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K
돈 드릴로 지음, 황가한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3월
우리는 한 작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제로 k>를 읽고 난 후 드는 생각이다. 내게 이 작품은 썩 재미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작품성이 없다거나 주제가 안 보인다든가 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돈 드릴로가 미국 내에서 갖는 위상(미국현대작가 4인 중 한 명)에 비춰보면 좀 약하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어제 로쟈샘 강의에서 이 작품이 드릴로 작품에서 가장 최근작이고 그렇다면 팔순 노년의 작가에게서 나온 작품인 것을 알았다(그래서인지 작중에서 많은 문제가 언급은 됐지만 디테일이 부족하고 제대로 파헤치지 못한 면이 있다고).
나는 작품 외적인 부분을 일일이 참고하지 않고 오직 텍스트에만 집중하는 편인데, 그런 독서가 가끔 작품에 영향을 미친 작가의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작가와 작품 전체를 폄하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돈 드릴로가 이 작품을 2016년 발표했을 때, 그 전과 마찬가지로 많은 찬사와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그런 사실이 좀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전작들이 다 훌륭했다면 그의 가장 최근작인 <제로k>에 대한 나의 불만족스러움은 작가를 모르고 작품 하나에만 천착한 때문에 노작가의 큰 세계를 보지 못한 무지일 수 밖에 없다. 작가는 한작품 한작품을 생산하지만 결국 그 모든 작품들이 어떤 그만의 세계를 이루어내는 것이라고 보면 한 작품으로 전체를 확대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그렇다해도 작품 하나마다 주어지는 독립성, 그 작품 하나가 이루어내는 세계를 논할 때는 또 어쩔 수 없이 개별적인 안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어찌됐든 <제로 k>를 읽고 드는 심사는 재미는 별로 없었지만 생각할 게 많은 소설이었다는 것이다. 죽음과 삶, 영생과 필멸, 과학과 과학적 미신, 사랑과 사별, 이 세계의 폭력과(전쟁 등) 부조리, 그것을 극복한 후의 유토피아는 과연 가능할까, 등등
주인공 제프의 아버지 로스는 스스로 일가를 이룬 억만장자이다. 그는 첫번째 부인 매들린과 이혼하고 아티스와 살고 있다. 제프는 매들린과 로스의 하나뿐인 아들이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살고 어머니는 자신인 아들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제프는 아버지의 삶을 따라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 아버지 로스는 제프에게 자신들, 즉 다발경화증 외에도 몇 가지 장애를 갖고 있는 아내 아티스와 자신이 냉동보존될 계획이니 증인이 돼 달라고 한다. 제프는 컨버전스(우크라이나 사막에 있다)에서 아티스가 냉동보존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그러나 로스는 혼란을 겪고 자신은 남은 삶을 버리지 못한다.
냉동보존을 위해서는(이 상황은 뒤에 역자의 설명을 참조) 혈액을 다 빼고 그대신 글리세린을 주입해야하며, 오랜시간 냉동하기 위해 장기를 다 적출해 따로 보관해야하며 뇌까지 따로 보존해야 한다. 결국 장기와 뇌를 따로 보관한다면 남은 몸은 순수한 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자아와 정신과 감각마저 잃은 마네킹에 불과하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과연 몇 백년 후에라도 소생이, 부활이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은 도박, 그냥 도박에 불과하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현재에도 일부 거부들이 그 기술을 지원하고 있으며, 정말 보존되던 냉동인간들이 부활할 수 있다면 대박 중의 대박을 치게 된다고.... 너무나 매력적인 사업이라고....
2년이 흐른 후, 아버지 로스는 제프에게 다시 컨버전스에서 자신의 냉동보존을 위한 증인이 돼달라고 한다. 제프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컨버전스에 가게 되고 거기서 아버지를 죽음과 비슷한 냉동보존하는 과정을 지키게 된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제프는 그 곳에서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지구 위의 절망적인 상황들(전쟁이나 테러 등)을 바라보다 한 소년병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런데 그 소년은 다름아닌 자신의 연인인 에마의 아들 스택. 제프의 연인 에마는 오래 전 전남편과 우크라이나에 갔다가 어린아이였던 스택을 입양했었던 것이다. 스택은 평범한 아이들과는 다른 소년으로 성장했는데, 어떤 신성하고 광기에 찬 의무감을 숨긴,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일면을 지닌 소년이었다. 그 스택이 얼마 전 사라져서 에마와 전남편은 아들을 찾고 있었는데 그 소년이 우크라이나 내전에 자원해서 총격 세례를 받고 죽어가는 영상이 컨버전스 스크린에 영상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제프는 그 자리에 붙박여 서 있다. 영상은 끝났다.
