'
'잠시 동안의 일'에서 두 부부는 아이를 사산했다.아픔을 지우고 일상생활에 복귀한다. 우연히 정전이 되고 할 일이 없어진 두 부부는 같은 공간에서 대화를 시작한다.여자는 사소한 일을, 남자도 사소한 잘못을 이야기한다.여자는 남자에게 이별을 고한다.그때 남자는 끝까지 숨기고 싶었던 비밀을 얘기한다. 둘은 같이 앉아서 운다.읽은 이에 따라 둘의 완벽한 이별로 받아들이기도 한다.난 이런 경험이 있으니까 이것은 두 부부의 '잠시 동안의 일'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혼자 힘든 일을 겪었다고 생각했던 쇼바. 그녀는 이 고통을 견딜 수 없어 모든 책임을 남편 슈쿠마르에게 돌린다. 그가 없어지면 자신이 계속 갖고 있는 고통도 없어질 거란 착각을 한다.내가 모진 일을 겪고 첫째를 임신했을 때 쓴 글을 같이 올려본다.http://hg1e.blog.me/130121654896
사실 나는 남편과 이별이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남편이 나보다 이 아픔을 더 잘 이겨내고 있어 보인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런 어느 날 예전 아이들 초음파 사진에 대해서 물어봤다.난 쿨하게 이걸 폐기해달라고 간호사에게 넘겼었다. 남편이 얘기해 줬다. 사실 우리 애 초음파 사진이 휴지통에 버려지는 게 싫어서 집에 와서 태웠다고 했다. 그때 이 소설 부부처럼 엉엉 울었다. 그리고 곧 우린 다시 임신을 했다.
단지 그녀가 또다시 임신했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행복한 척하기는 싫었다.(47)
이 두 부부는 똑같이 자식에 대한 상실을 경험했다. 분명 같은 아이에 대한 슬픔인데 이 슬픔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따로 부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쇼바의 이별 선언도, 슈쿠마르의 저 생각도 이해가 됐다. 마지막 둘의 눈물은 각자의 아픔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슬픔은 반이 될 것이고 곧 이들에게도 아이가 생기고 이웃처럼 개를 키우며 서점에 가는 일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축복받은 집'에서는 연애 없이 결혼한 커플이 나온다.새 집을 얻은 신랑 산지브. 그는 예쁘고 출신도 좋은 트윙클이란 아내를 뒀다.그들은 힌두교도인데 새 집 안에는 기독교 물건들이 숨겨져 있다.산지브는 그 물건들을 불쾌하다고 생각하지만 트윙클은 매우 좋아한다.결국 산자브 주위 사람들이 트윙클과 그녀가 관심 갖는 물건들에 대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는 결국 모든 트윙클 부탁을 들어준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쩐지 알지 못 했다. 어느 날 오후 팔로 알토에서 그녀가 먼저 물었을 때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294)
이 이야기는 장르로 치면 코미디다. 산자브란 남자는 부자에다 능력 있고 외롭다. 그래서 트윙클이란 조건에 맞는 여자를 만났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들이 싫다. 그래서 후회를 할 즈음 주위 사람이 트윙클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자 자신의 생각을 접어버린다. 남자의 단순함이란! 자신의 신념이 아닌 주위 사람들의 말에 의해 결정하고 행동하는 산자브의 어리석음은 '자신에 대한 소통의 부재'란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이자 마지막 대륙'은 마지막 이야기이자,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다. 작가 아버지의 일대기를 소설화했다고 한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와 대학 도서관에 일을 얻은 '나'. 서른여섯 살에 부인을 얻고 먼저 미국에 와서 자리를 잡는다. 잠시 머물던 집 주인 크로프트 할머니는 백 세가 넘어셨지만 정정해 보이셨다. 6주 후 급히 만나 닷새를 같이 지냈던 신부 말라가 미국으로 온다. 우연히 말라와 산책 중 크로프트 할머니 댁에 방문해 따뜻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인도, 영국을 지나 이곳 미국에서 30년을 지낸 화자는 이렇게 자신을 평가한다.
