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18년 4월

 

 

제목에 대한 추측은 내가 얼마만큼 상상력이 풍부한가보다는 그동안 쌓인 나의 직간접적인 학습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내 상상력은 빈곤하며, 살면서 나의 내면에 적재된 학습결과는 너무 일반적이고 고루한 면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유럽의 교육'이라는 제목에 대해 나는 정말 '교육'을 생각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배우고 익히는 '교육'말이다. 하지만 <유럽의 교육>은 전혀 다른, 전쟁을 통해 인간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비인간적인 상황을 통해 역설적으로 배우게 되는 역사에 대한, 인간에 대한 학습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로는 가장 확실하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 효과는 가장 극대할 수 밖에 없는 처절한 전쟁을 통해서....

 

얼마 전 ebs에서 방영한 쉰들러 리스트를 본 뒤라서 이 책의 내용이 더 깊게 내 가슴에 패인 기분이다. 전쟁의 참상은 한두 가지로 요약할 수 없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건 인간에 대한 살상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비인간성의 횡행이다. 이차대전에서 독일의 나치는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을 일괄적으로 살육했다. 그리고 그 만행은 유대인에게만 가해진 게 아니었다. 자신들이 침략했던 대부분의 나라에서 독일군은 정복자로 행세했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이 벌어졌고, 이 <유럽의 교육>은 그 중에서도 폴란드에서의 항독을 다루고 있다. 폴란드에서의 레지스탕스 운동은 당시  어느나라에서보다 처절했다고 한다. 로맹가리는 이 책에서 1942년 9월부터 다음에 봄이 오기 직전까지, 폴란드 수하르키의 깊은 산 속에서 활동하는 일명 '빨치산'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야네크는 열네살 소년. 그는 아버지가 마련한 숲 속 은신처에서 감자로 연명하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아버지 트바르도브스키는 의사이고 그는 야네크의 두 형을 독일군에게잃었다. 며칠 이후로 아버지는 다시는 야네크를 찾아오지 않는다(독일군과 싸우다 죽었을 것이다).  야네크는 빨치산을 찾아 그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빨치산들은 숲 속 어딘가에 흩어져 있고 그들은 몇 명씩 분대를 이루어 추운 겨울을 지나고 있다. 빨치산 동지들은 나이나 직업이 제각기 다르고 성향 또한 다르다. 이들 가운데서 야네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심부름 같은 자잘한 일들을 하며 그들의 일원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는 숲속 생활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여러 에피소드와 인물들에 의해 배우게 된다. 종내는 빨치산 어른처럼 그도 독일군을 총살하게 된다. 그리고 소녀 조시아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조시아는 독일군에게 몸을 팔아 생활하고 때로는 스파이가 되어 정보를 빨치산에게 넘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조시아는 일종의 어떤 마비상태로 몸을 파는 것으로, 자신의 조건 자체에 대한 회의나 부정은 없었다. 그런 조시아가 야네크를 만나면서 자신의 몸을 깨닫게 되고 사랑을 느끼게 된다. 수많은 빨치산들이 죽고 또 적을 죽이고 질병으로 죽어간다. 죽음은 숲속에서 당연한 항독의 일환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슬퍼하거나 뒤돌아 볼 여력이 없다. 이 전쟁 상태, 만연한 죽음과 부조리한 역사를 야네크는 학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브란스키는 이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는 뼈마디까지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도 글을 쓴다. 그의 글은 산문, 소설이다. 그의 글은 전쟁을 고발하고 그러나 그걸 극복하고 뛰어넘어야 함을 호소하는 글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글에 타데크 흐무라는 '유럽의 교육'이라는 제목을 지어준다. 많은 빨치산들이 죽고 도브란스키도 죽음을 맞는다. 야네크에게 그는 '유럽의 교육'을 맡긴다.

에필로그에서 야네크는 폴란드의 육군 소위가 되어 숲을 찾아간다. 숲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개미들이 끝도 없이 행렬을 이루고 있다. 그 길에 야네크는 간직하고 있던 얇은 책을 놓는다. 개미들이 그 책 '유럽의 교육'을 넘어 끝없이 행군한다.

