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줄리언 반스의 책을 연이어 네 권 읽었다. "플로베르의 앵무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시대의 소음", "연애의 기억"...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에 대해서는 개인적 소감이지만 내용상의 미진함이(개연성 부족, 억지 꿰맞추기식의 전개와 논리 등) 맨부커상 수상이라는 타이틀을 무색하게 만든다고 평하고 싶다.
하지만 나머지 세 작품 전부에 대해서는 작품 각각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내용과 주제가 확연히 달라 작가의 넓고 깊은 세계가 드러나고 만다. 방대한 경험과 철학과 지식을 머리와 가슴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도화한 지성인이라 할 수 있겠다. 반스의 책은 장마다 밑줄그은 문장들이 너무나 많아서 다시 읽어보지 않고는 어디가 가장 좋았다는 말도 하기 힘들 정도이다. 밑줄을 긋고 그 문장들을 음미해보느라 독서시간이 더 걸렸다. 많은 걸 배우고 생각하게 한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과 사유가 과연 내 머리속에 자리잡았을까 또 드는 의문... 어쩌겠는가. 읽는 내내 그 사유를 따라간 것만으로, 그 소중한 추억으로 만족해야지. 아니다. 시간이 날 때 또 읽으면 된다. 그럼 내 머리나 가슴 어딘가에 몇 문장쯤은 남겨지겠지...
원 제목을 해석하면 이 책은 "단 하나의 이야기"쯤이 될 것이다. 거기에 거추장스러울 정도의 애정을 담아 좀 더 직역하면 "오직 하나의 이야기"라고 이름붙일 수도 있겠다. 비슷하지만 나로선 '오직'이 붙으면 더 이 소설에 적합하다고 여겨진다. 화자의 긴 인생에서 볼 때, 더욱 그렇다. 그는 오십 년 전의 일을 기억하고 반추하면서 나래이션화하고 있다.
열아홉 살 나이에 서른살이나 많은 나이의 유부녀를 만나는 기억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러브스토리치고 서술 방식이 녹록치만은 않다. 반스 특유의 서사 위주의 서술보다는 기억에 입각해 장면장면이 모자이크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늙은 화자의 회한어린 사유는 사랑의 보편적 감성과 감정을 의지하지만 한편으론 철학적이고 개성적인 정서가 계속 깔리고 덧씌운다.
폴은 대학 1년을 보내고 방학을 맞아 어머니의 권유로 테니스 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추첨식 혼합복식' 대회를 위해 제비로 짝을 정하는데, 서른살 더 나이많은 유부녀인 수전 매클라우드와 짝이 된다. 그녀는 상당히 테니스를 잘 치는 여자다. 그녀는 곧 그의 코치가 되고 함께 클럽을 나와 그녀의 집으로 놀러가는 짝꿍이 된다.
그는 곧 그녀의 언행에 매료되는데, 그녀는 누구보다 어떤 생동감을 가진 여자이다. 보통의 주부들과 다른, 그녀만의 독특하고 충분한 매력이 돋보인다. 그녀는 폴에게 자신은(자신들은) "다 닳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말할 때, 그 말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 속에 속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못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제 삼자처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녀의 성격이 어쩌면 평범한 부르주아 주부로서의 일상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전제를 독자는 미리 엿볼 수 있다.
