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이시구로의 작품으로 네 번째 소설이다(내가 읽은 숫자로만). 이시구로는 참 조심스럽게 대해야 할 사람 같다. 만나본 적이 없지만(당연히) 아주 완벽하고 그런데 부드럽고 한편으로 배려를 세심하게 하고 그러나 무척이나 냉철한 사람. 이 작가의 인간성이나 됨됨이를 모르니 마냥 헛짚은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 하나하나가 그런 면모를 지니고 있다. 절제미와 원숙미 그러면서도 사려깊은 어조와 우회하는 문장들.... 참 어디 한 군데 흠을 잡을 수 없이 막강하고 완전한 작품들이다. 거기에 진짜 미덕은 쉽게 쓰여졌다는 점. 하지만 그렇다고 속도가 마구 나는 편은 아니다. 한 마디로 모든 걸 갖춘 작가다. 백년을 연습해도 이렇게 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시구로에 대한 찬탄은 해도해도 모자라지만 이만......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이전의 <남아있는 나날>과 유사한 점이 많다. 역자도 해설에서 밝히고 있지만 "직업적인 면에서 소모적인 삶을 산 한 인간을 탐구"했다는 점에서의 유사성을 말한다. 

 

 주인공 오노는 노년의 화가다. 지금은(1948년부터 1950년 사이의 일)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 손자와 놀고 지나간 날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일인칭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시구로의 전략은 자기자신에 대한 정확한 심리묘사를 처음부터 하지(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의 방법은 주인공이 남처럼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뭔가 자신은 잘 모르겠다는 시치미를 떼는 작전을 취한다. 이건 쉬운 방식이 아니다. 아주 계산적이고 서서히 진행시켜야 할 전략 같다. 작가가 주인공 마음에 너무 감정이입을 하면 힘든 방식이다. 작가는 주인공 화자가 자꾸 뭔가 미심쩍고 궁금한데 완전히 의식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상황을 애매하게 만드는 서술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독자는 뭔가 있겠구나, 근데 주인공한테 문제가 있나, 아니면 상황이나 지나간 어떤 사건이나 주위의 누가 문제가 있나,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러면 일단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오래 계속 여러 잡다하고 소소한 사건을 기억에서 불러오며, 또는 그런 상황을 만나며 주인공은 모종의 불안이나 회오에 젖어야 한다. 그것은 아주 서서히 진행되야 하기 때문에 소소한 상황과 기억은 다양하고 다채로와야 한다. 

 

 그러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건을 만나게 만든다. <남아있는 나날>에서는 미스 켄턴을 향해 여행을 하며 자신이 몰랐던, 옛 주인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듣게 되는 것이고,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는 작은 딸의 혼사가 그것이 된다. 노년의 화가는 한 번 어긋난 작은 딸 노리코의 혼사가 깨지지 않도록 자신의 과거를 정리해야 할 필요에 부닥친다. 일본에서는,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혼담이 오가게 되면 상대방 집안에 대해, 특히 그 부모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런 일이 하나의 관습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첫째 딸 세쓰코는 아버지인 오노에게 어떤 암시적인 말을 한다. 이번에도 혼사가 깨지면 안 되니까 예방차원에서(혼사의 상대집안에서 조사를 하기 전에 여기저기 미리 손을 써놓으라고) 조치를 취하라고 은근한 압력을 가한다. 아버지로서 딸의 혼사가 잘못된다면 평생에 씻지 못할 일이 될테니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오노는 지나간 동료를 찾아가고 자신의 수제자를 찾아간다. 자신에게 유리한 진술을 부탁하러.... 그것은 용기를 내야하는 일이고 과거가 스스로에게 죄 드러나는 일이 된다. 그러면서 그의 과거가, 가려져있던 과거의 행적이 수면위로, 드디어 독자들에게 드러난다. 독자는 그가 자신의 내면의 어떤 찜찜하고 불유쾌한 과거를 잊은 척, 또는 모르는 척 해왔다는 사실을 비로소 만나게 된다. 그러면 독자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중인격자였군. 아니면 무슨 어쩔 수 없는 사연이 있었겠지. 

