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 Ⅱ
돈 드릴로 지음, 유정완 옮김 / 창비 / 2011년 1월



안타깝게도 드릴로의 명작인 이 작품을 건성건성, 반은 읽고 반은 문단의 한두 문장만 읽고 건너뛰면서 줄거리만 대강 읽었다. 올 여름 수강할 강의가 네개나 되어 책에 집중할 시간이 없다. 당분간은 이런 식의 책읽기가 계속될 것 같아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각설하고, 그럼에도 독후감을 쓰고자 하는 것은 훌륭한 작품에 대한 예의에서가 아니라 그렇게 얼렁뚱당 읽은 책에서나마 길어낼 수 있는 최대치를 내 안에 저장하고 싶어서이다. 또  각설하고...


<마오2>는 정통소설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만 정통소설이라고 할 수도 없는 소설이다. 정통소설에서 보여주는 내밀한 주인공의 심리와 그를 둘러싼 배경, 인물이 사건을 향해가는 과정이 스케치도 제대로 되지 않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럼 드릴로는 자신의 글에서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 그는 모더니티한 글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는 실제 토마스 핀천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한다. 포스트라는 단어가 접두어로 붙을 때 나는 상당히 피곤한 증상을 만난다. 주목을 끌면서 흥미를 당기는 서사가 진행되지 않으니 계속 집중이 방해받고 짜증이 인다.  

하지만 일견 정통소설에 대한 미련을 접어두는 것도 내겐 합목적적인 일이 될 것이다. 더이상  과거, 정통, 전범이라는 말은 이 변화무쌍하고 다양다채로운 시대에는 능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방법과 형식을, 또는 내용까지도 혁신적일 수록 좋을 것이다. 드릴로에게 새로운 소설을 배우는 것은 어쩌면 더 유익한 일일지 모른다. 정통을 거부하라. 술술 풀리는 이야기를 구태하다고 느껴봐라.

오늘도 로쟈 선생님의 강의에서 들었던 내용을 간략히나마 옮겨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내가 읽으면서 짜증을 내었던 것들이 사실은 죄다 공부할 대상이었으니까...  나의 좁은 우물안 감상문보다 지성적인 전문 비평가의 가르침을 되씹는 게 훨씬 유익할 테니. 





제목의 '마오2'는 원본이 아닌 복제 이미지를 뜻한다. 워홀작품을 이해하면 알맞을 것이다. 워홀은 실크스크린에 마오를 대량으로 찍어냈다. 그리고 마오쩌뚱은 중국 전체를 '마오2' 라는 획일적이고 통일적인 대중(국민)을 만들고자 했다. 전체주의가 얼마나 다스리기 쉽고 지배자에겐 안전한 시스템인가.

동시에 워홀의 작품세계, 미술사로 건너가보면 모더니즘의 시대에는 더이상 예술이 존재하지 않는다. 못한다. 미술사의 종말, 예술(예술품)은 사라지고 예술철학만 기승을 부린다. 감각적인 작품들로 미술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뇌에서 나오는 철학이 미술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소설적 재현이 이 시대에 가능한가? 

퇴행의(개인은 축소되고 군중이 부각되며, 그 군중은 그러나 이용되는, 또는 테러가 기승을 부리는, 민주주의가 퇴행되는) 시대에 소설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 엄청나게 빠르고 강력한 매체들이 순식간에 강렬한, 이성을 마비시키는 뉴스와 아미지를 통용시키고 있다. 그러니 글을 읽는 노동이 필요한 소설이 가능하겠는가. 

