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CDP가 말썽이라, 수리를 맡기기 위해 as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서비스 기사님은 참 오래된 모델을 들어 적잖이 놀라움을 표시했고, 나는 그래도 서비스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기사님은 크게 개의치 않고, 그러면서도 정감담은 말씨로 가져오라하였고, 다행히 장소는 가까운 용산이었던지라, 버스타고 내리면 바로 있는 곳이라, 버스를 타고 다녀왔다.
오후의 버스 승강장은 참 한산했다. 아니 사실은 가득차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낙엽들이 승강장을 꽉 채우고 있었고, 코를 시큰하게 만드는 차가운 공기와 신선하게 공기를 나르는 바람이 지나치고 있었다. 그 바람중 몇은 나와 함께 버스를 탔고, 나와 함께 내렸다. 물론 돌아오는 길에는 그들을 느낄 수 없었지만, 지나간 바람만큼 또 신선한 그들과 함께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그중 몇몇과는 함께 내렸다.
지금은 어느 일본회사도 CDP를 정식수입하지 않고 이미 내 CDP는 이미 늙은 대로 늙었지만, 쉽게 내칠수도 없고 15년 가까이 된, 그래도 겉은 아직 젊어보이는 녀석과 조금은 더 함께하고 싶어 수리를 부탁한건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님에 따르면 다행히 렌즈에는 이상이 없다하고 다만 좀 더 알아봐야 하니 이따 연락을 주겠다고 하셨다. 인간에게 심장이 있다면, CDP에게는 렌즈가 있는 터라, 렌즈가 별 문제가 없다는 건 참으로, 너무나 안도되는 말이었고(비용은 나와봐야 알지만) 이런 시큰한 날씨에 잘 어울리는 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밑에서 간단하게 라면을 먹고 나와 돌아가는 길은 좀 더 낯설었다. 항상 그렇게 지나다니던 거리인데, 걷는 걸음 한 걸음이 낯설었다. 아마도 그 시간에 비취는 햇살이 낯설었고, 계속 지나치게 되는 바람도 내겐 낯설었지 싶었다. 오는 길에는 브로콜리너마저의 노래를 들었는데, 이 미친세상이라는 가사가 참 와닿았다. 오늘 날씨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오늘 점심은 참 행복했다. 햇살이 차갑게 부셔 눈물이 나도 이상할 것 없을 점심이었지만, 그 기분마저도 오늘과 잘 어울렸고, 오늘 점심은 누구인지는 몰라도 오직 나를 위해서만 마련해 준 신비로운 시간 같았다. 어떤 교회나 성당에서도 느끼지 못하던 경건함과 경외로움과 경의로움이 느껴진 오후였다. 눈과 코, 그리고 얼굴과 손가락이 아직도 좀 시큰한, 그런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