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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3
귄터 그라스 지음, 김재혁 옮김 / 민음사 / 2002년 5월
평점 :
르네상스 3대 화가라는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당>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디오게네스, 유클리드 등 고대 세계의 이름높은 철학자와 과학자를 등장시켰습니다. 이 중에 단 한 명의 여성이 있는데, 그녀의 이름은 히파티아(Hypatia). 안타까운 사실은 그녀의 이름이 오랫동안 남게 된 원인이 학자로서의 업적이라기 보다는 배타적인 종교와 남성우월주의에 의한 희생자 또는 순교자이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히파티아는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이자 철학자로서 당대 최고의 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에도 언급되고 있는데, 그녀는 알렉산드리아를 지배하게 된 기독교도들에 의해 이교도로 낙인찍히면서 잔혹하게 살해당합니다. 그녀의 죽음은 광신(狂信)의 횡포였고, 독단과 독선이 어떻게 학문과 예술을 파괴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가운데 보라색 옷을 입고 턱을 괸 사람이 헤라클레이토스이고, 왼쪽 옆으로 두번째 흰 옷읍 입은 여성이 히파티아
귄터 그라스의 [넙치]는 히파티아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넙치]는 귄터 그라스가 가한 일종의 문명 비판으로 읽을 수 있는데, 특이한 것은 젠더(gender)의 관점에 입각한 물질문명 비판, 즉, 가부장적인 남성중심의 물질문명 비판이라는 점입니다. 자연의 힘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정복하고자 하는 문명, 자유와 평등을 힘의 논리로 바꾸어 약육강식의 억압과 폭력을 정당화했던 문명,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셀 수 없을 정도의 전쟁을 치르고도 아직도 물질문명의 유지와 착취를 위해 질주하는 문명. 귄터 그라스는 [넙치]에서 이와 같은 야만적인 문명이 남성의 문명이었으며, 이 문명 하에서 희생하거나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만 했던 것이 여성이었음을 9명의 여성과 한 마리 넙치의 입을 통해 지적합니다.
[넙치]의 기본적인 틀거리는 신석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가운데 살다 간 9명의 여성의 삶으로 구성됩니다. 이들 9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는 9개월(여성의 임신 기간)을 한 달 단위로 나누어 각 달마다 한 명씩 배치됩니다. 여기에 게르만족의 대이동, 중세 마녀재판, 그단스크(단치히)의 자유노조운동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과 바스코 다 가마, 아우구스트 베벨, 로자 룩셈부르크 등 역사적 인물이 삽화처럼 끼워지면서 때론 고대에서 현대로, 때론 현대에서 중세로 시간과 공간과 시점이 변화무쌍하게 바뀌면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길고 긴 인류의 역사와 여성의 삶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귄터 그라스는 ‘요리’를 통해 두 가지를 매개짓습니다. [넙치]에 등장하는 9명의 여성들은 모두 요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들은 음식재료를 구하여 불을 피우고, 다양한 조리방법을 활용하여 음식을 요리하고, 그것을 남편과 자식들, 이웃에게 먹였습니다. 기근과 질병으로 식량이 없을 때에는 대체식량을 찾아내어 인류가 연명하도록 하였습니다.
여성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것이 불의 사용법입니다. 요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불이 필요한 법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전형적인 남성영웅적 신화라면 [넙치]에 나오는 불의 인류 전래 신화는 완전히 다른 양상입니다. 불은 첫 번째 시대의 여성인 아우아가 하늘의 늑대로부터 자신의 성기 속에 감추어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 불은 대대로 여성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여성들은 젖을 넣거나 호박을 녹이거나 버섯을 가미하여 스프를 끓이기도 하고, 감자를 구워내기도 하고, 양배추와 돼지고기를 볶아내어 투쟁중인 노동자의 단체 식사로 내놓았습니다.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니, 가족들을 먹이기 위한 여성들의 고단한 노력은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대략 7천년을 생존하도록 한 ‘참된 투쟁’이었던 것입니다.
