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수십 년 전, 젊은 시절의 기억, 그 기억은 얼마나 당시의 사실에 근접해 있을까. 혹시 그 기억의 많은 부분이 구부러지고 색이 바래서, 이젠 펴질 수 없고 잔뜩 덧칠된 기억이라면 살아온 삶은 무엇으로 보증해야 하는가. 가상의 진실이 진짜처럼 생의 마지막에 늙은 노인을 조롱한다면 그의 인생은 헛된 공염불이라고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2011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이 소설은 노년에 접어드는 시점에 어쩌다 과거의 사건을 만난 남자 토니가 자신의 왜곡된 기억을 뒤집어야 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살아가고 있다. 겉보기에 그는 편안하고 적당히 혼자 사는 삶을 그런대로 의미있게 지내는 것 같다. 이혼한 아내 마거릿과는 가끔 만나 식사를 할만큼 격의 없는 사이이다. 그는 친구처럼 아내를 만나고 결혼한 딸 수지와도 잘 지내는 편이다.
어느날, 그에게 대학 때 여자친구였던 베로니카의 어머니 포드 여사의 유증이 전해진다. 500파운드와 대학시절 친구인 에이드리언의 편지가 유증이라고 한다. 40년 전, 베로니카는 토니의 연인이었다가 둘의 결별 이후에는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되었다. 토니가 베로니카와 헤어지고 몇 달 가까이 미국여행을 다녀와보니 그 사이에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했다는 놀라운 사실.... 그러나 토니와 친구들은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 사귀다가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철학적 사유로 그에 합당한 마지막을 택했을 거라고 생각했고 서서히 잊어갔다.
그러나 이 상황 때문에 40년 만에 베로니카를 만나게 되면서 그의 과거의 기억은 완전히 왜곡되었음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는 파렴치한 젊은 날의 사실을 은폐하고 정반대의 진실로 기억을 덮어버렸던 것이다.
이제 초로에 들어선 그에게 자신의 젊은 날의 불순한 편지는(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보냈던) 어이없는 행위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그는 회한을 곱씹고 자신의 편지 때문에 일어난 일 앞에서 사죄와 용서를 원한다. 하지만 자신의 편지는 그 시절 저주의 주문이 되었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경솔함과 부도덕함이 적나라한 젊은 시절 한 장의 편지. 그의 회한은 통렬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은 점점 변해간다. 남겨진 사람에겐 세월을 되짚을 수 있는 기억이라는 머릿속 공간이 있다. 수십 년 후, 그러나 기억은 오롯이 보존되지 않는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퇴색되고 변색되고 왜곡되어 있다. 그 때 나는 누구인가. 기억이 완전히 사라져버리면 그 때 나는 삶을 산 것인가, 죽은 것인가. 기억만큼 정체성에 깊이 관여하는 인간의 항목이 있을까. 뒤죽박죽 되더라도 자신을 믿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바른 삶을 살아야 오히려 기억을 잃어버려도 마음이편할 것 같다. 물론 치매 후에 마음 편하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잘 살고 볼 일이다. 어느 상황에서도 거짓되지 않게, 누군가에게 불행을 선사하지 않게, 행복하게 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