 

수많은 슬프고 기막힌 삽화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전쟁이 아니라면 그렇게 많은 비극적인 삽화들은 동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가슴이 막히고 울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지만 극단적인 상황하에서 그런 일들은 비일비재하고 당연한 것이 되어 아무도 울지 않는다. 비극적인 일들은 무딘 칼날 앞에서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지나치지만 인간 영혼에 소리없이 아우성없이 계속 쌓여간다. 그들은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다. 감상에 젖지않고 감정적이지 않기를, 희망 없이 희망하지 않기를, 눈물 없이 메마르게 비극을 처리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몇 번이나 울컥 눈물이 솟아나려 했다. 나의 생도 쉽게 울 수 없을 만큼 피폐하고 힘겨웠나보다.

 

야네크가 피아노 소리에 끌려 도심지에 갈 때마다 계단을 올라 몰래 피아노소리를 듣는 장면이 가슴 아팠다. 야네크에게 음악은 잠시 모든 것을 잊고 피안에 이르는 별다른 세계이다. 조시아를 끌고 피아노 소리를 듣기 위해 야네크가 노인을 총으로 위협하고,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피아노를 치는 묘사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독일 노인 슈뢰더와 폴란드 소년 야네크는 이렇게 만난다. 그들은 서로를 믿고 음악의 동지가 된다. 그러나 전시의 상황은 그들을 가만 두지 않는다. 노인은 독일 군부대를 향하는 트럭의 뒤에 탔다가 야네크가 끼인 빨치산의 습격을 받고 총살당한다. 슈뢰더는 죽어가면서 말한다. 나는 너를 믿고 있다고. 자기가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놔두고 가면 지나가는 농부가 자신을 잔혹하게 죽일테니 숲언저리까지 데려다달라고... 야네크가 노인을 나무 밑으로 데려가 그의 임종을 지킨다. 그가 죽자 독일군이 그를 찾을 수 있도록 시신을 길가로 데려다 놓는다. 너무 슬픈 광경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마지막을, 참혹한 사별을 한다.

야네크의 음악에의 애정은 또다른 유대인 소년 모니에크를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떠돌아다니는 여러 아이들의 집단에서 모니에크는 분더킨트라 불리며 그들에게 조롱과 놀잇감이 되어 있었다. 그런 그를 야네크가 감자 한 자루와 바꿔주고 숲으로 데려온다. 그러나 행복도 잠깐, 모니에크는 극한의 추위에 손의 감각을 잃어가고 끝내는 바이올린을 안은 채 죽게 된다. 울지 말라, 슬픔은 전쟁에서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이러니와 블랙코미디가 이어진다.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빨치산과 독일경찰을 넘나드는 부유한 상인 요제프는 숲에 식량을 가져다 주고 도시로 내려와 독일경찰에게도 뇌물을 제공한다. 그는 안녕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날 밤, 그는 독일 경찰을 위한 만찬을 마련하고 경찰관은 그의 아내를 찾는다. 그는 아내가 기관지염을 앓고 있으며 자신에게는 아이가 없다고 말한다. 경찰은 호의적인 태도로 요제프에게 대를 잇게 해주겠다고 한다. 요제프는 경찰이 시키는 대로 촛불을 켜들고 있어야 했고, 경찰은 그의 아내에게 아이가 생기도록 한다. 다음날 그의 아내는 빨치산을 찾아간다. 요제프는 매일 아내를 만나러 숲을 찾아온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이미 자신의 부모에게 가 있다. 어느날 크릴렌코가 말한다. '당신이 아버지가 되게 생겼어요!" 짖궂은 농담이었다. 악담. 요제프는 그길로 바로 외진 곳 외떨어진 나무에 목을 맨다.

늙은 변호사가 수류탄을 허리에 매고 폭탄이 가득 쌓인 독일트럭으로 차를 몰아 떠난다. 자신의 젊은 아내가 자신을 존경하고 숭배해서 결혼했으니, 그녀를 위해 당당해지고 싶다는 것이다. 빨치산 카지크는 어둠을 틈타 빌노의 늙은변호사(이제는 장렬히 전사한) 스타니슬라브 스타히에비치의 집을 찾아간다. 안에서는 기타소리와 독일어로 노래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카지크가 변호사의 죽음을 알리자 변호사의 젊은 아내는 설마, 언제요? 라고 말한다. 그녀는 슬플 겨를도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것 같다. 즉시 독일 남자가 현관으로 따라나온다. 젊은 여자가 말한다. 수선 맡긴 구두 때문에 온 사람이라고... 문이 닫히고 다시 기타소리와 독일군의 노랫소리가 새어나온다.