폴은 서서히 그 집의 식객이 되고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폴과 수전은 2년(정확히는 1년 후쯤인지 잘 모르겠다) 후 도주자금을 챙겨 매클라우드 집을 떠나 헨리 로드에 허름한 집을 사고 그곳에서 동거하게 된다. 폴은 그녀와 살기 위해서는 견실한 직장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법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둘의 사랑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전에게는 남편인 매클라우드만이 아니라 폴보다 나이 많은 두 딸이 있다. 가끔 그녀는 매클라우드의 집을 다녀오고 어느 때인가부터 알콜중독자가 된다.그녀의 중독 증세는 점점 깊어지는데 폴은 여러 방법으로 그녀를 구하려 애쓴다. 어느 것도 그녀의 중독증세를 멈추지 못한다. 그는 조금씩 무뎌지려하지만 책임을 다하려 기를 쓴다. 그리고 그에게 여자친구가 생긴다. 새 여자친구는 수전 때문에 떠나간다. 그는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그에게 또 여자친구가 생긴다. 이번에는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이다. 그는 수전을 인정하고 수전을 위해 그들이 사는 집을 방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여자친구이며 동료는 수전을 떠나지 못하는 그를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없다. 그녀도 폴을 떠난다. 그는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활은 점점 악화일로를 향해 걷는다. 수전은 폴을 견디지 못한고 폴은 수전을 견디지 못한다. 폴은 헨리 로드의 집을 나와 작은 방을 얻는다. 그러나 사랑은 둘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무뎌지고 날카로워지고 아파지고 해어진다.
폴은 수전을 만나서 얼마 후부터 서서히 알게 되었다. 매클라우드는 수전에게 폭력을 가한 적이 많았고 그들 부부는 전혀 행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는 수전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고 구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구해주려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는 구해질 수 없다. 성장하고 있는 두 딸, 서른 살 어린 남자와의 동거, 남편의 폭력적 성향과 섹스없는 결혼생활이 그녀에게 각인시킨 아픔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절연될 수 없는 어떤 사회적 조건들, 그녀의 활기차고 개방적인 성향. 그녀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다.
그는 그녀를 구할 수 없음을 자각한다. 그리고 자신도 구해야 한다. 그는 외국으로 자원해서 일을 나간다. 수전의 딸에게 그녀를 넘겨준다. 이제 수전은 누군가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안되는 환자가 되어 있다.
그는 안정적인 사회인이 되었다. 그는 적당한 관계를 하고 적당한 선에서 헤어지는 남자가 되었다. 여러 여자들이 그의 곁을 스쳐갔지만 그는 어떤 여자와도 진정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어느날, 수전의 딸 마사의 전화가 온다. 어머니를 보러 오라고. 그 곳에서 혹시 그를 본다면 좀 나아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그는 그 곳으로 가기를 무서워한다. 정신병원에 수전이 있다.
그는 이제 노인이 되어간다. 수전의 마지막을 보러 간다. 수전의 이마는 찡그려져 있고, 그녀의 턱은 조금 앞으로 나와있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느끼고 자신은 그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영화같은 장면은 없다. 그녀는 그를 의식하지 못하고, 그는 수전의 한 손을 잡으려다 그만둔다. 그의 머리속에서 아주 잠깐 초록색 테두리를 두른 테니스 원피스를 입은 수전, 텅빈 해변에서 미소를 짓는 그녀 수전,오스틴의 기어를 바꾸다 요란한 소리가 나자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 수전.
하지만 곧 그는 자기도 모르게 차에 기름이 얼마나 남았는지, 주차장을 얼마나 빨리 찾을 수 있는지... 등을 궁금해하고 있다. 그는 일어서서 마지막으로 한 번 수전을 보고,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고.. "나오는 길에 접수대에 들러 가장 가까운 주유소가 어디냐고 물었다. 접수대 남자는 매우 친절했다."
이제는 노인이 된 화자는 자신의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세월을 반추하는데, 그 중에는 '단 한번 뿐인 이야기'가 누구에게나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친구 에릭에게도 수전의 친구 조운에게도, 수전의 남편 매클라우에게도. 자신의 부모들에게조차도. 단 한 번인 이야기가 있다고...
75쪽 수전이 폴에게 하는 대화체의 문단에 밑줄을 긋고 페이지 옆에 별 스티커를 붙여놓았다. 나중에 어디선가 꼭 필요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어쨌든 절대 잊지 마세요, 폴 도련님.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 대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고, 흐지부지되었을 수도 있고, 아예 시작조차 못 했을 수도 있고, 다 마음속에만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진짜에서 멀어지는 건 아니야. 때로는, 그래서 더욱더 진짜가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