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페스트>는 카뮈가 처음 작품을 어렴풋이 구상하고 집필하여 출간하기까지 8~9년이 소요된 장편소설이다. 물론 그 중간에 이방인이나 또다른 희곡들을 썼으니 이 작품을 위하여 피땀어린 세월을 지냈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작가수첩에 기록된 것을 보면 카뮈가 이 한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오랜 기간 수많은 경험과 사유를 메모하고 자신의 글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헤맸다는 것은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에게 좋은 작품이 세상에 나가 빛을 본다는 것에는 행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것엔 동의하지만, 좋은 작품을 쓰는 단계에서는 행운이란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 같다. 좋은 작품은 작가로서의 고투를 당연시하는 자세와 성실이라는 덕목을 갖춰야 가능한 것이다. 말은 거짓을 능숙하게 표현할 수 있어도 글은 작가의 재능과 태도와 성실성을 그대로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글이 곧 그 사람이요, 인생이라고 많은 문인들이 이미 설파해 놓지 않았던가. 하긴 인생 자체가 거저 얻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글을 쓰려면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어느만큼 쓸 수 있는지 어느 정도는 성찰할 수 밖에 없다.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그래서 철학자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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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는 일찍이 세 개의 부문으로 나뉘어 작품을 쓰고자 기획했다는 데, 첫째는 부정의 작품들, 둘째는 긍정의 작품들, 세번째는 사랑의 작품들로 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 중 부정의 작품들 중 소설로는 <이방인>을, 긍정의 작품 중 소설로는 <페스트>를 지어냈다. ㄱ러나 사랑의 작품들은 쓰지 못했다. 그가 너무나 일찍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천재적인 작가의 죽음은 지금도 못내 아쉽게 느껴진다.
그리고 프랑스의 작가들은(대다수는 아니겠지만) 글쓰기에 앞서 일종의 자기 생의 전체를, 작가로서 살아갈 생의 전체에 대해 어떤 밑그림을 그리고 기획하는 것 같다. 발자크가 그랬고 에밀졸라도 그러했으니 다른 여타의 작가들도 혹 비슷하지 않았을까.
카뮈는 이 <페스트>라는 텍스트에 소설이 아닌 연대기라는 장르를 이름 붙였다. 아마 이 작품이 오랑이든 어디에서든 실제 일어난 일처럼 느끼게 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된다. 이런 장르로 독자들이 속아주기를 바란만큼(알면서도 속아주기를)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서술자 역시 끝까지 자신은 객관적인 상황과 정황들을 기록하겠다고 다짐하고 글을 시작한다. 이런 장치들이 사실은 작품을 읽을 때 나름의 진지함과 어떤 긴장을 느끼게 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금 깨달았다. 카뮈는 이방인에서도 그렇지만 작품마다 어떤 전략을 짜놓고 그것을 그대로 실행한다. 독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주지시키기 위한 전략.....
<페스트>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서로 조금씩 다르고 대비되며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을 대표하기도 하고 이끌어가기도 한다.
의사인 베르나르 리유는 마지막에 드러나지만 이 작품의 서술자이다. 그는 페스트가 처음 오랑에 나타나면서부터 끝까지 한 번도 그것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직분 그대로 최선을 다하는 의사이다. 그는 페스트를 치료하고 병의 유무를 판단하는 임무를 완수한다. 가끔 그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내면으로는 동요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절제를 잃지 않는다. 그는 영웅이라기보다 현실주의자에 가깝다. 하지만 누구라도 이 작품의 중간쯤에 독서가 다다르면 그가 진정한 영웅이며 성인에 다다른 인물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로선 이 점이 <페스트>의 장점이자 무언가 석연치 않은 단점으로 여겨진다. 의사 리유만큼 완벽한 인간이 있을까. 냉정과 온정이 함께하고 성실과 겸손과 결단과 안으로 흐르는 성찰과 지고함까지..... 이 정도의 인간은 세상에 없을 것 같다. 한번이라도 절망하고 미끄러지는 그를 보여주는 게 더 이 작품에서 득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어쨋든 내용만으로 보면 그는 너무나 훌륭한 인간인데, 마지막은 조금 비장하다. 우정을 나눴던 친구 타루가 죽고 아내가 죽고, 그는 외로움의 바다에서 헤어나오기 힘들 것이다.
장 타루, 그는 여행객으로 오랑에 왔다가 우연히 페스트에 발이 묶인다. 그러나 그는 이 도시를 떠나려고 애를 쓰지도 않거니와 하릴없는 사람처럼 자질구레한 일들을 기록한다. 그는 고양이에게 침을 뱉는 놀이를 즐기는 노인을 묘사하고 거리의 작은 사건이나 특별하지 않은 인물들을 기록한다. 그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고 철학적인 사람이며 용기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용기있는 일을 하게 된다. 그는 보건대를 조직하고 리유의 진정한 친구가 된다. 그는 어느 밤, 해수병 노인의 집 이층 테라스에서 리유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에게 페스트는 새로운 병이 아니라, 그 자신이 짊어진 짐 그 자체가 페스트인 것이다. 그의 과거는 그에게 바로 페스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보건대를 조직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하고 리유와 친구가 된 그 밤, 둘은 바다를 찾아 밤해수욕을 한다. 이 장면이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기억된다.