 

수없이 섬멸하는 이야기와 이야기들, 애틋하고 가슴이 찢기듯 애닯고 너무 비참해서 돌아설 수 밖에 없는 이야기들, 그럼에도 애도할 여유가 없는 레지스탕스의 몰인정한 시간들, 한데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밀도를 높여가는 이야기들, 이야기들. 

 

로맹 가리는 서사에 뛰어난 작가이다. 그의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으며 예술가의 자질이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오래 전에 느꼈고,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 또한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서사였다,

무엇보다 로맹 가리는 있는 그대로의 삶이 아닌 자신이 만든 삶을 살았던 사람 같다. 프랑스 외교관, 영화감독, 비행사라는 많은 직함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로맹 가리라는 이름 외에 세 번의 가명으로 낸 작품들의 진짜 작가, 24살 연하의 진 세버그와의 재혼, 그녀가 죽은  1년 후 66세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극과 신비와 용기가 뒤섞인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느껴진다. 그냥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의 지도를 기획하고 펼쳐서 그 길을 나아간 인간. 그리고  자신의 지도대로 나아가다 모든 것을 끝냈다고 느꼈거나 끝낼 때가 되었기에 스스로 자신의 지도를 말아버린 느낌....

언제 로맹 가리에 대한 평전을 읽고 싶다. 검색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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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스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페스트>는 카뮈가 처음 작품을 어렴풋이 구상하고 집필하여 출간하기까지 8~9년이 소요된 장편소설이다. 물론 그 중간에 이방인이나 또다른 희곡들을 썼으니 이 작품을 위하여  피땀어린 세월을 지냈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작가수첩에 기록된 것을 보면 카뮈가 이 한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오랜 기간 수많은 경험과 사유를 메모하고 자신의 글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헤맸다는 것은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에게 좋은 작품이 세상에 나가 빛을 본다는 것에는 행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것엔 동의하지만, 좋은 작품을 쓰는 단계에서는 행운이란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 같다. 좋은 작품은 작가로서의 고투를 당연시하는 자세와 성실이라는 덕목을 갖춰야 가능한 것이다. 말은 거짓을 능숙하게 표현할 수 있어도 글은 작가의 재능과 태도와 성실성을 그대로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글이 곧 그 사람이요, 인생이라고 많은 문인들이 이미 설파해 놓지 않았던가. 하긴 인생 자체가 거저 얻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글을 쓰려면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어느만큼 쓸 수 있는지 어느 정도는 성찰할 수 밖에 없다.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그래서 철학자가 돼야 한다. 

'

 카뮈는 일찍이 세 개의 부문으로 나뉘어 작품을 쓰고자 기획했다는 데, 첫째는 부정의 작품들, 둘째는 긍정의 작품들, 세번째는 사랑의 작품들로 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 중 부정의 작품들 중 소설로는 <이방인>을, 긍정의 작품 중 소설로는 <페스트>를 지어냈다. ㄱ러나 사랑의 작품들은 쓰지 못했다. 그가 너무나 일찍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천재적인 작가의 죽음은 지금도 못내 아쉽게 느껴진다.

 그리고 프랑스의 작가들은(대다수는 아니겠지만) 글쓰기에 앞서 일종의 자기 생의 전체를, 작가로서 살아갈 생의 전체에 대해 어떤 밑그림을 그리고 기획하는 것 같다. 발자크가 그랬고 에밀졸라도 그러했으니 다른 여타의 작가들도 혹 비슷하지 않았을까.

