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18년 4월

 

 

제목에 대한 추측은 내가 얼마만큼 상상력이 풍부한가보다는 그동안 쌓인 나의 직간접적인 학습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내 상상력은 빈곤하며, 살면서 나의 내면에 적재된 학습결과는 너무 일반적이고 고루한 면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유럽의 교육'이라는 제목에 대해 나는 정말 '교육'을 생각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배우고 익히는 '교육'말이다. 하지만 <유럽의 교육>은 전혀 다른, 전쟁을 통해 인간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비인간적인 상황을 통해 역설적으로 배우게 되는 역사에 대한, 인간에 대한 학습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로는 가장 확실하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 효과는 가장 극대할 수 밖에 없는 처절한 전쟁을 통해서....

 

얼마 전 ebs에서 방영한 쉰들러 리스트를 본 뒤라서 이 책의 내용이 더 깊게 내 가슴에 패인 기분이다. 전쟁의 참상은 한두 가지로 요약할 수 없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건 인간에 대한 살상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비인간성의 횡행이다. 이차대전에서 독일의 나치는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을 일괄적으로 살육했다. 그리고 그 만행은 유대인에게만 가해진 게 아니었다. 자신들이 침략했던 대부분의 나라에서 독일군은 정복자로 행세했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이 벌어졌고, 이 <유럽의 교육>은 그 중에서도 폴란드에서의 항독을 다루고 있다. 폴란드에서의 레지스탕스 운동은 당시  어느나라에서보다 처절했다고 한다. 로맹가리는 이 책에서 1942년 9월부터 다음에 봄이 오기 직전까지, 폴란드 수하르키의 깊은 산 속에서 활동하는 일명 '빨치산'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야네크는 열네살 소년. 그는 아버지가 마련한 숲 속 은신처에서 감자로 연명하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아버지 트바르도브스키는 의사이고 그는 야네크의 두 형을 독일군에게잃었다. 며칠 이후로 아버지는 다시는 야네크를 찾아오지 않는다(독일군과 싸우다 죽었을 것이다).  야네크는 빨치산을 찾아 그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빨치산들은 숲 속 어딘가에 흩어져 있고 그들은 몇 명씩 분대를 이루어 추운 겨울을 지나고 있다. 빨치산 동지들은 나이나 직업이 제각기 다르고 성향 또한 다르다. 이들 가운데서 야네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심부름 같은 자잘한 일들을 하며 그들의 일원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는 숲속 생활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여러 에피소드와 인물들에 의해 배우게 된다. 종내는 빨치산 어른처럼 그도 독일군을 총살하게 된다. 그리고 소녀 조시아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조시아는 독일군에게 몸을 팔아 생활하고 때로는 스파이가 되어 정보를 빨치산에게 넘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조시아는 일종의 어떤 마비상태로 몸을 파는 것으로, 자신의 조건 자체에 대한 회의나 부정은 없었다. 그런 조시아가 야네크를 만나면서 자신의 몸을 깨닫게 되고 사랑을 느끼게 된다. 수많은 빨치산들이 죽고 또 적을 죽이고 질병으로 죽어간다. 죽음은 숲속에서 당연한 항독의 일환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슬퍼하거나 뒤돌아 볼 여력이 없다. 이 전쟁 상태, 만연한 죽음과 부조리한 역사를 야네크는 학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브란스키는 이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는 뼈마디까지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도 글을 쓴다. 그의 글은 산문, 소설이다. 그의 글은 전쟁을 고발하고 그러나 그걸 극복하고 뛰어넘어야 함을 호소하는 글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글에 타데크 흐무라는 '유럽의 교육'이라는 제목을 지어준다. 많은 빨치산들이 죽고 도브란스키도 죽음을 맞는다. 야네크에게 그는 '유럽의 교육'을 맡긴다.

에필로그에서 야네크는 폴란드의 육군 소위가 되어 숲을 찾아간다. 숲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개미들이 끝도 없이 행렬을 이루고 있다. 그 길에 야네크는 간직하고 있던 얇은 책을 놓는다. 개미들이 그 책 '유럽의 교육'을 넘어 끝없이 행군한다.

 

수많은 슬프고 기막힌 삽화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전쟁이 아니라면 그렇게 많은 비극적인 삽화들은 동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가슴이 막히고 울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지만 극단적인 상황하에서 그런 일들은 비일비재하고 당연한 것이 되어 아무도 울지 않는다. 비극적인 일들은 무딘 칼날 앞에서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지나치지만 인간 영혼에 소리없이 아우성없이 계속 쌓여간다. 그들은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다. 감상에 젖지않고 감정적이지 않기를, 희망 없이 희망하지 않기를, 눈물 없이 메마르게 비극을 처리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몇 번이나 울컥 눈물이 솟아나려 했다. 나의 생도 쉽게 울 수 없을 만큼 피폐하고 힘겨웠나보다.

