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널로그 - 생존과 쾌락을 관장하는 놀라운 구멍, 항문 탐사기
이자벨 시몽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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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시간때우기 같은 내용으로 시작한다. 동물의 항문이나 항문에서 발견된 기상천외한 물건 같은 이야기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마지막에 다다른 곳은 깔깔대며 "아! 재미있는 책이었어"라고 말하며 잊어버릴 수 없는, 매우 논쟁적인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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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 맞서며 - 전통, 모험, 혁신의 그리스 로마 고전 읽기 메리 비어드 선집 3
메리 비어드 지음, 강혜정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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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낀 이 책의 매력은 마지막 페이지에 있다. ˝어떤 책의 주장을 다루는 데 나는 적당히 사정을 봐주거나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하나의 황금률은 확실하게 가지고 있다. 나는 절대로 작가의 면전에서 말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내용을 서평에 넣지 않는다.˝ (p.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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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3
귄터 그라스 지음, 김재혁 옮김 / 민음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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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3대 화가라는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당>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디오게네스, 유클리드 등 고대 세계의 이름높은 철학자와 과학자를 등장시켰습니다. 이 중에 단 한 명의 여성이 있는데, 그녀의 이름은 히파티아(Hypatia). 안타까운 사실은 그녀의 이름이 오랫동안 남게 된 원인이 학자로서의 업적이라기 보다는 배타적인 종교와 남성우월주의에 의한 희생자 또는 순교자이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히파티아는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이자 철학자로서 당대 최고의 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에도 언급되고 있는데, 그녀는 알렉산드리아를 지배하게 된 기독교도들에 의해 이교도로 낙인찍히면서 잔혹하게 살해당합니다. 그녀의 죽음은 광신(狂信)의 횡포였고, 독단과 독선이 어떻게 학문과 예술을 파괴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가운데 보라색 옷을 입고 턱을 괸 사람이 헤라클레이토스이고, 왼쪽 옆으로 두번째 흰 옷읍 입은 여성이 히파티아 

 

귄터 그라스의 [넙치]는 히파티아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넙치]는 귄터 그라스가 가한 일종의 문명 비판으로 읽을 수 있는데, 특이한 것은 젠더(gender)의 관점에 입각한 물질문명 비판, 즉, 가부장적인 남성중심의 물질문명 비판이라는 점입니다. 자연의 힘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정복하고자 하는 문명, 자유와 평등을 힘의 논리로 바꾸어 약육강식의 억압과 폭력을 정당화했던 문명,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셀 수 없을 정도의 전쟁을 치르고도 아직도 물질문명의 유지와 착취를 위해 질주하는 문명. 귄터 그라스는 [넙치]에서 이와 같은 야만적인 문명이 남성의 문명이었으며, 이 문명 하에서 희생하거나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만 했던 것이 여성이었음을 9명의 여성과 한 마리 넙치의 입을 통해 지적합니다.

 

[넙치]의 기본적인 틀거리는 신석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가운데 살다 간 9명의 여성의 삶으로 구성됩니다. 이들 9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는 9개월(여성의 임신 기간)을 한 달 단위로 나누어 각 달마다 한 명씩 배치됩니다. 여기에 게르만족의 대이동, 중세 마녀재판, 그단스크(단치히)의 자유노조운동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과 바스코 다 가마, 아우구스트 베벨, 로자 룩셈부르크 등 역사적 인물이 삽화처럼 끼워지면서 때론 고대에서 현대로, 때론 현대에서 중세로 시간과 공간과 시점이 변화무쌍하게 바뀌면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길고 긴 인류의 역사와 여성의 삶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귄터 그라스는 ‘요리’를 통해 두 가지를 매개짓습니다. [넙치]에 등장하는 9명의 여성들은 모두 요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들은 음식재료를 구하여 불을 피우고, 다양한 조리방법을 활용하여 음식을 요리하고, 그것을 남편과 자식들, 이웃에게 먹였습니다. 기근과 질병으로 식량이 없을 때에는 대체식량을 찾아내어 인류가 연명하도록 하였습니다.