그렇다면 아주 새로운, 색다른 소설이 탄생하든지, 소설이 죽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드릴로는 이렇게 재미없지만 그림만 떠오르고 메시지가 장중하게 난무하는 소설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냉전시대--탈냉전시대--테러시대

냉전시대에는 이념이, 탈냉전시대에는 탈이념이, 테러시대(현시대)에는 폭력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다.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을 움직일 힘이 있는 자들은 세상을 바꿀 마음이 없고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은 기득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테러 밖에 방법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해도 가해당사자가 아닌 선량한 사람을 인질로 잡고 그 목숨을 끝내 살하는 테러를 두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계의 부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20c는 군중, 대중의 시대. 개인은 쇠퇴하고 개성은 몰락한다. 한편에서는 이 군중들과 명확히 다른 엘리트들이 소수지만 건재한다. 이는 역사의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대중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적은 역사적으로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군중은 소비하는 주체로서 강화, 인식되고 노동하는 개인, 주체적으로 행위하는 개인으로서는 빛을 잃어간다. 현대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의 군중이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개인들은 "얇은 인간",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내면이 얇고 약한 인간이 되어간다. 두꺼운 내면을 가진 개인으로 성장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얇음'을 성찰하고 내면이 두꺼워지고 강해지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한 개인의 서사가 아닌 군중이 주인공인 소설도 있다. 정확한 인물이 설정되지 않고 목소리만 있는 소설, 이를 목소리 소설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이런 소설을 찾아봐야겠다. 그러나 이 소설은 개인의 자아와 정체성을 모티프로 하는 소설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한국의 소설계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아직도 소설이 'story' 에 머물고 있으며 'novel'로써의 역할, 문학적, 사회적 아우라를 발하지 못하고 있다. 소설은 전에도 있었고 후에도 있을 'story'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의미있는'novel'을 생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매체들에 밀려날 것이다. <소설의 운명>을 고심해야 한다.


돈 드릴로는 상당히 전위적이고 세련된 작가이다. 이 작품의 2부 어느지점부터는 그런 작가의 노련미와 세련미가 서서히 드러난다. 그렇다해도 모던함이 재미를 반감시키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매니아가 된다면 정말 배울 게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다음은 드릴로의 <화이트 노이즈>, 이번엔 정말 제대로 읽어야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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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7-19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 드릴로의 책들은 확실히 한국에서
저평가되고 있다느 느낌입니다.

lea266 2019-07-21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인기가 없는 것 같아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작품들이 사랑받기 힘든 건 재미가 없다는 면에서 어쩔수 없는 듯 해요 독자가 많지 않으면 저평가되는 것도 사실인거 같구요 하지만 마오2를 음미해 읽으면 나름의 매력이 분명히 있어요 아직도 한국의 독서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귀찮아하는 건 아닌지 ..... 나부터도 그렇거든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제로 K
돈 드릴로 지음, 황가한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3월






우리는 한 작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제로 k>를 읽고 난 후 드는 생각이다. 내게 이 작품은 썩 재미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작품성이 없다거나 주제가 안 보인다든가 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돈 드릴로가 미국 내에서 갖는 위상(미국현대작가 4인 중 한 명)에 비춰보면 좀 약하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어제 로쟈샘 강의에서 이 작품이 드릴로 작품에서 가장 최근작이고 그렇다면 팔순 노년의 작가에게서 나온 작품인 것을 알았다(그래서인지 작중에서 많은 문제가 언급은 됐지만 디테일이 부족하고 제대로 파헤치지 못한 면이 있다고). 

나는 작품 외적인 부분을 일일이 참고하지 않고 오직 텍스트에만 집중하는 편인데, 그런 독서가 가끔 작품에 영향을 미친 작가의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작가와 작품 전체를 폄하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돈 드릴로가 이 작품을 2016년 발표했을 때, 그 전과 마찬가지로 많은 찬사와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그런 사실이 좀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전작들이 다 훌륭했다면 그의 가장 최근작인 <제로k>에 대한 나의 불만족스러움은 작가를 모르고 작품 하나에만  천착한 때문에 노작가의 큰 세계를 보지 못한 무지일 수 밖에 없다. 작가는 한작품 한작품을 생산하지만 결국 그 모든 작품들이 어떤 그만의 세계를 이루어내는 것이라고 보면 한 작품으로 전체를 확대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그렇다해도 작품 하나마다 주어지는 독립성, 그 작품 하나가 이루어내는 세계를 논할 때는 또 어쩔 수 없이 개별적인 안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어찌됐든 <제로 k>를 읽고 드는 심사는 재미는 별로 없었지만 생각할 게 많은 소설이었다는 것이다. 죽음과 삶, 영생과 필멸, 과학과 과학적 미신, 사랑과 사별, 이 세계의 폭력과(전쟁 등) 부조리, 그것을 극복한 후의 유토피아는 과연 가능할까, 등등