먹거리를 장악한 여성들이 인류사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지나간 역사는 그 반대였습니다. 왜 여성과 남성의 위치가 바뀌었을까? 여기서 귄터 그라스는 그림 형제의 우화에 등장하는 한 마리 넙치를 등장시킵니다. 이 넙치는 일종의 세계정신 또는 절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넙치는 지난 세월동안 철저하게 남성들의 편만 듭니다. 신석기시대에 한 남성에게 나타난 넙치는 남성들을 충동질하여 여성들에게 반기를 들게 함으로써 평화로운 여성지배시대를 끝장내고 가부장제도를 확립하도록 배후조종 하게 되고, 그 결과 인류를 다툼과 경쟁으로 몰고간 주역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예를 들어 여성이 지켜온 불은 생존을 위한 따스함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불의 용도가 넙치의 사주로 ‘금속을 녹이는 도구’로서 새롭게 변화됩니다. 이제 인류는 불을 이용해 광석을 녹여 금속을 생산하고, 그것으로 도구와 무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획기적인 생산수단의 혁명은 생산량의 비약적 증가를 가져왔으며, 곧이어 사적 소유의 개념을 발생시켰고, 재산 축적 과정에서 계급을 발생시켰습니다. ‘계급’의 발생이란 곧 차별과 지배-피지배 관계의 구축을 의미하는 것이니, 모계사회의 따뜻함과 평등함은 이윤동기의 충족을 위한 경쟁과 다툼, 갈등과 전쟁의 역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금속을 녹여 만드는 것이 무기에만 국한될까요? 화폐 역시 금속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이 말한 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를 등장시킨 물질문명의 기반은 바로 이 시기부터 시작합니다.
남성의 세계 지배를 배후에서 조종한 넙치가 직접 밝히는 ‘남성 지배 이후의 모습’을 들어 봅시다.
그(넙치)는 남자들의 행동이 위대한 쪽에서 괴물 같은 모습으로 급변해 버린 데 대해 개탄하기 시작했다. 「나는 너희에게 지식과 권력을 주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원한 것은 전쟁과 고작 비참함뿐이었다. 자연을 너희에게 내맡겼으나, 너희들은 기껏 자연을 강탈하고 오염시키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고, 파괴해 버렸다. 내가 너희에게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세계를 풍족하게 먹여 살리지 못하고 있다. 굶주림은 증가하고 있다. 너희의 시대는 단말마를 지르며 끝나가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너희 남자들은 끝장이 난 것이다. 허튼 수작만 계속해서 벌이고 있으니 이젠 당해낼 재간이 없구나. 자본주의 사회이든 아니면 공산주의 사회이든, 도처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이성의 탈을 쓴 광기뿐이다.」 (제2권 p.299)
지금 넙치는 페미니스트들로 구성된 ‘여성 법정’에 피고인으로 서 있습니다. 발트해에서 3명의 여성에게 붙잡힌 넙치는 법정에 기소되었고, 남성이 구축해 온 가부장적 역사를 비판하고 앞으로 여성들의 편을 들겠다고 선언합니다.
중요한 것은 귄터 그라스는 여성에 의한 지배 역시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가 보기에 남성에 의한 지배라느니, 여성에 의한 지배라느니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결과물을 낳는 방식입니다. 나치 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 폴란드 자유노조운동 등 극단의 시대 한복판에서 일생을 살아왔던 귄터 그라스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는 야만적이었음을 지적하지만, 그 역의 관계가 반드시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방식이 아니란 점 역시 분명히 합니다. 그는 특히 가부장제도를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가는’ 모습에 경멸과 반대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되는 사건이 ‘아버지의 날’에 벌어진 참극입니다. 앞서 언급한 넙치를 발트해에서 잡아 법정에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3명의 여성에게는 사실 감추고 싶은 전력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아버지의 날’에 ‘진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라는 명목하에 술에 취한 채로 플라스틱으로 만든 ‘남성 성기’를 달고 잠들어 있던 친구를 강간합니다. 그리고 충격에 빠져 혼자 돌아가던 이 친구가 폭주족에게 다시 강간당하여 무참하게 살해되었음에도 무관심하게 일상으로 돌아가 버립니다(이들이 자신들의 폭력적 행위를 반성했다는 내용도, 폭주족을 고발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이들중 한 명인 지클린데 훈챠는 법정의 검사 역할을 맡아 맹활약한다는 이야기만 나올 뿐입니다).