여성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것이 불의 사용법입니다. 요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불이 필요한 법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전형적인 남성영웅적 신화라면 [넙치]에 나오는 불의 인류 전래 신화는 완전히 다른 양상입니다. 불은 첫 번째 시대의 여성인 아우아가 하늘의 늑대로부터 자신의 성기 속에 감추어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 불은 대대로 여성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여성들은 젖을 넣거나 호박을 녹이거나 버섯을 가미하여 스프를 끓이기도 하고, 감자를 구워내기도 하고, 양배추와 돼지고기를 볶아내어 투쟁중인 노동자의 단체 식사로 내놓았습니다.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니, 가족들을 먹이기 위한 여성들의 고단한 노력은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대략 7천년을 생존하도록 한 ‘참된 투쟁’이었던 것입니다.

 

먹거리를 장악한 여성들이 인류사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지나간 역사는 그 반대였습니다. 왜 여성과 남성의 위치가 바뀌었을까? 여기서 귄터 그라스는 그림 형제의 우화에 등장하는 한 마리 넙치를 등장시킵니다. 이 넙치는 일종의 세계정신 또는 절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넙치는 지난 세월동안 철저하게 남성들의 편만 듭니다. 신석기시대에 한 남성에게 나타난 넙치는 남성들을 충동질하여 여성들에게 반기를 들게 함으로써 평화로운 여성지배시대를 끝장내고 가부장제도를 확립하도록 배후조종 하게 되고, 그 결과 인류를 다툼과 경쟁으로 몰고간 주역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예를 들어 여성이 지켜온 불은 생존을 위한 따스함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불의 용도가 넙치의 사주로 ‘금속을 녹이는 도구’로서 새롭게 변화됩니다. 이제 인류는 불을 이용해 광석을 녹여 금속을 생산하고, 그것으로 도구와 무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획기적인 생산수단의 혁명은 생산량의 비약적 증가를 가져왔으며, 곧이어 사적 소유의 개념을 발생시켰고, 재산 축적 과정에서 계급을 발생시켰습니다. ‘계급’의 발생이란 곧 차별과 지배-피지배 관계의 구축을 의미하는 것이니, 모계사회의 따뜻함과 평등함은 이윤동기의 충족을 위한 경쟁과 다툼, 갈등과 전쟁의 역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금속을 녹여 만드는 것이 무기에만 국한될까요? 화폐 역시 금속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이 말한 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를 등장시킨 물질문명의 기반은 바로 이 시기부터 시작합니다.

 

남성의 세계 지배를 배후에서 조종한 넙치가 직접 밝히는 ‘남성 지배 이후의 모습’을 들어 봅시다.

 

그(넙치)는 남자들의 행동이 위대한 쪽에서 괴물 같은 모습으로 급변해 버린 데 대해 개탄하기 시작했다. 「나는 너희에게 지식과 권력을 주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원한 것은 전쟁과 고작 비참함뿐이었다. 자연을 너희에게 내맡겼으나, 너희들은 기껏 자연을 강탈하고 오염시키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고, 파괴해 버렸다. 내가 너희에게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세계를 풍족하게 먹여 살리지 못하고 있다. 굶주림은 증가하고 있다. 너희의 시대는 단말마를 지르며 끝나가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너희 남자들은 끝장이 난 것이다. 허튼 수작만 계속해서 벌이고 있으니 이젠 당해낼 재간이 없구나. 자본주의 사회이든 아니면 공산주의 사회이든, 도처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이성의 탈을 쓴 광기뿐이다.」 (제2권 p.299)

 

지금 넙치는 페미니스트들로 구성된 ‘여성 법정’에 피고인으로 서 있습니다. 발트해에서 3명의 여성에게 붙잡힌 넙치는 법정에 기소되었고, 남성이 구축해 온 가부장적 역사를 비판하고 앞으로 여성들의 편을 들겠다고 선언합니다.