주인공 제프의 아버지 로스는 스스로 일가를 이룬 억만장자이다. 그는 첫번째 부인 매들린과 이혼하고 아티스와 살고 있다. 제프는 매들린과 로스의 하나뿐인 아들이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살고 어머니는 자신인 아들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제프는 아버지의 삶을 따라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 아버지 로스는 제프에게 자신들, 즉 다발경화증 외에도 몇 가지 장애를 갖고 있는 아내 아티스와 자신이 냉동보존될 계획이니 증인이 돼 달라고 한다. 제프는 컨버전스(우크라이나 사막에 있다)에서 아티스가 냉동보존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그러나 로스는 혼란을 겪고 자신은 남은 삶을 버리지 못한다. 


냉동보존을 위해서는(이 상황은 뒤에 역자의 설명을 참조) 혈액을 다 빼고 그대신 글리세린을 주입해야하며, 오랜시간 냉동하기 위해 장기를 다 적출해 따로 보관해야하며 뇌까지 따로 보존해야 한다. 결국 장기와 뇌를 따로 보관한다면 남은 몸은 순수한 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자아와 정신과 감각마저 잃은 마네킹에 불과하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과연 몇 백년 후에라도 소생이, 부활이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은 도박, 그냥 도박에 불과하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현재에도 일부 거부들이 그 기술을 지원하고 있으며, 정말 보존되던 냉동인간들이 부활할 수 있다면 대박 중의 대박을 치게 된다고.... 너무나 매력적인 사업이라고....


2년이 흐른 후, 아버지 로스는 제프에게 다시 컨버전스에서 자신의 냉동보존을 위한 증인이 돼달라고 한다. 제프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컨버전스에 가게 되고 거기서 아버지를 죽음과 비슷한 냉동보존하는 과정을 지키게 된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제프는 그 곳에서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지구 위의 절망적인 상황들(전쟁이나 테러 등)을 바라보다 한 소년병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런데 그 소년은 다름아닌 자신의 연인인 에마의 아들 스택. 제프의 연인 에마는 오래 전 전남편과 우크라이나에 갔다가 어린아이였던 스택을 입양했었던 것이다. 스택은 평범한 아이들과는 다른 소년으로 성장했는데, 어떤 신성하고 광기에 찬 의무감을 숨긴,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일면을 지닌 소년이었다. 그 스택이 얼마 전 사라져서 에마와 전남편은 아들을 찾고 있었는데 그 소년이 우크라이나 내전에 자원해서 총격 세례를 받고 죽어가는 영상이 컨버전스 스크린에 영상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제프는 그 자리에 붙박여 서 있다. 영상은 끝났다. 


로쟈 샘의 강의의 일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역사 속에서의 어린 소년 스택의 죽음, 병에 의한 자연사 바로 직전에 냉동보존을 택한 아티스의 죽음, 아직 활력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아내의 곁에 가기 위해 냉동술을 택한, 아주 개인적인 로스의 죽음(죽음이 아니라 잠시 생명을 정지시킨).

이 각기 다른 세 개의 죽음을 지켜본 제프의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길을 가게 될까.

소설에서 제프는 에마와 헤어지게 된다. 에마는 전남편과 재혼하고 제프는 그들에게 스택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 제프는 새로운 직장생활을 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는 어떤 인간의 눈을 가지게 되었을까....

평범한 독자인 나로서는 그가 허무주의를, 그러나 완벽한 허무주의는 오히려 일상을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을 종내는 갖게 되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허무함을 이기는 건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 의무를 지우니까....


