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5 로마제국 쇠망사 5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김혜진.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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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원히 세계를 지배할 것 같았던 로마는 동서 분리를 즈음하여 점차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동로마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 속에 로마는 존속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좀 심하게 말하면) 껍데기만 남은 모습에서 옛 로마의 지중해의 여왕으로서의 영광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다. 로마의 쇠퇴는 다른 모든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운명의 부침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현상이 아니었고, 서양의 역사가 로마라는 한 국가의 역사를 벗어나서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이 상호작용하는 역사로, 그리고 아랍인, 사라센인, 투르크인, 중국인 등 전혀 다른 문화체계와의 교류의 역사로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현상도 아니었다. 하나의 국가로서 로마의 빛은 점점 사라져갔지만, 다른 국가들의 모태이자 이웃으로서 로마의 의미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 적어도 ‘로마제국’ 쇠망사라는 의미는 크게 줄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로마제국의 판도에서 형성된 ‘신성로마제국’은 로마의 위세와 영광에 기댄 명칭일 뿐 로마를 계승했다고 보기에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동로마제국’은 여전히 실체적 권력이긴 하였으나, 사방을 둘러싼 이민족의 침략과 내부의 정치적 분열로 콘스탄티노플 주변 지역이나 겨우 유지하는 찌질한(!!!)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에드워드 기번이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로마제국 쇠망사] 집필을 종결하려고 하였던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2.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사망한 이후 약 800년 동안 동로마제국은 혼란과 빈약함을 노출시켰다. 이 당시 동로마제국의 정체가 얼마나 허약했는지 보여주는 증거. 보통 우리가 ‘제국’이라고 하면 창시자의 직계 또는 방계 자손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세습하는 법이다. 간단히 말해 혈통(lineage)에 따른 왕위의 세습인데, 이 당시 동로마제국에서는 이렇게 황가(皇家)를 이룬 사례가 그다지 많지 않다. 황제의 자리는 반역과 폭동, 모함과 음모로 점철되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배신하고, 어머니가 아들을 모함하며, 형제 사이에 옥좌를 두고 서로 죽이며, 친밀한 친구 사이가 갈라서고, 어제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하루 아침에 반역자로 돌변하고, 황위를 목표로 한 폭동과 암살의 무한쟁탈이 벌어진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딱 맞는 형국! 그리고 여기에 황제를 비롯한 귀족들의 도덕적 타락, 제국 신하들의 부패와 무능력이 겹치면서 동로마 제국은 천혜의 요새지인 콘스탄티노플의 일부 지역에만 국한된 약소국으로 축소되었다.