 

중요한 것은 귄터 그라스는 여성에 의한 지배 역시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가 보기에 남성에 의한 지배라느니, 여성에 의한 지배라느니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결과물을 낳는 방식입니다. 나치 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 폴란드 자유노조운동 등 극단의 시대 한복판에서 일생을 살아왔던 귄터 그라스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는 야만적이었음을 지적하지만, 그 역의 관계가 반드시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방식이 아니란 점 역시 분명히 합니다. 그는 특히 가부장제도를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가는’ 모습에 경멸과 반대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되는 사건이 ‘아버지의 날’에 벌어진 참극입니다. 앞서 언급한 넙치를 발트해에서 잡아 법정에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3명의 여성에게는 사실 감추고 싶은 전력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아버지의 날’에 ‘진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라는 명목하에 술에 취한 채로 플라스틱으로 만든 ‘남성 성기’를 달고 잠들어 있던 친구를 강간합니다. 그리고 충격에 빠져 혼자 돌아가던 이 친구가 폭주족에게 다시 강간당하여 무참하게 살해되었음에도 무관심하게 일상으로 돌아가 버립니다(이들이 자신들의 폭력적 행위를 반성했다는 내용도, 폭주족을 고발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이들중 한 명인 지클린데 훈챠는 법정의 검사 역할을 맡아 맹활약한다는 이야기만 나올 뿐입니다).

결국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고민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너무나 뿌리깊게 인식되어 있는 지배-피지배 관계의 잔재 속으로 다시 매몰됩니다. 억압과 횡포의 주체만 바뀔 뿐이죠. 히파티아의 참극이 광신이라는 극단의 횡포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날의 참극 역시 극단의 횡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귄터 그라스는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게 [넙치]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최초의 여성인 있는 ‘아우아’에게 달려 있었다고 하는 세 번째 유방입니다. 세 개의 유방을 가지고 아우아는 당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에게 골고루 젖을 나누어 주었습니다(편애하던 남성에게 아주 약간 더 주기는 했지만). 귄터 그라스가 보기에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우아의 유방이 2개가 된 시점부터 평화와 형평의 세계는 어그러진 것입니다. 2개의 유방이란 곳 양자택일(兩者擇一), 또는 일방에 의한 일방의 지배, 또는 두발 자전거처럼 쓰러지기 쉬운 불안정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가부장적 질서와 극단적/전투적 페미니즘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제3의 길, 제3의 유방을 찾고 있는 셈입니다.

 

이 쯤에서 또 생각나는 것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에 나오는 <수의 신비>라는 단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마 이게 귄터 그라스가 [넙치]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인용해 봅니다.

 

2는 1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2는 분할이며 상호 보완성이다.

2는 서로 대립하며 보완하는 남성과 여성을 나타낸다.

2는 사랑을 뜻한다.

2는 자기 자신과 세계 사이의 거리를 상징한다.

2는 다른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나타낸다.

2는 오로지 자기 자신, 즉 1에만 관심을 갖는것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2는 남과의 대립을 상징한다. 따라서 2는 전쟁이기도 하다.

2는 선과 악, 흑과 백, 명제와 반대명제, 음과 양, 표면과 이면이다.

2는 모든것이 나누어질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좋은것이 나쁜결과를 가져올수 있고 반대로 나쁜것이 좋은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2는 서로 반대되는것을의 충돌을 뜻하며, 이 충돌이 창조적으로 승화되면서 3이 생겨난다.

 

3은 만물이 정, 반, 합을 거쳐 발전해 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3은 1과 2의 결합에서 생겨난 자식이다.

3은 삼각형을 만들어 내며, 1과 2가 벌이는 싸움의 관찰자가 된다.

3은 입체를 뜻한다. 세계는 3이 있음으로 해서 부피를 갖는다.

3은 1과 2 사이에 관계를 맺어주고 그 관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 힘이 분산되지 않고 한방향으로 모이면 3은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 3의 운동은 4로 넘어가면서 일시적인 안정국면을 맞는다.

 