파리에서 취재차 온 신문기자, 레몽 랑베르.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져 있을 수 없다는 감정에 사로잡혀 불법적인 루트를 통해서라도 이 도시를 떠나고자 각고의 노력을 펼친다. 그러나 여러 건달같은(범죄자같은) 사람들을 소개받고 다시 만나면서 탈출은 생각보다 어려워진다. 끝내 랑베르는 도시의 경계인 문 가까이에서 유숙하게 되고 탈출할 시간이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으로 리유를 만나러 간 자리에서 자신의 결심을 바꾸고 보건대의 일을 함께 하게 된다.그는 말한다. 자기만 행복해진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이 랑베르의 감정은 누구나 한 번 쯤 느껴봤음 직한 일일 것 같다. 행복해지고 싶지만, 내 주위 사람들이 힘겨운 걸 알고 있을 때, 편치 않은 마음, 왠지 거리끼게 되고 민망스럽고 그래서 차라리 행복을 누리기보다는 상심하게 되는 양심적인 인간의 마음. 페스트가 물러나고 오랑시가 닫혔던 문을 연 날,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플랫폼에서 뜨거운 만남을 갖는다. 그는 환희에 찬 현실을 맞이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긍정적이고 생기있는 인물이다.
시청 서기 조제프 그랑. 특별한 희망이 없어 보이는 그랑은 초라하고 가난하고 늙은 남자다. 사랑했던 여자는 젊어서 그의 곁을 떠났다. 그는 아직도 임시직 서기일 뿐, 어떤 것도 내세울 게 없는, 자신에 대한 표현조차 서툰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일을 끝내고 퇴근하는 즉시 보건대에 와서 숫자를 쓰고 전달하는 일을 맡는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일을 밤마다 되풀이한다. 그는 언어를 고르고 그것을 쓰고 다시 고쳐쓰는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어느날, 열에 들떠 리유와 타루에게 자신이 쓴 문장을 읽어달라고 한다. 아마도 그 문장은 그가 젊어서 떠나보냈던 잔을 향한 문장같다. 문장은 단 한 문장. "5월 어느 아침, 날씬한 여자가 밤색의 말을 타고 꽃이 가득 핀....."(정확치 않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이 문장을 쓰기 위해 이 늙은 서기는 그렇게도 오랫동안 밤마다 열중했던 것이었다. 우습기도 하지만 왠지 눈물겨운 장면들이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었고, 역시 작가인 카뮈는 초라한 예술가적인 이 인물을 특별히 사랑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이 그랑을 잊지 않고 싶다. 불어로 '그랑'이라는 말은 크다는 의미이다. 가장 정직하고 겸손하며 성실한 사람, 잇속에 밝지 않고 예술적인 삶을 사는 사람, 카뮈는 그래서 이 사람에게 그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리라.
오랑의 카리스마 파늘루 신부. 처음 페스트가 침투했을 때, 그는 사람들의 죄악이 페스트를 불러들였다고, 그래서 회개하고 다시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설교한다. 그러나 그는 선의의 인간이었다. 보건대에서 일하기를 자청하고 오통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로 죽어갈 때, 진정으로 통분하며 절망한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하느님을 끝까지 의지하며 죽는다. 인간의 불행에 아파하면서도 신을 저버리지 못하는 사제의 모습은 안스러움과 또다른 의미에서 신앙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만든다. 사제로서의 삶도 훌륭하고 인간적인 삶도 인간다웠다고 평하고 싶다.
범법자 코타르. 이 인물을 지나칠 수 없다. 코타르는 이 작품에서 가장 특이한 사람이고 부정적인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 자살을 시도하였다가 그랑에 의해 구해진다. 그는 늘 불안하며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랑에 페스트가 만연하자 그의 맘은 편안해지고 만족스러워진다. 그는 모든 시민들과 정반대의 일상을 즐기게 된다. 모두가 죽음 앞에 있고 도시 전체가 불행에 빠지자 거기서 안도를 느끼는 것이다. 그는 이제 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페스트가 물러가자 경찰은 그를 체포한다. 도시는 페스트가 소멸되자 자신들의 직분에 충실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어떤 죄를 지었기에 범법자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자신이 지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페스트 덕분에 몇 달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그 죄에 대한 처벌을 받기 전에는 끝까지 남아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에서 자신이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항상 책 한 권을 읽고 느끼는 바이지만 한 번으로는 독서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감상과 특별한 깨달음, 또 좋은 문장들과 여러 장치들에 대한 배움이 한 번의 독서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넓은 바다에서 헤엄을 쳐 육지까지 도달해야 하는 것 같은 황망스러움과, 스스로에 대한 의무는 무겁고 여유없음은 부산스럽기만 하다. 그래도 또 다음 책을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