 

카뮈는 이 <페스트>라는 텍스트에 소설이 아닌 연대기라는 장르를 이름 붙였다. 아마 이 작품이 오랑이든 어디에서든 실제 일어난 일처럼 느끼게 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된다. 이런 장르로 독자들이 속아주기를 바란만큼(알면서도 속아주기를)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서술자 역시 끝까지 자신은 객관적인 상황과 정황들을 기록하겠다고 다짐하고 글을 시작한다. 이런 장치들이 사실은 작품을 읽을 때 나름의 진지함과 어떤 긴장을 느끼게 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금 깨달았다. 카뮈는 이방인에서도 그렇지만 작품마다 어떤 전략을 짜놓고 그것을 그대로 실행한다. 독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주지시키기 위한 전략.....

 

<페스트>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서로 조금씩 다르고 대비되며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을 대표하기도 하고 이끌어가기도 한다.

 

의사인 베르나르 리유는 마지막에 드러나지만 이 작품의 서술자이다. 그는 페스트가 처음 오랑에 나타나면서부터 끝까지 한 번도 그것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직분 그대로 최선을 다하는 의사이다. 그는 페스트를 치료하고 병의 유무를 판단하는 임무를 완수한다. 가끔 그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내면으로는 동요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절제를 잃지 않는다. 그는 영웅이라기보다 현실주의자에 가깝다. 하지만 누구라도 이 작품의 중간쯤에 독서가 다다르면 그가 진정한 영웅이며 성인에 다다른 인물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로선 이 점이 <페스트>의  장점이자 무언가 석연치 않은 단점으로 여겨진다. 의사 리유만큼 완벽한 인간이 있을까. 냉정과 온정이 함께하고 성실과 겸손과 결단과 안으로 흐르는 성찰과 지고함까지..... 이 정도의 인간은 세상에 없을 것 같다. 한번이라도 절망하고 미끄러지는 그를  보여주는 게 더 이 작품에서 득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어쨋든 내용만으로 보면 그는 너무나 훌륭한 인간인데, 마지막은 조금 비장하다. 우정을 나눴던 친구 타루가 죽고 아내가 죽고, 그는 외로움의 바다에서 헤어나오기 힘들 것이다.

 

장 타루, 그는 여행객으로 오랑에 왔다가 우연히 페스트에 발이 묶인다. 그러나 그는 이 도시를 떠나려고 애를 쓰지도 않거니와 하릴없는 사람처럼 자질구레한 일들을 기록한다. 그는 고양이에게 침을 뱉는 놀이를 즐기는 노인을 묘사하고 거리의 작은 사건이나 특별하지 않은 인물들을 기록한다. 그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고 철학적인 사람이며 용기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용기있는 일을 하게 된다. 그는 보건대를 조직하고 리유의 진정한 친구가 된다. 그는 어느 밤, 해수병 노인의 집 이층 테라스에서 리유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에게 페스트는 새로운 병이 아니라, 그 자신이 짊어진 짐 그 자체가 페스트인 것이다. 그의 과거는 그에게 바로 페스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보건대를 조직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하고 리유와 친구가 된 그 밤, 둘은 바다를 찾아 밤해수욕을 한다. 이 장면이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기억된다.

 

파리에서 취재차 온 신문기자, 레몽 랑베르.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져 있을 수 없다는 감정에 사로잡혀 불법적인 루트를 통해서라도 이 도시를 떠나고자 각고의 노력을 펼친다. 그러나 여러 건달같은(범죄자같은) 사람들을 소개받고 다시 만나면서 탈출은 생각보다 어려워진다. 끝내 랑베르는 도시의 경계인 문 가까이에서 유숙하게 되고 탈출할 시간이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으로 리유를 만나러 간 자리에서 자신의 결심을 바꾸고 보건대의 일을 함께 하게 된다.그는 말한다. 자기만 행복해진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이 랑베르의 감정은 누구나 한 번 쯤 느껴봤음 직한 일일 것 같다. 행복해지고 싶지만, 내 주위 사람들이 힘겨운 걸 알고 있을 때, 편치 않은 마음, 왠지 거리끼게 되고 민망스럽고 그래서 차라리 행복을 누리기보다는 상심하게 되는 양심적인 인간의 마음. 페스트가 물러나고 오랑시가 닫혔던 문을 연 날,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플랫폼에서 뜨거운 만남을 갖는다. 그는 환희에 찬 현실을 맞이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긍정적이고 생기있는 인물이다.

