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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하는 여자들
조안나 러스 외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모처럼 읽은 훌륭한 단편집.
르귄의 단편이 실려 있다는 정보 외엔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이 책을 접했다.
뒤늦게야 이 책이 페미니즘이라는 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편집된 여러작가들의 선집인 걸 알게 되었다.
정작 기대했던 르귄의 작품 보다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흥미로운 몇몇 작품들이 현재 sf계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여성작가들의 힘을 느끼게 한다.
우선 페미니즘 이라는 주제에도 충실하면서 뛰어난 몇 가지 단편을 추려 보자면
압도적으로 눈에 띄는 단편은 수전 팰위크의 "늑대여자"일 것이다.
작가가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영문학 교수인 탓인지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구성력과, 소설로서 갖춰야할 미덕을 모조리 갖춘 뛰어난 소설이었다. 아마 수록 단편 중 대중적으로 가장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낼 작품이지 않을까.
히로미 고토의 "가슴 이야기"는
동양계 작가답게 모유수유와 모성강요에 대한 문제를 딱히 이 장르의 팬이 아니라도 누구나 고개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게 풀어냈다.
파멜라 사전트의 "공포"는 여성들의 개체수가 현저히 부족해진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낸 흥미로운 단편이다.
매거릿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 처럼 여성들은 통제되고 다산이 미덕이 되며 불임, 피임은 철저히 금지되는 사회.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숨어 사는 소수 여성들의 삶이 마치 나치 치하의 유태인들의 삶을 연상케 한다.
단편집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의식에선 조금 떨어져 있는 듯 하지만
개인적 취향으로 마음에 든 단편 중 하나는 마지막 수록작인 엘리자베스 보나뷔르의 "바닷가 집".
도입부만 봤을 땐 흔하디 흔한... 안드로이드에 열광하던 90년대 sf 사조를 어설프게 답습한 평작이려나... 싶었는데.
엔딩까지 보고나니 울컥!
이 분야의 대가인 필립 k딕이 끊임없이 자문해온 인공적 존재의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전혀 촌스럽지 않게 넌지시 던지는...
그걸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자연스레 치환시켜 보는 이의 감성을 울컥 하게 만드는 보기드물게 세련된 수작이었다.
게다가 마지막의 반전의 반전은... 거의 리처드 매드슨 급.
다 읽고 나니 이 분야의 여성작가들이 정말 풍성해 보이지만
책 말미 역자 후기에도 있듯이 오랜 세월 sf란 분야는 여성들에게 특히 배타적인 장르였다.
여성경시 풍조가 심했던 휴고상에 1967년까지 여성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요. 2016년 여성 수상자들이 쏟아져 나오기까지도 그 역사는 평탄하지 못했다.
여성작가들이 휴고상을 오염시키는 것을 막자는 운동까지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을 보고 처음 알았다.
그 일환으로 남성 작가들의 여성들을 비꼬는... 여성을 무지하고 철없는 사고뭉치, 내지는 냉혹하고 융통성 없는 여성들이 권력을 장악한 디스토피아를 그린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도.
여태까지 이 장르를 즐겨 오며 그저 여성 작가들이 이 분야에 취약해서 적은 거겠거니... 생각해 왔던 스스로의 무지 또한 깨닫고 반성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적대적인 sf 소설계에서 존경해 마지않는 르귄 여사와 옥타비아 버틀러 같은 뛰어난 작가들이 어떻게 살아남고 투쟁해 왔나를 생각하니 숙연한 마음까지 드는...
참 좋은 단편집이고 좋은 시간이었다.
늘 좋은 책들을 내주는 아작에 고맙다.
아작의 책들은 판형 또한 손에 착 감기는 사이즈와 무게감이고.
편집 또한 가독성이 좋고 읽는 내내 피로감이 거의 없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