로쟈 샘의 강의의 일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역사 속에서의 어린 소년 스택의 죽음, 병에 의한 자연사 바로 직전에 냉동보존을 택한 아티스의 죽음, 아직 활력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아내의 곁에 가기 위해 냉동술을 택한, 아주 개인적인 로스의 죽음(죽음이 아니라 잠시 생명을 정지시킨).
이 각기 다른 세 개의 죽음을 지켜본 제프의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길을 가게 될까.
소설에서 제프는 에마와 헤어지게 된다. 에마는 전남편과 재혼하고 제프는 그들에게 스택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 제프는 새로운 직장생활을 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는 어떤 인간의 눈을 가지게 되었을까....
평범한 독자인 나로서는 그가 허무주의를, 그러나 완벽한 허무주의는 오히려 일상을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을 종내는 갖게 되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허무함을 이기는 건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 의무를 지우니까....
나는 과학적 미신이라는 말을 이번에 처음 강렬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종교가 나름의 미신적이고 신비적인 이념이라면 냉동보존술 또한 과학적 미신이라고 생각된다. 미신이 그렇다고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자신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건 획기적인 일이고 주체적인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신앙보다 냉동보존술이 더 어리석게 보이는 건 과학적 사고가 안 되어서일까. 아니면 형이상이 습관에 배어서일까. 어쨋든 나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절대 냉동상태로 몇 백 년 커다란 얼음덩이 속에 갇혀있긴 싫다. 비록 그 순간을 내가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과연 냉동상태에서 해제되고 새 삶이 시작되었을 때, 그 때 그는 자신일까, 자신이 아닐까. 자아라는 것이 그에게 있을까. 그는 한 생명인 건 분명하지만 인간일까, 동물일까. 아기일까. 그냥 마네킹일 뿐일까. 새 생명이 된 그는 주입된(소설에서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자아상을 뇌에 주입한다고 하던데) 그대로의 완전한 인간이 돼 있을까. 그는 누구와 살게 되고 어떤 상황과 어떤 지리적 위치에서 살아야 할까, 등등.....
또다른 문제들. 몸은 뇌와 분리되고 나면 나일까, 아닐까. 몸과 분리된 뇌는 나일까, 남일까. 그냥 객관적인 어떤 동물일까. 나의 뇌와 어떤 아름다운 신체와 결합하게 된다면 나는 사라진 것일까. 남은 것일까.
자아만 남은 뇌는 성별이 가능할까. 자아만 남은 뇌는, 또는 뇌가 사라진 몸은 역사 속의 인간일까, 그저 개별적인 기계같은 동물일까.
하긴 뇌 속의 데이터만 뽑아서 몸은 행할 수 없는 우주여행같은 무한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어떤 의미있는 일을 할 수도 있단다. 그건 전 인류를 위해서는 필요하고 유용한 시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외, 냉동보존술은 너무나 끔찍한 엽기적인 범죄로 보인다.
미국인들의 의식--개척정신,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 등은 냉동보존술을 가능하게 한 것 같다....
카뮈의 주제의식--죽음은 타자. 부조리
필립로스의 선언--죽음은 부당하다
유발 하라리--기술은 자연력이 되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자본주의의 셀프진화, 이윤극대화의 방향으로 자기운동이 진행되어 그것을 정지시킬 수 없게 되었다)
위대한 개츠비 외--개명(자아 실현-자신이 원하는, 혁신하기 위한)
영국경험론--자아는 경험에 의해 형성된 것
칸트, 데카르트 등-- 무연고적 자아(코기토), 인식하는 순간 자아가 태어난다.
연고적 자아--관계, 혈연, 고국 등
나--냉동보존술은 흉악하고 무서울 뿐인, 과학적인 미신이다. ㅎㅎㅎ
생각할 게 너무 많고 위 문제들의 깊이를 도저히 단 1%도 설명하기 힘드므로, 그냥 강의시간에 쓴 것들을 하이픈으로, 찰나의 설명으로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