귄터 그라스의 상상력이라고 할까... 귄터 그라스의 작품을 보면 개인의 삶이 한 국가, 한 민족, 한 시대와 어떻게 결합하여 흘러가는지를 보여주기로는 정말 최고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소한 [넙치]에서의 생각에 대해서는 제한적으로나마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제3의 유방’ 그러니까 대립 관계 사이로 난 ‘제3의 길’은 사실 현실에서 구현하기에는 너무나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사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놓고 양자택일하는 것은 충분히 문제 소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제3의 길을 찾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두 가지 대립항 가운데 제3의 길은 (좀 극단적인 말이라 조심스럽지만) 현재의 모순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이용당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한 제3의 길을 찾자는 이야기는 두 체제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힘이 발달한 서구사회에서 보다 의미있는 문제입니다. 솔직히 우리 사회에서는 제3의 길이 아니라 ‘천민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직은 더 의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좀 더 양보해서 제3의 길을 찾는 과정은 현재에 대한 비판과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사회의 가부장적 구조의 뿌리는 여전히 강고합니다. 최소한 한국에서 여성문제의 일차적인 출발점으로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의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운동 역시 인간이 하는 운동인지라 오류가 나타날 수도 있고 끊임없이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에 ‘전투적 페미니즘’ 운운하는 것은 보다 나은 운동을 위한 건강한 비판이라기 보다 현실에 대한 은폐는 아닌지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넙치]에 대한 이야기가 지나치게 번져간 것 같습니다만 현대판 히파티아라 할 수 있는 자유와 학문, 지성에 대한 공공연한 억압을 우리는 경험하였습니다. 부디 우리 사회에서도 전근대적인 인습과 질곡이 청산되고, 제3의 길을 적극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시기가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몇 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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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트리스 2015-11-14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정연하게 잘 쓰셨네요. `넙치` 외에도 리뷰를 많이 올리셨네요. 담에도 간간이 들러 읽어보겠습니다.
 

 

 

연말이 되면 다음 해에 읽을 책에 대해 계획을 세우곤 했다. 물론 그 계획대로 실천하는지는 다른 문제지만, 원래 실제 여행보다 더 재미있는 때는 여행계획을 세울 때가 아닌가. 새로운 마음으로 다음 해에 어떤 책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은 정말 행복한 고민이었다.

 

<나는 가수다>의 첫 번째 방송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방송 취지를 이야기하던 자문위원 중에 한 분이 ‘노래를 들으며 예전의 행복했던 때를 다시 느끼고 싶다’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하셨다. 이 말이 내게 큰 울림으로 남았다. 2012년 책읽기 계획은 <나는 가수다>의 이 말에서 따오기로 했다. 이제까지 내게 행복감을 주었던, 내게 새로 깨어나는 아픔과 기쁨과 충격을 주었던, 내게 살아있는 것의 가치를 보여주었던 책을 다시 한 번 잡아 보고 싶어진 것이었다. (어쩌면 2011년 하반기에 바쁘게 살아오면서 지쳤던 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 물론 읽지 않았던 새로운 책들도 읽을 것이지만 그래도 틈 날 때마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느꼈던 행복감을 다시 한 번 되살리는 2012년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점에서 2012년 첫 번째 책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선택했다. 어떤 사람은 헤르만 헤세는 독일보다 동양권, 특히 일본과 한국에서 인기있는 작가로 격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데미안]의 내용이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교훈적이어 교조적이기까지 하고 시대착오적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누가 뭐래도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 [데미안]은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책이고, 지금도 읽을 때마다 그 어떤 책에서 받을 수 없었던 감동과 힘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데미안]과의 인연은 중학교 2학년 때로 올라간다. 한참 사춘기를 겪으면서 적지 않게 힘들었던 시기. [데미안]은 정말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기분을 들게 한 책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첫 번째 章인 <두 세계>부터 그동안 당연한 듯 소속되어 왔던 가정과 학교, 교회의 규범을 무자비할 정도로 해체해 버렸다. 저녁부터 읽기 시작한 책은 평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까지 이어졌다. 다 읽기 전까지는 도저히 책장을 덮을 수 없었다. 결국 수면부족 상태에서 등교한 나는 마치 싱클레어라도 된 양, 교과서 한 귀퉁이에 땅에 절반쯤 박힌 알 속에서 날개짓하며 깨어 나오려고 하는 새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지금 생각하니 유치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푹 빠졌다)

 

많은 사람들이 [데미안]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데미안]이 그동안 우리가 피해야 한다고 배워왔던 곳, 어둡다고 느껴왔던 곳, 죄악의 세계라고 알아왔던 곳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충격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선(善)과 악(惡), 신(神)과 악마(惡魔)의 세계를 이분하여 바라보는 관점에 익숙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보고 들어온 교육체계는 대부분 ‘권선징악’을 가르쳤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는 서양식 교육이 뿌리내리면서, 또한 기독교라는 종교가 유래없이 폭발적으로 부흥하면서 이런 관점은 더더욱 익숙해졌다.