나는 과학적 미신이라는 말을 이번에 처음 강렬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종교가 나름의 미신적이고 신비적인 이념이라면 냉동보존술 또한 과학적 미신이라고 생각된다. 미신이 그렇다고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자신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건 획기적인 일이고 주체적인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신앙보다 냉동보존술이 더 어리석게 보이는 건 과학적 사고가 안 되어서일까. 아니면 형이상이 습관에 배어서일까. 어쨋든 나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절대 냉동상태로 몇 백 년 커다란 얼음덩이 속에 갇혀있긴 싫다. 비록 그 순간을 내가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과연 냉동상태에서 해제되고 새 삶이 시작되었을 때, 그 때 그는 자신일까, 자신이 아닐까. 자아라는 것이 그에게 있을까. 그는 한 생명인 건 분명하지만 인간일까, 동물일까. 아기일까. 그냥 마네킹일 뿐일까. 새 생명이 된 그는 주입된(소설에서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자아상을 뇌에 주입한다고 하던데) 그대로의 완전한 인간이 돼 있을까. 그는 누구와 살게 되고 어떤 상황과 어떤 지리적 위치에서 살아야 할까, 등등..... 

또다른 문제들. 몸은 뇌와 분리되고 나면 나일까, 아닐까. 몸과 분리된 뇌는 나일까, 남일까. 그냥 객관적인 어떤 동물일까. 나의 뇌와 어떤 아름다운 신체와 결합하게 된다면 나는 사라진 것일까. 남은 것일까. 

자아만 남은 뇌는 성별이 가능할까. 자아만 남은 뇌는, 또는 뇌가 사라진 몸은 역사 속의 인간일까, 그저 개별적인 기계같은 동물일까. 

하긴 뇌 속의 데이터만 뽑아서 몸은 행할 수 없는 우주여행같은 무한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어떤 의미있는 일을 할 수도 있단다. 그건 전 인류를 위해서는 필요하고 유용한 시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외, 냉동보존술은 너무나 끔찍한 엽기적인 범죄로 보인다. 


미국인들의 의식--개척정신,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 등은 냉동보존술을 가능하게 한 것 같다.... 

카뮈의 주제의식--죽음은 타자. 부조리

필립로스의 선언--죽음은 부당하다

유발 하라리--기술은 자연력이 되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자본주의의 셀프진화, 이윤극대화의 방향으로 자기운동이 진행되어 그것을 정지시킬 수 없게 되었다)

위대한 개츠비 외--개명(자아 실현-자신이 원하는, 혁신하기 위한)

영국경험론--자아는 경험에 의해 형성된 것

칸트, 데카르트 등-- 무연고적 자아(코기토), 인식하는 순간 자아가 태어난다.

연고적 자아--관계, 혈연, 고국 등

나--냉동보존술은 흉악하고 무서울 뿐인, 과학적인 미신이다. ㅎㅎㅎ 


생각할 게 너무 많고 위 문제들의 깊이를 도저히 단 1%도 설명하기 힘드므로, 그냥 강의시간에 쓴 것들을 하이픈으로, 찰나의 설명으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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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필립 로스의 작품을 네 편 연이어 읽었다. 네 번째 이 작품을 읽을 때쯤 되자 로스의 필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것 같다. 이야기의 힘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다. '목로주점'이나'속죄' '남아있는 나날' 같은 소설은 흉내낼 수 수 없는 서사로, 유려한 문체로 독자를 감동과 우수에 젖게 한다.