결국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고민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너무나 뿌리깊게 인식되어 있는 지배-피지배 관계의 잔재 속으로 다시 매몰됩니다. 억압과 횡포의 주체만 바뀔 뿐이죠. 히파티아의 참극이 광신이라는 극단의 횡포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날의 참극 역시 극단의 횡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귄터 그라스는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게 [넙치]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최초의 여성인 있는 ‘아우아’에게 달려 있었다고 하는 세 번째 유방입니다. 세 개의 유방을 가지고 아우아는 당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에게 골고루 젖을 나누어 주었습니다(편애하던 남성에게 아주 약간 더 주기는 했지만). 귄터 그라스가 보기에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우아의 유방이 2개가 된 시점부터 평화와 형평의 세계는 어그러진 것입니다. 2개의 유방이란 곳 양자택일(兩者擇一), 또는 일방에 의한 일방의 지배, 또는 두발 자전거처럼 쓰러지기 쉬운 불안정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가부장적 질서와 극단적/전투적 페미니즘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제3의 길, 제3의 유방을 찾고 있는 셈입니다.
이 쯤에서 또 생각나는 것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에 나오는 <수의 신비>라는 단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마 이게 귄터 그라스가 [넙치]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인용해 봅니다.
2는 1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2는 분할이며 상호 보완성이다.
2는 서로 대립하며 보완하는 남성과 여성을 나타낸다.
2는 사랑을 뜻한다.
2는 자기 자신과 세계 사이의 거리를 상징한다.
2는 다른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나타낸다.
2는 오로지 자기 자신, 즉 1에만 관심을 갖는것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2는 남과의 대립을 상징한다. 따라서 2는 전쟁이기도 하다.
2는 선과 악, 흑과 백, 명제와 반대명제, 음과 양, 표면과 이면이다.
2는 모든것이 나누어질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좋은것이 나쁜결과를 가져올수 있고 반대로 나쁜것이 좋은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2는 서로 반대되는것을의 충돌을 뜻하며, 이 충돌이 창조적으로 승화되면서 3이 생겨난다.
3은 만물이 정, 반, 합을 거쳐 발전해 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3은 1과 2의 결합에서 생겨난 자식이다.
3은 삼각형을 만들어 내며, 1과 2가 벌이는 싸움의 관찰자가 된다.
3은 입체를 뜻한다. 세계는 3이 있음으로 해서 부피를 갖는다.
3은 1과 2 사이에 관계를 맺어주고 그 관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 힘이 분산되지 않고 한방향으로 모이면 3은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 3의 운동은 4로 넘어가면서 일시적인 안정국면을 맞는다.
귄터 그라스의 상상력이라고 할까... 귄터 그라스의 작품을 보면 개인의 삶이 한 국가, 한 민족, 한 시대와 어떻게 결합하여 흘러가는지를 보여주기로는 정말 최고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소한 [넙치]에서의 생각에 대해서는 제한적으로나마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제3의 유방’ 그러니까 대립 관계 사이로 난 ‘제3의 길’은 사실 현실에서 구현하기에는 너무나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사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놓고 양자택일하는 것은 충분히 문제 소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제3의 길을 찾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두 가지 대립항 가운데 제3의 길은 (좀 극단적인 말이라 조심스럽지만) 현재의 모순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이용당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한 제3의 길을 찾자는 이야기는 두 체제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힘이 발달한 서구사회에서 보다 의미있는 문제입니다. 솔직히 우리 사회에서는 제3의 길이 아니라 ‘천민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직은 더 의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좀 더 양보해서 제3의 길을 찾는 과정은 현재에 대한 비판과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사회의 가부장적 구조의 뿌리는 여전히 강고합니다. 최소한 한국에서 여성문제의 일차적인 출발점으로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의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운동 역시 인간이 하는 운동인지라 오류가 나타날 수도 있고 끊임없이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에 ‘전투적 페미니즘’ 운운하는 것은 보다 나은 운동을 위한 건강한 비판이라기 보다 현실에 대한 은폐는 아닌지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넙치]에 대한 이야기가 지나치게 번져간 것 같습니다만 현대판 히파티아라 할 수 있는 자유와 학문, 지성에 대한 공공연한 억압을 우리는 경험하였습니다. 부디 우리 사회에서도 전근대적인 인습과 질곡이 청산되고, 제3의 길을 적극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시기가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몇 자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