그런데 새가 껍질을 깨고 날아간 곳이 양면성을 가진 ‘아브락사스’라는 신이라는 점은 이런 세계관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아벨이 아니라 카인을,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간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편 강도가 아니라 끝까지 인간으로 죽은 왼편의 강도를, 아담이 아니라 이브(에바 부인)에게 관심을 돌리고 그 지위를 격상시키는 것은 이제껏 부정해 왔던 다른 세계가 있음을, 그리고 그 ‘두 세계’가 사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청춘에게, 세계와 사회에 반항의 기세를 떨치는 사춘기 청년에게 [데미안]이 주는 충격파는 이만저만 커다란 것이 아니다.

 

또 한가지 [데미안]이 주는 충격파는 구원을 전지전능한 신에게서 찾지 않는다는 점이다. [데미안]은 신에 의한 분별이 아니라 자신에게 침잠함으로써 얻는 지혜를 말해준다. 하늘을 우러러 신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도, 용서도 땅 위에서, 바로 나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함을 말한다. 모든 것이 ‘나’에게서 비롯되고, 또 모든 것이 ‘나’에게서 종결된다. 이제 ‘나’는 (물론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지만) 신의 위치로 격상되며, 신의 선(善)이 아니라 ‘나’의 선(善)이 삶의 잣대가 된다. 사실 구약성경도 슬쩍 이 점을 말해주고 있다. 어딘가 하면 인류의 기원을 말하고 있는 '창세기'다. 인류의 조상이라는 아담과 이브는 ‘선악을 알게 해 주는’ 나무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선과 악을 나누는 잣대를 알게 된 셈이 아닌가? 그러니 [데미안]에 나오는 이 표현은 놀라울 정도로 함축적이면서도 의미가 깊다.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p.172)

 

쓰고 보니 [데미안]을 무슨 지독한 무신론적, 인본주의적, 상대주의적 책으로 적어버린 감이 있는데, 물론 꼭 그렇게 읽을 필요는 없다. 나만 하더라도 중학교 때 [데미안]을 처음 읽은 후 20대, 30대.. 나이를 먹으면서 몇 번을 읽더라도 변하지 않는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나 자신의 길을 확고하게 걸으라는 것, 내가 가져야 할 진실한 직분은 자신을 찾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이라는 가르침(?) 때문이었다. 내 운명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나이 마흔을 앞두고 어쩌면 이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2012년, 새로운 해를 시작하면서 읽은 [데미안]은 변함없이 내게 중요한 것은 ‘좋은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하고 굴절 없이 살아내라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나도 또 다른 그 어떤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건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시인으로 혹은 광인으로, 예언가로 혹은 범죄자로 끝장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 그런 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중략)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불확실함 속으로, 어쩌면 새로운 것에로, 어쩌면 무(無)에로 던져졌다. 그리고 측량할 길 없는 깊은 곳으로부터의 이 던져짐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 뜻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었다. 오직 그 것만이! (p.172)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는 세상 어디에서건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며, 지금 이 순간을 보내는 ‘나’ 역시 과거나 미래 어느 순간에도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데미안]은 명쾌하게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다소 고루해 보이긴 하지만..) 2012년의 첫 번째 책 [데미안]은 예전에도 그랬듯이, 언제나 변하지 않고 바로 그렇게 한 해를 살아갈 자세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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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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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는 인간의 자기보호 본능이 발현되는 현상 중에 하나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에 대하여 분명한 근거없이, 그리고 그 행동이 이루어진 전후사정에 대한 이해없이, 때로는 루머에 근거해서, 때로는 질투심이나 이기심으로 인해서 비난을 퍼붓는다. 필립 로스는 [휴먼 스테인(Human Stain)]에서 이런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은근한 칼날을 들이댄다. 그가 비판적으로 보는 인간의 모습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인간은 누구나 오점(stain)을 가진 존재인데 그것을 감추고, 속이며 부정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둘째, 다른 사람의 밝혀진 오점에 대해서 (자신도 오점을 가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때 ‘자신만이 성자인 척 하는’ 태도로 비난을 퍼붓는 것은 위선이다.