 거기 비하면 필립로스나 줄리언 반스 같은 작가들은 단연코 서사보다 작가의 사유와 박학다식함이 독자에게 특정내용를 교육시키고 모르던 세계를 만나게 해준다. 필립 로스의 세계는 넓고 자유분방한 세계다. 그의 세계는 정태적인 세계가 아니라 요동치고 전복되는, 변화무쌍한 세계다. 그 점이 독자의 경탄을 자아내고 어떤 교훈을 깨닫게 한다. 독서를 하면서 만난 작가 중에 가장 많이 배웠던 작가가 아닐까 싶다. 때문에 그의 네이선 주커먼 3부작 중 안 읽은 <미국의 목가>를 시간이 닿는 대로 읽어봐야겠다는 작심을 하고 있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는 1946년부터 1956년 쯤 사이에 몰아친 미국내 매카시즘의 상황을 픽션과 논픽션의 결합을 통해 옮겨놓은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21세기인 현재까지도 존재하는 '빨갱이'라는 단어..... 그 때에는 미국에서도 빨갱이라고 지목당하면 사회적인 지위는 추락하고 개인의 삶은 파괴당하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주인공 아이라 린골드는 너무나 감정적이고 욕망에 충실한 남자였다. 그에게 공산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는 순간 모든 것은 한순간에 날아가고 만다. 하지만 그가 냉정하고 올곧기만 한 공산주의자였다면 오히려 그렇게 완벽하게 몰락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었지만 공산주의가 가장 혐오하는 안락한 가정과 아름다운 아내와 자식을 원했고, 자식을 얻지 못하자 바람까지 피웠다. 메마르고 차가워야하는 지성적인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면 추악한 결혼생활과 그 뒤에 이어지는 배신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아내였던 스타, 이브 프레임... 그녀는 아이라와 쌍벽을 이루는 여자였다.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는, 안락한 가정과 자신을 보호해주려는 남편과 성공하는 사랑스런 딸을 가지고 싶었던, 그러나 사회적 성공도 버릴 수 없었던 여자..... 두 사람의 결혼은 애초에 잘못된 만남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을 예견하고 시작하는 만남이 얼마나 있을까. 사랑을 시작할 때 자신과 상대의 모든 것을 살피고 분석해서 합리적으로 만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사랑에 자신을 내던진 순간까지만 아름다울 뿐, 함께 사는 일상은 녹록치 않다. 결혼은 대부분의 사랑하는 남녀를 숨막히게 한다.

 더구나 그토록 인간적이고 그토록 에너지가 넘치는 남자, 아이라 린골드에게 잘못된 결혼은 추악한 배신을 불러오게 만든다. 이브 프레임이야말로 그 못지않은 욕망과 성공에 눈 먼 여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게 볼 때, 전 남편의 파멸이 자신의 행복일 수 있을까. 악한 일은 악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다. 악한 방법으로 누군가를 몰아넣지 말아야 한다. 어째서 성공하는 사람들 다수는 양심이나 도덕에서 면제받은 것처럼 행동하는지....  

 완전히 프롤레타리아로 다시 돌아온 아이라는 폐광이 된 광산 앞에서 광석을 팔다 죽는다.

 그의 형 머리 린골드가 한때 아이라를 우상처럼 따랐던 네이선 주커먼에게 이제는 죽어 하늘 어딘가에서 별이 된, 아이라의 들끓던 용광로가 이제는 별이 되고 만, 자신의 동생인 아이라의 삶을 엿새 밤 동안 이야기해준다. 엿새 밤 동안 다 늙은 머리가 이제 초로에 접어든 주커먼에게 아이라의 삶을 자세히 들려주면서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토록 인간적이었고 그토록 마음이 따듯하고 자신의 삶 자체를 살고 싶었던, 욕망과 감성에 충실했던, 그러나 힘이 너무 좋았고, 감정에 빠지면 자신을 절제하지 못했던 남자, 아이라.

 그 동생을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지만 동생의 공산주의 때문에 자신도 한 때 실직했던 머리는 훌륭한 인간이자 듬직한 형이었다. 그 형이 지금은 없는 동생을 추억한다. 사랑과 배신과 복수가 날뛰었던 동생의 철없고 한심하고 너무나 눈물겨운 삶을....

 주커먼은 두 달 뒤 머리 린골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모두 죽는다. 공산주의자라고 오명을 썼던 남자도, 그 남자를 사랑하고 배신했던 여자도, 훌륭한 인품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지키지 못했던 형도, 모두 죽었다. 이제 주커먼 혼자 하늘을 바라본다. 한때 용광로였던 그들은 죽어서 별이 되어 있다. 별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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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먼 스테인 1,2 (반양장)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휴먼 스테인>- 얼룩진 인간, 오점의 인간,  책을 읽어나갈 수록 제목이 주는 의미가 지대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휴먼 스테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은 완전한 개별성을 지닌 고유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없는 한계에 처한다. 한계는 자라나는 아이를 주눅들게 하고 방황하게 한다. 아이는 무엇인가 하기 위해 억지스런 행동을 취하기도 하고 거짓된 자아를 만들기도 하고 누군가를 속이기도 한다. 극단적인 아이는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기도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콜먼은 도저한 한계를 넘기 위해 세상 전부를 속이게 되는 흑인이다. 흑인으로 살아서는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없다고, 흑인에게는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고 그는 여긴다. 그래서 그는 백인이 된다. 백인보다 더 백인다운 백인이 되기 위해 콜먼은 가족과 절연하고 백인으로 몇 십년을 지내왔다. 그러나 노력한 것에 비례해 모든 일이 합리적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 갑자기 백인교수사회로부터 학교로부터 추방된다. 대학에서 쫓겨난 후 그는 어떻게 되는가....