 사실 그 두 예단은 맞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오노는 과거를 수정할 수 없는 상황에 있지 않은가. 그러니 불리한 과거는 꺼내어 드러내고 싶지 않으니 이중 또는 삼중의 인격자가 될 수 밖에 없고, 과거의 그는 그 당시의 당위성으로 필요한 일을  했었던( 지금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것일 뿐..... 이 과거와 현재의 모순, 시대와 이념이 달라진데서 한 개인이 겪는 고초를 작가는 그리고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주인공 오노는 갑자기 자신의 전력에 대해 회한의 념을 정직하게 발설한다. 노리코의 혼사 때문에 양가가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는 잘못되었다고,  그런데 그러자 그의 주변이 오히려 밝아지고 상대측 가족들이 더 스스럼없어진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 첫째 딸도 둘째 딸도 아버지의 그런 고백은 상당히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고, 아버지를 특별히 전범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아이러니는 어디에서 유래되는가. 읽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질 것 같은 부분이다. 


 나라는 독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오노는 상당히 정신적인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작은 딸이 결혼을 못하게 되면, 자신의 책임이 되는 상황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과거를 성형하고 싶다. 그러나 성형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그리고 세세하게 통찰해보니 자신은 그 시대에 나름의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 오히려 용기까지 내야했었다. 그러나 또 자명한 사실은 과거의 자신의 용기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했던 면이 있으니 오점이 될 수도 있다......는 자각.

 그래서 그는 고통스런 회한을 그렇게 격식있는 자리에서 오히려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그러자 상황은 달라진다. 자기 자신이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상견례가 그래서 잘 마무리 되었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건 그에게는 완연한 사실이지만 어쩌면 상대측 가족에게는 특별한 의미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 나라는 독자의 추리는 분명 그 자리가 화기애애하게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할 것 같다. 우리 중의 누군가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발설할 때 그에게 느껴지는 순수한 감정, 오히려 괜찮다고 덮어주고 싶은 마음,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리라.  

 그러나 작가는 이렇게 단순하게 오노가 자신의 과거를 회한한다고 결론을 맺지 않는다. 작가에게 주인공은 긴 세월을 나름의 인내와 성실성 그리고 용기로 살아온 의인이지 않은가. 부유화를 그리는 편안한 삶에서 고통에 직면한 대중을 그리기로 작정한 것부터가  당시로서는 엄청난 용기가 아니었던가. 그런 오노에게 긍정할  이유도 있다는 일면을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오노가 통찰이 부족하다고, 전범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화가가 무슨 자긍심이냐고만 몰아부치기 어려운 면을 나라는 독자는 이해한다. 그러면 작가는 성공한 것이 아닐까. 지금과 아주 다른 시대가 있었고 개인이 그 역사적 순간에 얽혀들 수 밖에 없었던 지점을 보여주었다는 면에서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상당히 피곤한 감상문이었다. 단순한 이야기가 줄줄이 엮어진 서사는 독후감도 쉬운데 어떤 형이상이나 이념에는 참 조응하기 힘들다. 나의 지적 능력은 되는데 술술 풀리는 언어가 안되는 걸 보면 단순무식하게 사는 삶에 너무 절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존경을. 에밀졸라 이후 처음으로 극존경을 바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소설가는 다 훌륭하다. 



**두꺼운 글씨체는 작가가 이 작품에서 행한 일종의 전략과 독자가 인지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나름 간략하게 설명한 부분이다. 이시구로의 독자를 '살짝 속이기' 전략은 상당히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지만( 물론 전문비평가들은 다 연구해놨을 테지만)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아 그만두고 이 전략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두꺼운 글씨체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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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지음, 강미숙 옮김 / 창비 / 2005년 9월




 이 책을 읽어야 할 때쯤부터 아프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건너뛴 책을 어제 새벽에 끝냈다. 성취감이란 없다. 너무 오래 읽었다. 열흘이 넘게 걸렸다. 왜냐면....   "화이트 노이즈"처럼 내 생각에 '노이즈'가 계속 구름처럼 껴있기 때문이다. 나란 인간이 원체 잡념이 많은 사람이지만 책장을 몇 장 넘길 수가 없다. 雜念이, 思念이 그리고 邪念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매일이 이런 '노이즈' 아닌 노이즈로 카오스 상태다. 언제가 되어야 '노이즈' 없는 청명한 시간을 구가할 수 있을까. 드릴로의  고차원적인 소설 <화이트 노이즈>와 나의 미망인 '노이즈' 사이에서 헤매이는 시간들.


 <화이트 노이즈>는 정말 포스트모던한 소설이다. 드릴로가 이 작품으로 작가의 반열에 선 것은 당연하다 여겨진다. 서두부터 드릴로의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지적인 안목이 드러난다.