아테나 대학의 전(前)학장인 콜먼 실크는 흑인을 비하하는 용어를 썼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불명예스럽게 사직한다. 그는 철밥통들이 가득하던 아테나 대학을 학문 탐구로 활기가 넘치는 학교로 변모시켰고, 최초로 흑인 교수를 임용하는 등 과감한 개혁조치를 단행하였으나 수업에 장기간 결석한 학생을 유령에 비유한 스푸크(spook)라는 단어를 썼다는 이유로 한 순간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힌다. spook는 속어로 흑인을 비하하여 ‘검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하필 또 그 학생이 진짜 흑인이었다.)
콜먼 실크의 억울함과 분노는 그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아내마저 사망하면서 극에 달한다. 그런데 이 극심한 분노가 사그러드는 코페르니쿠스적 변화가 일어난다. 딸보다 나이 어린, 그래서 40년 가까이 나이차이가 나는 30대의 여성, 자신이 재직하던 학교의 청소부로 일하던 여성인 포니아 팔리와 사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콜먼 실크의 자식들조차 각종 억측과 루머를 담아서 그들을 비난하였지만, 서로 가슴아픈 오점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이 진정한 것임을 깨닫는다. 포니아 팔리의 전남편인 레스터 팔리에 의해 현세에서의 사랑이 비극적으로 마무리될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채로 말이다.

[휴먼 스테인]의 등장인물들은 제목처럼 모두 얼룩덜룩한 오점(stain)을 가진 인간들이다. 필립 로스는 콜먼 실크와 포니아 팔리,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통하여 인간들의 삶이 ‘숨기고자 하는 오점과 비밀’들로 얼마나 가득차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폭로해 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불충분한 것인지, 나아가 오점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를 이야기해준다.

탄탄대로의 콜먼 실크의 인생을 망가뜨려 놓은 것은 표면적으로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낙인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파멸의 원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평생동안 부정하면서 감추어 왔던 그의 위선적 태도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 콜먼 실크는 ‘당연히’ 백인인 것이라고, 그리고 ‘당연히’ 유태인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읽어가던 어느 순간 그의 부모님이 흑인이었음을, 그래서 콜먼 역시 ‘당연히’ 흑인이란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이 아이러니의 절정은 백인 여성과 결혼하기 위하여 어머니와의 인연을 냉정하게 끊어버리는 콜먼의 행동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건 비겁하고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spook라는 단어를 썼다고 해서 콜먼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님을, 따라서 그는 누명을 쓴 결백한 사람임을 확신하던 독자들도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청년 콜먼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버릴 지도 모르겠다. 그의 불명예스러운 노년이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기쁨으로 가득해야 할 출산의 시기, 자녀들이 태어날 때 콜먼 실크는 얼마나 불안에 떨어야 했을까?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백인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인종차별을 받지 않고 현재의 위치까지 올라왔는데 자신이 가진 흑인으로서의 유전적 형질이 자녀에게서 나타난다면 그의 오점은 백일하게 드러나 버리고 말 것이다. 좀 심하게 비유하자면 갓 낳은 아기를 보러가는 그의 마음은 시한폭탄을 열러 가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책을 보니 그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백인과 흑인의 피를 반씩 섞어 물려받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콜먼 뿐만 아니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의 위선도 그에 못지않다. 다만 그들의 저열함이 콜먼처럼 파급력을 가지고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자기 자녀를 수석 졸업시키기 위하여 콜먼의 가족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는 대신에 콜먼에게 성적 조작을 부탁하는 이웃, 콜먼이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처음 임용한 흑인 교수였지만 그를 배신해 버리는 교수. (이 사람은 콜먼의 장례식에서 자신의 배신을 어떻게 해서든 합리화하기 위한 미사여구를 일삼는다.) 콜먼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리고 포니아 팔리와의 소문이 돌았을 때, 아버지를 믿기 보다는 세상의 소문에 동조하여 아버지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아버지에 대해서 경멸과 비난으로 대우했던 그의 자녀들이 콜먼의 장례식장에서는 울며불며 ‘훌륭했던’ 아버지를 추모하고, 아테나 대학의 건물 중 하나에 아버지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 다른 교수들과 흥정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위선의 절정은 콜먼에게 애증의 감정을 느껴왔던 델핀 루 교수에게서 나타난다. 그녀는 콜먼에게 익명의 협박편지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적 취향을 담은 이메일을 동료 교수들에게 보낸 실수를 무마하기 위하여 절도 사건을 날조한 후, 자신의 실수와 절도혐의를 모두 죽은 콜먼 실크에게 뒤집어 씌운다.