 

  <휴먼 스테인>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해직당한 노교수 콜먼과 콜먼이 학장으로 있었던 아테나대학과 동네 우체국의 청소를 하는 젊은 문맹인(사실 문맹이 아니었다. 오히려 포니아가 문맹이라고 남들을 속인 것) 여자 포니아가 주인공이다. 콜먼은 'spooks'사건으로 명명할 수 있는, 어찌보면 단순하고 하찮은 이 단어를 악의적으로 썼다는 모략에 의해 교수사회에서 매장당하고, 그는 대학을 사직한다. 하지만 콜먼의 불행은 이 단편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이 일로 아내를 잃는데, 아내의 죽음은 그를 분노와 증오로 들끓게 하고 그는 분격하여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책으로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글을 완성하지 못하고 화자인 작가를 찾아간다. 자신은 아내를 잃었고, 그들은 살인자들이니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달라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콜먼은 안정을 찾는데, 이유는 젊은 여자 포니아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34살의 포니아와 71살의 콜먼은 둘만의 완전한 유토피아를 이룬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추방당하고 경멸당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둘의 관계는 오히려 완벽한 그들만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세인들에게 불량하고 파렴치한 일로 치부된다. '우리 그냥 사랑하게 놔두세요' 이 말을 콜먼과 포니아는 하고 싶을 것이다. 콜먼을 해직에 이르게 했던 아테나대학의 새 학장 루 델핀은 콜먼이 문맹인 포니아를 위협하고 기만해서 성적노리개로 삼았다고 여긴다. 이 일로 콜먼은 다시한번 치욕을 당하고 자식들에게마저 회피당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포니아 또한 한 인격체로서의 의지는 고사하고 성적인 노예처럼 세인들에게 폄하된다. 더구나 포니아의 전남편인 레스터 팔리는 베트남 참전 재향군인으로서, 그는 자신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더 약자인 포니아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결국 대학과 세간의 편협한 의심, 또 레스터 팔리에 의해 잠시 유토피아를 이뤘던 두 남녀의 사랑은 죽음이라는 종말을 맞게 된다(직접적인 가해자는 포니아의 남편 팔리였다. 교통사고로 유도한 계획적인 범행이었지만 증거가 없어서 팔리는 쉽게 풀려난다. 경찰은 단순한 사건을 심도있게 조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화자의 신고를 귀찮아하고 사고로 규정한다. 경찰들의 안일함은 미국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콜먼과 포니아가 죽고 난 후, 화자인 작가는 콜먼의 시신을 묻는 장지에서 콜먼의 여동생으로부터 몇 십년간 지속된 콜먼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는 흑인이었던 것이다. 콜먼은 해군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백인행세를 하며 주위를 속였고 백인이 되기로 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러나 늘 그를 그리워했고 기다렸다. 그는 백인이 되기 위해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찾아와 절연을 선언한다. 절대 자기를 찾지 말라고, 자신은 없는 자식이라고....

 하지만 그의 말로는 아이러니하게도 흑인을 모욕하고 경멸했다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의혹 속에서 파멸되었다. 그는 자신은 사실 흑인이며, 자신이 흑인을 차별할 리 없다는 진실을 밝히지 않고 백인으로, 인종차별자로써 죽었다.