우주 비행사는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몇 시간밖에 머물지 못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신세계에 거의 30년을 머물렀다. 나는 나의 업적이 평범하다는 것을 잘 안다. 출세하기 위하여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진출한 사람이 나만이 아니고 또 내가 첫 번째로 진출한 사람도 아니다.(392)
그가 낯선 대륙인 미국에서 낯선 신부인 말라와 함께 30년을 살아냈다. 그 살아낼 수 있었던 힘은 그에게 있었던 '소통'능력이었다. 100세가 넘은 크로프트 할머니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끝까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힘. '대단하다고 해'라며 당황시키는 크로프트 할머니의 말에 나중에는 할머니가 얘기하지 않아도 '대단해요'라고 맞장구쳐주는 자상함. 그것이 타인을 크로프트 편이 되게 해 주었다. 서먹했던 말라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아들을 하버드에 보낼 수 있던 것도 바로 그 '소통'이 만들어 준 선물이다.
'섹시(sexy)'는 유부남과 바람을 피우는 미란다와 남편이 처녀와 바람이 나 버림받은 미란다 사촌 락스미에 대한 이야기다. 락스미가 버림받은 이유는 미란다 같은 애 때문이다. 그러나 미란다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부남이지만 데브는 나를 특별히 사랑한다 착각한다. 락스미 아들 로힌이 이해한 '섹시하다' 뜻을 깨닫고는 관계를 정리한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란 말로 미란다 상태를 설명한다. 사촌 락스미가 슬퍼하는 건 유감이지만 내 사랑도 멈출 수 없다고 생각했던 미란다의 모순을 로힌이 한마디로 정리해준다.
그건 당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에요.(101)
'질병 통역사'도 많은 모순을 보여준다. 먼저 카파시 씨가 하는 직업인 질병 통역사부터. 아들이 병에 걸려 죽었다. 하지만 자신은 병원에서 통역을 하며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있다. 카다피 자신의 아내는 별로지만 다스 부인은 좋다. 다스 부인은 매우 우아한 인도계 출신 미국인인 줄 알았지만 씨 다른 아이를 남편 아이로 속여 키우고 있다. 스스로에게 평생 거짓말을 하며 살아간다. 다스 부인이 카다피에게 주소를 물을 때 카타피는 은근히 좋아했지만 결국 그것은 '허례'였을 뿐이란 걸 버려지는 주소 쓴 종이를 보며 깨닫는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너무나 사소한 존재여서 제대로 모욕당할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154)
'비비 할다르의 치료기'에서 비비의 사촌 힐다르는 비비를 부려먹기만 한다. 비비는 그저 사촌의 푸대접에 말없이 견디기만 할 뿐이다. 주위 사람들은 비비를 걱정하는 반면 무심하다 못해 비비를 박대하는 사촌 힐다르 가게에 대해 불매운동을 한다. 결국 사촌 힐다르는 떠나고 비비는 임신한 채 버려진다. 그러나 비비는 가게를 말끔하게 만든 뒤 돈을 벌고 씩씩하게 살아나간다. 비비 사촌 힐다르는 주변 사람 말을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수록 모든 분노는 비비에게 향할 뿐이다. 한참 꼬인 자신의 내면을 알지 못하는 사촌 힐다르는 결국 동네를 떠난다. 비비가 임신한 것이 누구 짓인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확신할 수 없다. 온갖 구박과 멸시 게다가 임신까지 했지만 그 모든 행동들에 비비는 완치됐다. 모순이 준 가장 행복한 결말이다.
세상은 계단의 바닥에서 시작되는 거야.난 이제 내 마음대로 인생을 발견할 수 있어.(339)
'진짜 수위(두르완)' 부리 마는 청소부지만 수위 역할도 겸하는 유용한 관리인이었다. 다만 그녀는 과장이 심했다. 어느 날 건물에서 값이 나가는 물건이 없어진다. 누구도 나이 든 부리 마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부리 마의 거짓말을 이유로 내쫓고 제대로 된 수위를 얻자고 한다. 부리 마의 말이 거짓말인지 과장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부리 마는 자신을 과장하기 좋아하는 자존감 낮은 늙은이에 불과하다. 나쁜 일이 닥쳐 오자 결국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부리 마를 해고한다. 부리 마의 말과 행동이 다른게 아니라 다수인 거주자들이 말(무리 마는 거짓말로 배신했다.) 과 행동(해고)이 일치하지 않는다. 차라리 '리 마가 늙고 쓸모없으니 건물에서 필요가 없다.'는 게 맞는 말일 텐데 말이다.