필립 로스는 [휴먼 스테인] 곳곳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르윈스키의 섹스 스캔들을 집어넣었다. 미국과 세계를 흔들었던, 미국 대통령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으로 오점을 남긴 클린턴에 대한 비난으로 들끓었던 시기를 왜 배경으로 삼았을까. 글쎄. 어쩌면 필립 로스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모두가 클린턴을 비난하는데, 그는 성욕이라는 욕망의 실천자이면서 그것이 외부에 노출된 처지의 사람일 뿐이다. 들키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도 모두 오점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대통령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혹시 이런 태도는 나만 깨끗한 성자인 척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휴먼 스테인]에서 저자의 주제 의식을 잘 나타내 주는 인물은 오히려 포니아 팔리일 것이다. 자신의 오점을 숨기기에 급급한 콜먼 실크를 비롯한 상류층의 위선과 비교해 볼 때, 포니아 팔리의 삶의 방식은 솔직한 ‘오점 드러내기’로 동정과 이해, 호응을 불러 일으킨다. 그녀는 아버지의 성추행과 강간, 남편의 폭력이라는 가부장 사회의 폭력과 자녀의 죽음이라는 상처로부터 생존해 왔다. 누군가를 비난해도 정당성을 얻을만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실제로는 읽고 쓸 줄 알았지만) 죽을 때까지도 문맹인 것처럼 행세함으로써 자신의 오점을 세상에 드러내어 비난을 이겨낼 수 있는 ‘당당함’을 획득한다.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이 언제 들통날까봐 노심초사했을 콜먼 실크, 자신의 삶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근거없는 비난을 들어야 했던 콜먼 실크에게 그녀의 이런 솔직한 ‘오점 드러내기’는 일종의 구원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녀에게는 콜먼의 오점, 즉, 그가 흑인인지 백인인지, 진짜로 그가 인종차별주의자인지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포니아에게 사랑할 사람이란 인종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현재 이 순간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각자의 삶에 대해 과도하게 간섭하지만 않는 사람이면 충분하다. 이것을 콜먼 실크가 인정하는 순간 콜먼은 팔리아를 향하여 ‘나는 사실 흑인이요’라는 필생의 고백이 나온다.

필립 로스는 책의 앞 부분부터 ‘자기만이 성자인 척하는’ 이라는 어구를 반복하여 사용한다. 물론 이런 태도는 잘못이다. 당연히 우리는 상대방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 그가 인생에 대해 가지는 자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니 말이다. 그래서 단순하게 윤리적으로만 생각해 본다면 신약성서에 나오는 이 말은 과연 올바르다.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런데 이건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그대로 수용할 경우 우리는 일종의 양비론자 또는 불가지론자가 되어 버린다. 그럼 누가 누구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을까. 나에서부터 시작해서 내 옆의 가족들과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에 이르기까지 다들 불완전한 존재인데 누가 그들을 평가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런 이해와 포용에는 뭐랄까... 일종의 전제조건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해와 포용이 의미를 가지려면 오점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그것을 고치고자 하는 진정성 있는 노력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복수심에 불타던 콜먼이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진정성 있는 태도를 회복해 가게 된 결정적 계기는 포니아의 삶을 보고 평생을 감추어 왔던 비밀(자신은 흑인이다!)을 고백하면서 그것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란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용서한 것에는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후회와 뉘우침을 먼저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의 오점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하여 알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그 오점을 감추기 위하여 얽매여 사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는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필립 로스는 이런 사실을 콜먼 실크와 포니아 팔리라는 거울로 삼아 우리 앞에 놓아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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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2012-08-0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2권이 1권의 반복 설명같다는 말을 듣고 우연히 얻은 1권 밖에 안 읽었는데, 이 글을 보고나니 2권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