 

시청 서기 조제프 그랑. 특별한 희망이 없어 보이는 그랑은 초라하고 가난하고 늙은 남자다. 사랑했던 여자는 젊어서 그의 곁을 떠났다. 그는 아직도 임시직 서기일 뿐, 어떤 것도 내세울 게 없는, 자신에 대한 표현조차 서툰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일을 끝내고 퇴근하는 즉시 보건대에 와서 숫자를 쓰고 전달하는 일을 맡는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일을 밤마다 되풀이한다. 그는 언어를 고르고 그것을 쓰고 다시 고쳐쓰는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어느날, 열에 들떠 리유와 타루에게 자신이 쓴 문장을 읽어달라고 한다. 아마도 그 문장은 그가 젊어서 떠나보냈던 잔을 향한 문장같다. 문장은 단 한 문장. "5월 어느 아침, 날씬한 여자가 밤색의 말을 타고 꽃이 가득 핀....."(정확치 않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이 문장을 쓰기 위해 이 늙은 서기는 그렇게도 오랫동안 밤마다 열중했던 것이었다. 우습기도 하지만 왠지 눈물겨운 장면들이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었고, 역시 작가인 카뮈는 초라한 예술가적인 이 인물을 특별히 사랑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이 그랑을 잊지 않고 싶다. 불어로 '그랑'이라는 말은 크다는 의미이다. 가장 정직하고 겸손하며 성실한 사람, 잇속에 밝지 않고 예술적인 삶을 사는 사람, 카뮈는 그래서 이 사람에게 그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리라.

 

오랑의 카리스마 파늘루 신부. 처음 페스트가 침투했을 때, 그는 사람들의 죄악이 페스트를 불러들였다고, 그래서 회개하고 다시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설교한다. 그러나 그는 선의의 인간이었다. 보건대에서 일하기를 자청하고 오통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로 죽어갈 때, 진정으로 통분하며 절망한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하느님을 끝까지 의지하며 죽는다. 인간의 불행에 아파하면서도 신을 저버리지 못하는 사제의 모습은 안스러움과 또다른 의미에서 신앙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만든다. 사제로서의 삶도 훌륭하고 인간적인 삶도 인간다웠다고 평하고 싶다.

 

범법자 코타르. 이 인물을 지나칠 수 없다. 코타르는 이 작품에서 가장 특이한 사람이고 부정적인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 자살을 시도하였다가 그랑에 의해 구해진다. 그는 늘 불안하며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랑에 페스트가 만연하자 그의 맘은 편안해지고 만족스러워진다. 그는 모든 시민들과 정반대의 일상을 즐기게 된다. 모두가 죽음 앞에 있고 도시 전체가 불행에 빠지자 거기서 안도를 느끼는 것이다. 그는 이제 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페스트가 물러가자 경찰은 그를 체포한다. 도시는 페스트가 소멸되자 자신들의 직분에 충실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어떤 죄를 지었기에 범법자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자신이 지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페스트 덕분에 몇 달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그 죄에 대한 처벌을 받기 전에는 끝까지 남아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에서 자신이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항상 책 한 권을 읽고 느끼는 바이지만 한 번으로는 독서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감상과 특별한 깨달음, 또 좋은 문장들과 여러 장치들에 대한 배움이 한 번의 독서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넓은 바다에서 헤엄을 쳐 육지까지 도달해야 하는 것 같은 황망스러움과, 스스로에 대한 의무는 무겁고 여유없음은 부산스럽기만 하다. 그래도 또 다음 책을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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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아마 7,8 년 쯤 전(어쩜 10년 전인지도) <이방인>을 읽었었다. 당시에 나는 '이방인'의 명성과 위상은 알고 있었지만 그만큼의 휘황함을 이 책에서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저 카뮈의 문체와 서사가 독특하다, 뫼로소의 성격이 심하게 '쿨'하다, 정도였다. 감정이입은 전혀 되지 않았다. 단지 뫼르소가 아랍인을 바닷가 바위 옆에서 충동적으로 쏠 때의 상황은 이해되었었다. 강렬한 햇빛이 모든 것에 닿아 번쩍거리고  땀과 질식할 더위에 그는 의식의 끈을 놓친 거라고, 섬멸하는 의식이 문득 총을 잡은 거라고 느꼈었다.