믿거나 말거나.(184)
'센 아주머니의 집'에서 11살 소년 엘리엇과 시터인 센 아주머니가 등장한다. 센 아주머니 남편은 교수다. 하지만 생활은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정도로 궁핍하다. 시터 일을 하기 위해 운전을 배운 센 아주머니는 자신이 좋아하는 생선을 사기 위해 운전을 하다 사고를 낸다. 그렇게 해고가 되고 엘리엇은 혼자 빈 집을 지키게 된다. 여기서 센 아주머니의 교통사고가 해고의 큰 원인이 됐다. 겉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이제 엘리엇의 엄마는 더 이상 시터에게 돈을 주고 싶지 않았다. 시터를 해고할 궁리를 하다 좋은 기회를 얻어다는 게 맞다. 이 이야기도 인물 행동에 대한 내면적 원인과 표면적 원인이 다르다.
엘리엇, 넌 이제 다 큰 아이야.
'파르 자당 씨가 저녁 식사에 왔을 때'에서 소녀 '나'는 부모의 말상대를 위해 초대됐던 파르자다씨와 우정을 쌓는다. 피르자다씨는 파키스탄 디카에 있는 대학교수다. 내전과 교묘하게 겹쳐져 그는 미국으로 1년 발령을 받았다. 말상대를 찾던 '나'의 부모 초대에 파르자다씨와 인연이 시작됐다. 파르자다씨는 매우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다. 그래서 미국의 마음에도 없는 '생큐'를 비꼰다. 그는 파키스탄으로 돌아가고 화자인 '나'는 그의 편지를 받으며 그리워한다.
아니 왜 생큐라고 말하지? 은행의 출납 계원도 생큐라고 하고, 가게의 점원도 생큐라고 하고, 대출 기간이 지난 책을 돌려주어도 도서관 사서가 내게 생큐라고 하고, 국제 전화 교환원도 내 전화를 다카에 연결하려다 실패하자 생큐라고 말해요. 만약 내가 이 나라에서 죽어 묻히게 된다면, 내 장례식에서도 생큐라고 할 겁니다.(198)
이 말은 뒤에 파르자다 씨가 보내온 편지에서 진심을 담은 감사 인사를 통해 감동을 더 끌어오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야기들을 분류한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하지만 각자 주제에는 슬픔, 웃음,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 독립된 이야기들이지만 각자 이야기들이 합해져 퍼즐처럼 완성된 주제가 보이는 형식을 취했다. 이 소설을 통해 짧은 이야기에 대한 진한 매력에 제대로 빠졌다. '흐르는 강물처럼'에 보면 주인공 아버지 교육방식이 나온다. 한 권의 책을 한 장에 요약하게 하고 한 장을 5줄로, 5줄짜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시키고 그 내용을 찢어 버리게 한다. 그리고 신나게 놀 수 있도록 허락한다. 내 생각과 스토리텔링이 풍부하다는 전제 아래 장편보다는 단편이 단편보다는 시가 더 창조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장편은 작가가 원하는 방향이 보이고 그 스토리라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단편은 강렬하게 한 번 왔다 간다. 결말이 무엇인지도 이 이야기를 통해 뭘 말하고 싶었는지도 한참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알아봐야 한다. 시는 더 하다. 제목부터 단어 선택과 운율까지 그 짧은 글자가 어찌나 완벽하게 정돈되었는지, 자주 시를 곱씹다가 새롭게 깨닫게 된다. 9개의 각 이야기 안에 모두 내가 들어 있다. 내 어려움을 타인에게 모조리 전가할 때도 있었다. 영혼 없는 말로 사람과 진실한 소통 기회를 놓친 적도 있었다. 어떨 때는 내 유치한 마음이 들키기 싫어 결론은 정해놓고 다른 원인을 둘러 내어 억지를 쓴 적도 있다. 어쩌면 인도인이나 미국인이나 나와 같은 한국인이나 똑같은 인간이라면 내면에서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은 만국 공통인가 보다. 우리에게 너무도 생소하지만 익숙한, 그런 이야기를 만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또 이런 책과 좋은 만남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