 작가인 네이선 주커는 콜먼의 이 엄청나게 모순투성이의 비밀을 알게되자, 그리고 그가 이 사회가 만들어낸 하찮고 악의적인 스캔들 때문에 붕괴되고 끝내는 죽었다는 사실을 쓰기로 한다. 그는 "휴먼 스테인"을 써야 하는 것이다.

 

 550쪽에 가까운 긴 장편인 이 작품은 필립로스의 필력과 열정, 에너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어달리기처럼 한 인물 한 인물마다 그가 어떻게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힘겹게 살아왔고, 그러다 파괴당했으며 남은 생 또한 희망없음을, 그리고 결국은 미국이라는 허울만 좋은 나라에서는 진짜 깊은 문제는 땅 속으로 가라앉고 표피적인 것만을  문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1998년도의 빌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스캔들에 온 언론이 나팔을 불듯 떠들어대고 대중은 그들대로 스캔들을 즐겼으며, 고위직 인사들은 자신들은 '성자인 척하'면서 대통령을 탄핵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이 얼마나 부패했으며 뒤로는 클린턴 못지않게 타락했는지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필립로스는 이 점을 말하고 싶어 한 것이라고. 그는 정말 중요한 문제들은 짚지 않고 사소한 스캔들에 소진하는 미국사회를 개탄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고(로쟈샘의 강의의 주요논점).....

 

 필립로스는 인물들의 생생한 증언을 위해 일인칭 관찰자 시점을 중간에 아무때나 되는 대로 무시했다. 이 방법은 인물들마다 자신의 이력과 심리를 대변해주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결과라고 보여진다. 장편에서 시점을 견지하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등장인물의 증언을 들을 수 없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화자가 관찰자로서 말하지만 콜먼에게 시점이 이동하고 나면 콜먼이 일인칭 화자로서 주인공으로서 자기의 말을, 마음을 표현한다. 시점이 깨진다. 그리고 포니아에게로 상황이 이동하고 나면 포니아가 또 그대로 자신의 심리를 드러낸다. 시점이 또 깨진다. 이런식으로 시점은 인물들이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인물이 일인칭 또는 삼인칭 주인공 시점이 된다. 그래서 악인인 레스터 팔리나 루 델핀의 역동적이며 교활한 심리를 독자는 알게 된다. 그들, 악인들도, 특히나 레스터 팔리의 경우, 그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참전한 베트남전에서 너무도 잔악한 일을 당했으며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남김없이 버리고 베트남을 떠나왔다. 그는 미국의 희생양이며 국가에 이용당한 힘없는 국민이다. 이렇게 악인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고, 당시의 상황을 독자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해서 레스터 팔리를 동정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만큼 필립로스는 <휴먼 스테인>에서 잘나가는 일등 국가 미국의 표피가 아닌 인종과 성차별, 전쟁후유증 등으로 안으로 곪아있고 붕괴되어가는 미국의 어두운 면을 비판한다. 이 책은 그런 문제투성이의 나라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또 나 자신에게도 얼마나 진지한 통찰을 원하는지,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필립로스의 해박함과 비판정신, 과격하면서 열정적인 글쓰기에 매료당했다. 한 번 읽어서는 필립로스의 문제작을 완전히 봤다고 할 수 없을 것이지만.... 시간이 없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로 또 넘어가야 한다. 독서가 참 어려운 일, 쉬운 일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에 머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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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일단 책 표지를 둘러싼 날개 앞면의 그림이 사뭇 선정적이라고 할 수 밖에. 모딜리아니의 나부. 모딜리아니의 이 그림은 어떤 누드화보다 풍만하면서도 매끄럽고 아름답다. 재능을 활짝 연 화가는 젊은 여자의 몸을 감각적이면서도 그늘진 구석 없이 형상화시킨 것 같다. 그림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니 나만의 느낌을 풀어봐야 별 의미는 없을 테고, 이 책의 내용과 연관짓는다면 완전히 100점을 주고 싶다. 물론 여자의 누드 뒤에 펼쳐진 검은 바탕색이 없다면 100점은 불가할 것이다. 검은 바탕이 죽음을 상징할 수 있다면....