 

다시  읽게 된 <이방인>,이 번 독서에서는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고 카뮈라는  작가에게 '이방인'이 없었다면 그의 명성과 그를 기리는 세계의 팬들이 결코 이 정도일 수 없었으리라는 느낌이다. 카뮈는 진정 '이방인'으로(다른 철학에세이와 희곡, 비평도 있으니 그걸 읽지 않은 상태로 너무 독단적인 결론이지만) , 단지 '이방인' 만으로도 기억될 작가군에 속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방인>은 1부와 2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그 유명한 어머니의 부고를 전보로 받는 묘사로 시작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뫼르소는 장례식을 다녀오고 연인 마리를 만나고 살라마노 영감을(스패니얼종의 개를 팔년 전부터 키우던 홀아비) 만나고 이웃집 남자 레몽 생테스를 만난다. 사실 뫼르소의 실제적인 불행은 이 음산하고 불건전한 레몽이 처음 시작지점을 만든다. 1부의 마지막 장면은 햇빛이 쨍쨍한 바닷가에서 다섯발의 총격을 한 뫼르소의 살인으로 끝난다. 아랍인의 죽음은 이방인에서 특별한 묘사나 설명없이, 단지 뫼르소의 사형을 언도받기 위한 매개로만 이용된다. 이런 면에서 나는 카뮈가 아랍인에 대한 어떤 경시를 갖지 않았나 조금 의심스럽다. 왜 하필 아랍인인가. 당시아랍인은 프랑스에서 경시되던 식민지국민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워낙 고전화되다보니 뫼르소가 아랍인을 쏜  게 가장 작품에 잘 어울린다는 착각마저 든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살인을 당한 사람이 프랑스인이든 알제리인이든, 또 다른 나라 사람이든 그건'이방인'의 작품에서 중요한 일이 아니니 말이다. 중요한 건 태양과 그 가차없는 빛과 뫼르소에 지나지 않는가 말이다. 어쨋든 내 생각으로는 아랍인들이 <이방인>을 읽을 때 드는 생각은 결코 우리와 같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2부는 뫼르소의 감옥생활과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1부와 다르게 자세히 기록되고 뫼르소의 성격이 이랬던가 싶게(이전의 그는 너무나 쿨했지만 이제 그는 그저 쿨한 성격이 아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어떤 관심을 보여준다. 하긴 죽음이 코 앞에 다가와 있으니 사람인 이상 그럴 수 밖에 없으리라. 그는 여러 번(1년 넘는 감옥생활 중) 법정에 나가게 된다. 하지만 그는 판사와 검사, 변호사가 원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심각할 정도로 정직하다. 그는 사회적인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이 살인사건이 아니라도 언젠가 어떤 일이 빌미가 되어 추방될 만큼 그는 사회부적응자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감정이 없는 인간, 괴이하고 냉정한 괴물로 치부한다. 법정은 점점 사건보다 그의 인간성을 강조하는 국면으로 나아간다. 그는 자신이 그들의 연극에서 제외되고 그들이 자신을 일방적으로 왜곡된 평가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그걸 바로잡을 권리는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교도소 부속사제가  회심을 권유한다. 이에 뫼르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분노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다. 자신은 신을 믿지 않으며, 닥쳐올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고 그것은 진리이며, 자신은 숙명을 받아들인다고, 사제의 멱살을 잡고 소리친다. 

그는 죽음을 기다리며 행복한(?) 나머지 감옥의 일상을 보낸다.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이 책의 총 페이지는 270페이지이니 마냥 얇은 책은 아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아이러니이다. <이방인>본문이 136쪽이니 텍스트가 반이고 나머지 반은 부록인 셈이다.

이들 부록 중에서 카뮈가 '이방인'의 주제를 자신의 입으로 가장 명철하게 보여주는 것은 "미국판 서문'이다. 카뮈는 이 글에서 뫼르소는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 가식이 없는 인간이며 한 군데도 어두운 구석을 남겨놓지 않는 태양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유죄를 선고받는다,라고. 작가의 말이니 당연히 명징한 주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나 또한 그렇게 느낀 것에 뿌듯하기도 하다. 살인을 옹호해서는 절대 안 되지만 나는 이런 뫼르소의 정직성에서만큼은 영웅적이라고 애정을 표하고 싶다.

