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일단 책 표지를 둘러싼 날개 앞면의 그림이 사뭇 선정적이라고 할 수 밖에. 모딜리아니의 나부. 모딜리아니의 이 그림은 어떤 누드화보다 풍만하면서도 매끄럽고 아름답다. 재능을 활짝 연 화가는 젊은 여자의 몸을 감각적이면서도 그늘진 구석 없이 형상화시킨 것 같다. 그림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니 나만의 느낌을 풀어봐야 별 의미는 없을 테고, 이 책의 내용과 연관짓는다면 완전히 100점을 주고 싶다. 물론 여자의 누드 뒤에 펼쳐진 검은 바탕색이 없다면 100점은 불가할 것이다. 검은 바탕이 죽음을 상징할 수 있다면....
<죽어가는 짐승>은 꼭 화자가 왠지 작가같이 느껴지는 노년에 들어선 남자이다. 로스는 에브리맨에서도 완전히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여기서도 주인공이면서 화자인 남자는 꼭 작가가 옆에서 독자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에게 화자는 길고 긴 자신의 연애사, 일종의 여성편력과도 같은 8년전의 얘기를 아주 디테일하고 에로틱하게, 보통사람이라면 차마 말할 수 없는 부분까지 세세히 털어놓는다. 뻔뻔스러움을 넘어서니 오히려 순수해질 지경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도를 넘어, 포르노그래피를 넘어서 진행되면서 오히려 성적긴장감이나 흥미보다는 이 이야기가 도대체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지, 늙은 화자가 죽어가는 짐승으로서 젊디 젊은 아이였던 제자, 8년전의 그 여자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고, 인간은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한 짐승일 수 밖에 없으며, 그럼에도 그 짐승스러움 속에 영혼이 담겨 있어, 고독과 고통을 짊어진 채 죽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그런 얘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반전, 내가 생각한 주제와 줄거리는 너무나 상식적이었고, 너무 판에 박힌 소설이었다. 로스는 반전을 통해 몸이 어떻게 삶에서 죽음으로 순식간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소설은 그러니까 노년에 들어선 완전히 난봉꾼이었던 교수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8년전에 아름다움과 쾌락과 질투와 예속을 화자에게 가져왔던 그 어린 여자아이가 이제 서른두살에 이르러 죽음 앞에 마주서 있다는 것을, 더구나 화자가 그렇게 예찬했던 그녀의 가슴이 완전히 도려내지고 없어지리라는 충격적이고 잔혹한 슬픔을 얘기한다.
화무 십일홍, 그러나 이보다 이 소설 속의 상실이 더 잔혹하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꽃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아름답고 싱싱한 한 인간의 몸이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지점에서 갑자기 시퍼런 칼날이 그 몸 한 부분을 잘라낸다. 한 번 스쳐간 칼날은 젊음과 아름다움과 삶을 갑자기 시들게 한다. 그녀는 노교수에게 전화를 한다.
자신에게 와 달라고, 자신의 몸을 예찬했던 그가 나중에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얘기를 듣길 원치 않는다고, 자신의 곁에서 자신을 지켜달라고, 자신의 가슴은 이제 없어진다고....
그 사랑스러운 제자는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매혹적이고 완벽했던 몸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죽음 앞에 이르러 있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불완전성과 나약함, 자연과 운명 앞에서 어떻게도 자신을 지킬 수 없는 무기력, 그녀는 늙은 교수보다 더 죽음과 가까와졌다. 그녀는 얼마 후 죽을지도 모른다.
노년의 교수는 그녀에게 가려고 일어선다. 옆에 누구인지 모르는 한 사람이 가지 말라고 붙잡는다. 교수는 자신이 그녀에게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지막 희극은 아마도 그를 가지 말라고 말하는 그 사람 역시 그의 옛 제자였거나 지금의 제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의 그녀를 향한 절박함은 그녀가 그를 기다리는 절박함 때문이다. 서서히 죽어가는 짐승과 곧 죽음을 앞둔 어린 짐승.....
우리는 한낱 죽음을 외면할 수 없는,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거인의 손아귀에 잡혀 어둠 속으로 내던져질 것이라는, 문명과 문화, 지식과 인권이라는 아주 얇고 가벼운 허울은 거대한 자연, 인간이 추정해낼 수 없는 운명이라는 우주적인 법칙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메시지....
하지만 이처럼 슬프고 잔혹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필립 로스의 포르노그래피는 과격하고 희극적이다. 너무나 노골적이고 충격적이다. 도를 넘는 성적 일탈을 아무 제약이 없다는 듯 쓱쓱 써내려간 재능과 대담함에 머리를 흔들다가 어느 순간 머리를 끄덕인다.
탁월한 한 소설가의 필담을 읽었다. 필립 로스의 분방함에도 불구하고 깊은 주제는 소설의 깊은 바다에 이르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