크리스트교는 허약해진 제국 곳곳에서 망조의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삼위일체 논쟁과 성육신 논쟁에 이어서 또 다른 신학논쟁과 파벌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성상(聖像) 숭배 논쟁’으로 알려진 이 논쟁은 로마 신민들간의 불화를 부르고,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에서 그나마 한 형제라는 인식을 유지했던 교회를 라틴 교회(로마 교황)와 비잔티움 교회(그리스 정교회, 동로마 황제)로 두 동강 내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의 문제로 콜로세움에 던져지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박해는 없어지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박해가 나타난다. 즉,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성상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절차와 형식, 권위에 따른 차이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약탈을 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박해가 일어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자의 주장에 외곬으로 빠진 광신(狂信)은 국가의 안위에마저 큰 해악을 끼쳤다. 바울파와 야고보파라는 근본주의적 종파는 사라센인들이 쳐들어 왔을 때 자신들의 믿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도시의 안위를 팔아넘긴다. 라틴 교회와 비잔티움 교회의 대립은 제4차 십자군 전쟁에서 베네치아 상인들의 탐욕과 어우러져 라틴 제국들에 의한 비잔티움 약탈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제공하였고, 동로마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게 멸망당하던 급박한 시기에 유럽 제국들이 보여주었던 수수방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3.
한편 이탈리아의 로마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었다. 로마 교황이 신앙의 영역을 넘어서서 세속의 영역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샤를마뉴 대제나 오토대제와 같은 서유럽 황제들과 교황이 서로간의 이해를 위해 결탁하는 수준이었다. 황제는 ‘로마제국의 계승자’, ‘크리스트교의 보호자’라는 명분을 얻었고, 로마 교황은 성상 숭배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던 동로마제국 황제의 무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방패라는 실리를 얻은 것이다.
처음에는 무력을 보유한 황제의 권한이 강했으므로 무게추가 황제 쪽에 쏠렸다. 오죽했으면 교황이 서거한 후 선출되는 새로운 교황은 교회의 수호자인 황제가 승인하고 동의를 표시하지 않으면 정식 교황이 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부침에 취약한 속세의 권력에 비해 일관된 종교적 열정을 등에 업은 교황의 권한은 점차로 힘을 얻기 시작하여 세속의 권력과 재산을 두고 황제와 맞서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교회 재산의 출발은 샤를마뉴 대제가 교황청의 유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기부한 로마 주변의 토지와 약간의 재산이었지만 이는 곧 후대 황제들이 지켜야 하는 관습으로 고착되었고, 교황청에 대한 황제의 기부는 이후 더욱 확대되어 카롤링거 왕조는 동로마제국 황제가 임명하였던 로마 총독령을 교황에게 넘김으로써 교황의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을 대내외적으로 높여주게 된다.
이제 천상의 권한이라던 교황권은 속세로 내려온다. 몇몇 교황들은 탐욕을 숨김없이 드러내기도 하였는데, 일례로 황제 소유의 토지를 교황에게 기부한다는 서류를 날조하여 교회의 재산으로 삼으려 했던 사건이 발생할 정도였다. 나아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각 교구의 주교를 임명하는 권한 즉,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은 교황과 황제의 힘의 균형관계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었다. 이익이 있는 곳에 탐욕이 생기고, 탐욕이 생긴 곳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 서양의 중세 초기를 관통하는 교황과 황제의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이 지역(이탈리아 전 지역)들을 차지하기 위한 거래에서 교황들은 야심과 탐욕을 드러내 심한 비난을 받는다. 그리스도교 사제라면 자기 직분의 덕목을 훼손시키지 않고서는 도저히 통치하기 힘든 지상의 왕국을 겸손하게 거절했어야 마땅하다. 충실한 신하, 아니 관대한 적들조차도 야만족의 전리품을 나눠 갖는 데 그처럼 안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p.134)

(교황청의 목표는) 추기경 회의에 선거의 자유와 독립성을 주고 황제와 로마 민중의 권리를 영원히 폐지하는 것, 서로마 제국을 교회의 봉토 또는 성직록(聖職祿)으로 증여하고 재점유하며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을 지상의 왕과 왕국으로 확대하는 것.(p.160)

4.
로마의 역사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슬람교이다. 이 신흥종교는 믿음을 보유한 사람들의 신념과 가치관에서부터 소소한 생활습관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들과 유사하였지만, ‘한 손엔 코란, 한 손엔 칼’을 들고 정복을 통한 확장과 포교를 채택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들과 차이점을 보였다. 마호메트가 사망한 후 100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슬람교도들은 아라비아 반도와 메소포타미아, 예루살렘, 이집트를 정복하였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유럽 땅 스페인에까지 세력을 미친다.