또다른 부록으로는 로제 키요의<<이방인> 50주년 기념 논문>과 역자의 <작품해설>이 이어진다. 특히 김화영 교수의  57페이지를 아우르는 꽤 길고 세밀한 작품 해설은 <이방인>을 이해하기 쉽게 해석해주고 있으며, 텍스트를 구조적으로 탐색하는 데에 뛰어난 시각을 보여준다. 이 해설을 통해 작가의 글쓰기의 체계적 방법까지 알게 되었다. 역자 또한 글쓰기의 주체이며 독자들에게 작가 못지 않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방인>의 모두의 짧은 문장, 마지막 긴 한 문장, 수많은 소설 중에서도 이 작품만큼 유명하게 남은 문장은 몇 없으리라. 카뮈가 천재적인 작가인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이런 작품이 그의 젊은 나이에 탄생했다는 것은 숙명적인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일에 가끔 숙명적인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의 영역이 내려온 것일까, 아님 단지 인간의 걸음이 이끌려간 우연일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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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방.악마와 선한 신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지영래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이 책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권 째이다. 이 전집을 다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젊어서 왜 난 책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라는 회한이 요즘 정말 많이 든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 매일 절감한다. 책 한 권이 인생의 한 단면을 일깨워주곤 한다.

 

 이 책은 단연코 생각할 빌미를 제공한다. 사르트르의 철학이 무대를 얻어 구체적인 일상어로 표현된 희곡이다. <닫힌 방>은 그의 파격적인 일갈, "타인이 지옥이다"를 형상화한 작품이며, <악마와 선한 신> 또한 신은 죽었고(애초에 없었고),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한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이 작동시킨 작품이다.

 

 <닫힌 방>은 83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소극이지만 주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가르생은 死前에 반전운동 신문을 주간했으나 탈영하다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이네스는 우체국 직원이었으며 동성애자였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을 자살로 몰아넣고 끝내 그 애인과 가스사고로 죽었다. 또다른 젊은 여인 에스텔은 젊은 애인과 불륜 관계로 얻은 아이를 살해하고 폐렴으로 죽었다. 

 세 사람은 사후에 출구가 없는 방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는데, 그 곳은 벽난로 위에 청동상이 하나 있을 뿐, 창문도 없고 밤이 없는 낮만 지속되는 지옥의 세계이다. 그리고 중요한 사물이 등장하지 못하는데 바로 거울이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타인의 눈동자를 통해야만 하니 언제나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지옥의 또다른 면을(타인이 지옥인 이유의 증거) 일깨워준다.

 에스텔은 가르생을 원하고 가르생은 자신이 비겁하지 않다는 확신을 이네스에게서 얻어내기를 원하며 이네스는 가르생이 사라지고 에스텔과 단 둘이 있기를 원한다. 셋은 서로의 원하는 바가  일치하지 않을 뿐더러 자기에게 불필요한 한 사람이 사라지기를 원하지만 이 지옥의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다. 그 방은 출구가 없는 영원한 지옥이니까.

 '닫힌 방'은 지옥이 아니더라도 이 지상에 무수히 많이 존재하리라. 어쩌면 지금 도시의 대다수의 집들이 '닫힌 방' 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원하지만 완전히 가질 수 없고, 어쩌다 시작된 증오가 천정 아래 흐르는 공기 중에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타인은 지옥이다'는 사르트르의 직설. 그것은 영원한 인간의 화두일 것이다.

 

 

<악마와 선한 신>은 230페이지 정도이니 닫힌 방의 3배 가까이 되는 분량이다. 하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주인공인 괴츠의 변화무쌍한 이념이 놀랍도록 획기적으로 펼쳐진다.