 <죽어가는 짐승>은 꼭 화자가 왠지 작가같이 느껴지는 노년에 들어선 남자이다. 로스는 에브리맨에서도 완전히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여기서도 주인공이면서 화자인 남자는 꼭 작가가 옆에서 독자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에게 화자는 길고 긴 자신의 연애사, 일종의 여성편력과도 같은 8년전의 얘기를 아주 디테일하고 에로틱하게, 보통사람이라면 차마 말할 수 없는 부분까지 세세히 털어놓는다. 뻔뻔스러움을 넘어서니 오히려 순수해질 지경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도를 넘어, 포르노그래피를 넘어서 진행되면서 오히려 성적긴장감이나 흥미보다는 이 이야기가 도대체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지, 늙은 화자가 죽어가는 짐승으로서 젊디 젊은 아이였던 제자,  8년전의 그 여자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고, 인간은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한 짐승일 수 밖에 없으며, 그럼에도 그 짐승스러움 속에 영혼이 담겨 있어, 고독과 고통을 짊어진 채 죽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그런 얘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반전,  내가 생각한 주제와 줄거리는 너무나 상식적이었고, 너무 판에 박힌 소설이었다. 로스는 반전을 통해 몸이 어떻게 삶에서 죽음으로 순식간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소설은 그러니까 노년에 들어선 완전히 난봉꾼이었던 교수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8년전에 아름다움과 쾌락과 질투와 예속을 화자에게 가져왔던 그 어린 여자아이가 이제 서른두살에 이르러 죽음 앞에 마주서 있다는 것을, 더구나 화자가 그렇게 예찬했던 그녀의 가슴이 완전히 도려내지고 없어지리라는 충격적이고 잔혹한 슬픔을 얘기한다. 

 화무 십일홍, 그러나 이보다 이 소설 속의 상실이 더 잔혹하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꽃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아름답고 싱싱한 한 인간의 몸이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지점에서 갑자기 시퍼런 칼날이 그 몸 한 부분을 잘라낸다. 한 번 스쳐간 칼날은 젊음과 아름다움과 삶을 갑자기 시들게 한다. 그녀는 노교수에게 전화를 한다.

 자신에게 와 달라고, 자신의 몸을 예찬했던 그가 나중에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얘기를 듣길 원치 않는다고, 자신의 곁에서 자신을 지켜달라고, 자신의 가슴은 이제 없어진다고.... 


 그 사랑스러운 제자는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매혹적이고 완벽했던 몸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죽음 앞에 이르러 있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불완전성과 나약함, 자연과 운명 앞에서 어떻게도 자신을 지킬 수 없는 무기력, 그녀는 늙은 교수보다 더 죽음과 가까와졌다. 그녀는 얼마 후 죽을지도 모른다. 

 노년의 교수는 그녀에게 가려고 일어선다. 옆에 누구인지 모르는 한 사람이 가지 말라고 붙잡는다. 교수는 자신이 그녀에게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지막 희극은 아마도 그를 가지 말라고 말하는 그 사람 역시 그의 옛 제자였거나 지금의 제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의 그녀를 향한 절박함은 그녀가 그를 기다리는 절박함 때문이다. 서서히 죽어가는 짐승과 곧 죽음을 앞둔 어린 짐승.....

 우리는 한낱 죽음을 외면할 수 없는,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거인의 손아귀에 잡혀 어둠 속으로 내던져질 것이라는, 문명과 문화, 지식과 인권이라는 아주 얇고 가벼운 허울은 거대한 자연, 인간이 추정해낼 수 없는 운명이라는 우주적인 법칙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메시지....


 하지만 이처럼 슬프고 잔혹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필립 로스의 포르노그래피는 과격하고 희극적이다. 너무나 노골적이고 충격적이다. 도를 넘는 성적 일탈을 아무 제약이 없다는 듯 쓱쓱 써내려간 재능과 대담함에 머리를 흔들다가 어느 순간 머리를 끄덕인다.

 탁월한 한 소설가의 필담을 읽었다. 필립 로스의 분방함에도 불구하고 깊은 주제는 소설의 깊은 바다에 이르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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