이슬람교가 크리스트교 못지않은 세계종교임에는 틀림없으나, 그에 대한 이해수준이 매우 낮은 내 입장에서 비판의 칼을 들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기번이 많은 역사적 문헌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 이슬람 세계의 확장 과정에서 내가 받은 인상 정도를 쓰려고 한다.
이슬람교 전파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관용은 [로마제국 쇠망사] 전체를 통해서 지겹도록 반복되어 온 크리스트교의 획일성과 폭력성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매우 신선했다. 사실 폭력과 정복을 수반한 포교 방식은 이슬람교에 대한 가장 큰 비판지점 중에 하나였다. ‘코란과 칼’ 중에서 양자택일 하는 식의 이슬람 포교방식, 그러니까 코란을 선택할 경우에는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철저한 파괴와 박해를 가한다는 이슬람교의 포교는 무척이나 비인간적이면서 폭력적인 것이다. 그런데 에드워드 기번은 약간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그는 포교 과정에서 잔혹한 면이 분명 있었으나, 그러한 면은 어느 종교이든지 다른 종교와의 초기 접촉 과정에서 거의 예외없이 발생하였던 것이며, 오히려 이슬람교는 박해 못지않게 상당한 관용을 베풀어 정복지에서의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허용하였다고 주장한다. 로마제국의 영토로서 크리스트교의 전통이 뿌리깊게 남아 있었던 메소포타미아 지방과 아프리카, 스페인을 정복한 후, 칼리프들은 다음과 같은 관용을 베풀었다.

11세기 혁명 후(이슬람의 동방, 아프리카, 스페인 정복) 터키 제국의 유대교도들과 그리스도교도들은 아랍 칼리프들이 허용한 양심의 자유를 즐겼다. (중략) 가톨릭교도들은 이집트의 교회를 같이 썼고, 동방의 모든 종파들은 관용이라는 공동의 혜택을 받았다. 대주교오 주교, 성직자의 지위, 면책권, 국내 관할권은 행정관이 보호해 주었다. (p.359)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이슬람교 역시 근본주의적 신앙이 불러일으킨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해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이런 부정적인 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사건이 당대 최고의 도서관이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송두리째 불태워버렸던 것이었다. 70만권에 이르던 인류의 지적 보고에 대한 처리를 묻던 현지 사령관에 대한 칼리프의 아래와 같은 대답은 그야말로 무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의 글이 신의 서적과 의견이 일치한다면 (중복되어서) 쓸모없으니 보존할 필요가 없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해로운 글들이므로 마땅히 파기해야 할 것이다. (p.323)

5.
앞서도 언급했지만 원래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 저술을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끝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기번은 동로마제국의 멸망까지 계속 저술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면서 마지막 두 권에 대한 계획 가운데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 그는 콘스탄티노플 함락까지 동로마제국 800년의 역사를 과감히 압축할 것이며, 둘째, 서로마 제국의 판도에서 번영하기 시작한 과거의 ‘야만족’ 및 ‘이민족’ 왕국들과 동로마 제국의 이웃에서 발흥하는 이슬람 등 새로운 문화와의 관계 속에 로마사를 서술하겠다는 점이었다.

기번의 이런 편집 방향 덕분인지 [로마제국 쇠망사 5]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동로마제국의 역사나 황제들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속세의 권한을 얻기 위하여 무진장 애쓰던 교권(교황)의 노력이었다. 서양의 중세를 일컫는 ‘신권(神權)에 의한 사회 전반에 대한 지배’라는 표현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물질적, 정신적 기틀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는 셈이다. 둘째는 이슬람교의 발흥이다. 알라를 유일신으로 따르는 이 신흥종교는 최초 발원지인 아라비아 반도는 물론이고 아프리카 북부와 스페인, 인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휩쓸었고, 궁극적으로는 ‘로마사’의 종언을 울리는 역사적 역할을 담당한다.
[로마제국 쇠망사 5]는 읽는 내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는 노(老)제국 로마와 떠오르는 새로운 역사의 주역들 사이의 대조를 느끼게 해 준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유럽의 프랑크족과 게르만족이, 뒷부분에서는 아랍민족과 투르크인들이 로마와 대조되는 새로운 주역들이다. 이런 흥미진진한 대비 과정 속에서 동로마제국 쇠락의 원인이 단순한 ‘역사적 운명’이 아니라 황족을 비롯한 신하들의 도덕적 타락과 부패, 무능함, 점차 변질되기 시작하는 크리스트교의 세속적 권력 추구와 무관용성에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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