 이야기는 16세기 독일 농민전쟁을 전후한 여러 사건을 소재로 했다고 한다. 대주교와 사제들, 제후들과 농민들, 부르조아들이 등장한다. 괴츠는 보름스의 영주 콘라드의 동생인데 사생아이다. 그는 악인이다. 그는 악을 행하는 것을 일종의 자부심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다 가난한 자들 편에 섰으나 사제들을 구하기 위해 그들을 배신하는 신부, 농민들 편에서 싸우는 급진적 혁명가를 만나게 된다. 괴츠는 그들과  언쟁을 벌이다 내기를 건다. 자신이 지면 선을 행하겠노라고. 그는 주사위게임에서 진다(사실은 그는 지는 쪽을 선택한다).

 그는 선을 행하기 위해 형에게 받은 유산인 땅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사랑을 전하려 한다. 그리고 '태양의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만든다. 하지만 반란군들에게 공동체는 파괴되고 그의 형제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다. 그는 어디에도 신이 없다는 걸 명징하게 확인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해아 할 일은 결국 인간을 향한 행위 밖에 남지 않았음을 자각하고 농민군을 지휘하게 된다.

 줄거리를 일일이 쓸수가 없다. 다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다. 하지만 괴츠의 변화과정은 명약관화하다. 악마의 편에 선 인간--선한 신의 편에서 최선을 다하는 인간--신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존재하는 것은 인간들뿐이니 인간을 향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자각하는 인간.

 

 사람이 몇 십 년을 산다고 할 때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변하기보다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심사숙고 후에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랴. 그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운명에 기대지 말고 현실에 주저앉지 말고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해야 간신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내 삶의 끝은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안된다. 삶은 언제나 주어지지만 최선의 삶은 내가 만들어 가야 한다.

 사르트르가 지금의 내 말을 들으면 빙그레 웃으며 자만할 것이다.

 

 사르트르-존재(실존)는 본질에 앞선다. 존재는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 나간다.

** 존재(실존)는 곧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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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83년 3월

 

 

 

 몇 년 전인지, 혹은 십 몇 년 전인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구토>를 읽으려던 당시 계획은 30페이지에도 이르지 못하고 작파되었었다. 왜 그렇게 사소한 일상이 어지럽게 나열되고 있는지, 사물들에게 무슨 원한이 있길래 그렇게 정신착란을 일으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읽을 수 있었다. 속도가 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들여다보고 다시 읽고, 끝까지 읽었다. 읽어냈다.

 어떻게 읽기가 가능했을까. 아무래도 그간의 독서의 이력도 있겠고 짧은 기간이지만 철학강의를 들었던 게 주효했던 것 같다.

 

 '구토'는 처음부터 실존주의를 그대로 소설화했다는 말로 설명하면 쉽다. 그래서 기존의 소설문법은 전혀 가동되지 않는다. 계속 사물을 보여주고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대신 그것의 사용가치나 본질은 이차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인간은 존재한다. 어느날 그 사람의 필요성(용도)을 배척하고 그를 본다면 그는 무엇일까. 로캉탱은 자신의 손과 발조차 이물스런 괴물로 보인다고 말한다.

 특히 공원 벤취에 앉아 마로니에 뿌리를 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 장면은 내게 확실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본질 앞에 존재하는 그 존재는, 뿌리라는 것을 망각한 상태의 존재는, 검고 울퉁불퉁하고 마디가 져서 그에게 공포심을 주는 무엇이었다. 그것의 어휘와 용법, 사람이 붙인 기호가 사라지자 그는 사물의 속성(본질,실체)에만 길들어졌던 것에서 깨어났다. 그는 존재하는 존재자체를 깨달은 것이다.

 

 특히 '여분의 존재'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나라는 인간도 풀도 어떤 동물도 꼭 필요한 몫이 있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어쩌다보니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없어도 상관없었을 존재들이다. 모든 존재는 여분의 존재이다.

 그러니 '여분'의 존재인 나는 그냥 말라비틀어져 죽어도 상관없다. 저 들의 풀 한포기든 두포기든 말라죽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존재는 살아있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거기에서 존재의 의미가 태어난다. 풀은 바람에 쓸리고 비에 맞아도 초록빛 몸을 다시 일으켜세워 싱싱한 풀의 향내를 낸다. 내 의미는 존재하는 동안 '여분'이 되지 않게끔 노력하는 것이 상수고 최선이다.

 

실존주의는 이렇게 '구토'를 통해서 내게 자신의 존재를, 그 의의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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