 

야네크가 피아노 소리에 끌려 도심지에 갈 때마다 계단을 올라 몰래 피아노소리를 듣는 장면이 가슴 아팠다. 야네크에게 음악은 잠시 모든 것을 잊고 피안에 이르는 별다른 세계이다. 조시아를 끌고 피아노 소리를 듣기 위해 야네크가 노인을 총으로 위협하고,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피아노를 치는 묘사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독일 노인 슈뢰더와 폴란드 소년 야네크는 이렇게 만난다. 그들은 서로를 믿고 음악의 동지가 된다. 그러나 전시의 상황은 그들을 가만 두지 않는다. 노인은 독일 군부대를 향하는 트럭의 뒤에 탔다가 야네크가 끼인 빨치산의 습격을 받고 총살당한다. 슈뢰더는 죽어가면서 말한다. 나는 너를 믿고 있다고. 자기가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놔두고 가면 지나가는 농부가 자신을 잔혹하게 죽일테니 숲언저리까지 데려다달라고... 야네크가 노인을 나무 밑으로 데려가 그의 임종을 지킨다. 그가 죽자 독일군이 그를 찾을 수 있도록 시신을 길가로 데려다 놓는다. 너무 슬픈 광경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마지막을, 참혹한 사별을 한다.

야네크의 음악에의 애정은 또다른 유대인 소년 모니에크를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떠돌아다니는 여러 아이들의 집단에서 모니에크는 분더킨트라 불리며 그들에게 조롱과 놀잇감이 되어 있었다. 그런 그를 야네크가 감자 한 자루와 바꿔주고 숲으로 데려온다. 그러나 행복도 잠깐, 모니에크는 극한의 추위에 손의 감각을 잃어가고 끝내는 바이올린을 안은 채 죽게 된다. 울지 말라, 슬픔은 전쟁에서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이러니와 블랙코미디가 이어진다.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빨치산과 독일경찰을 넘나드는 부유한 상인 요제프는 숲에 식량을 가져다 주고 도시로 내려와 독일경찰에게도 뇌물을 제공한다. 그는 안녕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날 밤, 그는 독일 경찰을 위한 만찬을 마련하고 경찰관은 그의 아내를 찾는다. 그는 아내가 기관지염을 앓고 있으며 자신에게는 아이가 없다고 말한다. 경찰은 호의적인 태도로 요제프에게 대를 잇게 해주겠다고 한다. 요제프는 경찰이 시키는 대로 촛불을 켜들고 있어야 했고, 경찰은 그의 아내에게 아이가 생기도록 한다. 다음날 그의 아내는 빨치산을 찾아간다. 요제프는 매일 아내를 만나러 숲을 찾아온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이미 자신의 부모에게 가 있다. 어느날 크릴렌코가 말한다. '당신이 아버지가 되게 생겼어요!" 짖궂은 농담이었다. 악담. 요제프는 그길로 바로 외진 곳 외떨어진 나무에 목을 맨다.

늙은 변호사가 수류탄을 허리에 매고 폭탄이 가득 쌓인 독일트럭으로 차를 몰아 떠난다. 자신의 젊은 아내가 자신을 존경하고 숭배해서 결혼했으니, 그녀를 위해 당당해지고 싶다는 것이다. 빨치산 카지크는 어둠을 틈타 빌노의 늙은변호사(이제는 장렬히 전사한) 스타니슬라브 스타히에비치의 집을 찾아간다. 안에서는 기타소리와 독일어로 노래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카지크가 변호사의 죽음을 알리자 변호사의 젊은 아내는 설마, 언제요? 라고 말한다. 그녀는 슬플 겨를도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것 같다. 즉시 독일 남자가 현관으로 따라나온다. 젊은 여자가 말한다. 수선 맡긴 구두 때문에 온 사람이라고... 문이 닫히고 다시 기타소리와 독일군의 노랫소리가 새어나온다.

 

수없이 섬멸하는 이야기와 이야기들, 애틋하고 가슴이 찢기듯 애닯고 너무 비참해서 돌아설 수 밖에 없는 이야기들, 그럼에도 애도할 여유가 없는 레지스탕스의 몰인정한 시간들, 한데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밀도를 높여가는 이야기들, 이야기들. 

 

로맹 가리는 서사에 뛰어난 작가이다. 그의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으며 예술가의 자질이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오래 전에 느꼈고,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 또한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서사였다,

무엇보다 로맹 가리는 있는 그대로의 삶이 아닌 자신이 만든 삶을 살았던 사람 같다. 프랑스 외교관, 영화감독, 비행사라는 많은 직함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로맹 가리라는 이름 외에 세 번의 가명으로 낸 작품들의 진짜 작가, 24살 연하의 진 세버그와의 재혼, 그녀가 죽은  1년 후 66세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극과 신비와 용기가 뒤섞인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느껴진다. 그냥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의 지도를 기획하고 펼쳐서 그 길을 나아간 인간. 그리고  자신의 지도대로 나아가다 모든 것을 끝냈다고 느꼈거나 끝낼 때가 되었기에 스스로 자신의 지도를 말아버린 느낌....

언제 로맹 가리에 대한 평전을 읽고 싶다. 검색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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