 화자인 잭은 작은 도시의 대학에서 히틀러를 연구하고 강의하는 교수이다. 그는 히틀러를 강의하지만 독일어를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편이다. 그에겐 신뢰할 수 있는 매력적인 아내와 다양한 성격의 아이들이 있다. 그는 지금 아내가 네 번째 결혼이고 아이들은 전처들의 아이들과 현재 처의 아이들로 넷이나 된다. 거기다 헤어진 아내와 살고 있는 아이까지 합치면 엄청난 대식구를 이룬다. 아내 배비트 역시 재혼이고 전남편의 아이와 현재 남편인 잭의 아이를 데리고 있다. 이 대가족(예전과는 아주 다른 의미의 대가족)의 구성원은 핏줄만으로 이루어진 기존 가족 체계와는  다른 체계를 이루고 있다. 드릴로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져온 핵가족 체제가 와해되고 새로운 가정의 등장을 좀 빠른 시기에 소설의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 이혼이 다반사가 되고 있는 추세에서 어쩔 수 없는 현상 이기도.


 얼마 전에 이 대학에 온 머레이는 아주 독특하고 예언자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미국적 환경'학과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강의를 맡고 있다. 그와 화자는 우연히 대형마트에서 만나게 되고 그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머레이는 세상을 진단하고 그 정교하면서도 한편 어딘가 엉성하기도 한 자신의 논리에 따라 진지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현자이기도 하고 우매한 현대 미국인 같기도 하다. 이 인물은 상당히 재미있고 배울 게 많았다. 

 그리고 화자인 잭의 아이들 중 하인리히가 있는데 이 소년은 진취적이지만 냉소적이고 분석적이며 지나치게 영민해서 영악스럽고 엉뚱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일반 다른 소설들의 인물들보다 평면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달리 뜯어보면 몇 인물은 상당히 입체적이고 개성적인 캐릭터로 형성돼 있다고 보여진다. 


 또 잭과 아내 배비트의 관계는 처음엔 알콩달콩한 부부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여졌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 그들 부부의 사랑이란 표피적일 뿐, 자신의 내밀한 심연은 어쩔 수 없이 혼자만의 것이라는 진실 앞에 다다른다. 특히 배비트의 '다일러' 약 복용에 이르르면 안쓰럽다. 그녀는 다가올 죽음의 공포를 떨치지 못한다. 삶이 불안할 때, 어떤 정신적 신체적 평안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흔히 죽음의 사자를 본다고 한다. 우리 엄마 얘기다. 다른 할머니들 얘기다. 내가 맞이할 멀지 않은 미래의 이야기다. 검은 옷을 입은 내방객을 맞는다고 한다. 죽음의 사자라고.... 마지막 절망이나 무기력에 빠지면 인간은 죽음 앞에 다다라 있는 것이다.


 그런 일상 속에서 '유독가스 공중유출사건'이 발생한다. 잭은 대피과정에서 유독가스에 잠깐 노출되는데, 그런 그에게 전문가인 양 하는 담당자는 그가 여러 면에서 정상인과 다른 수치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언젠가 죽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언젠가 누구든 죽게 되어 있는데 말이다. 

 잭은 죽음의 공포를 완전히 끌어안고 아내가 먹었다는 약 '다일러'를 찾는다. 쓰레기통을 뒤진다. 배비트가 그 약 때문에 성적인 관계를 맺어야했던 남자를 찾아간다. 그는 그 남자를 쏘아죽이고 다일러를 빼앗아 오겠다는 시나리오를 만든다. 하지만 그는 이제는 폐인이 된 그 남자를 쏜 뒤 인간적 연민에 빠져 그를 병원에 데려간다. 그러면서 그는 고양된 자신의 정신을 체험한다. 아이러니 정도가 아니라 희비극적인 코미디가 연출된다. 그는 아내를 성적으로 유린했던 이제는 거의 미치광이가 된 남자를 쏘고 피를 흘리게 만들고 죽게 만들었던 자신이 그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 목숨을 살렸다는 데서 어떤 정신적 고양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유쾌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드릴로의 재기가 번쩍인다. 모순적인 인간성의 이해를  특별히 각인시켜준 드릴로가 정말 작가라고 느껴진다. 


 잭이 부상자를 데리고 들어간 병원에는 수녀들이 처치를 하고 간호를 한다. 독일 수녀와의 대화가 압권이라 할 만하다. 수녀는 말한다. 천국은 없다고, 이 시대에 천국을 말하려거든 썩 나가라고, 당신들이 믿는 그 믿음은 그런 믿음이 필요해서일 뿐, 자신들은 천국이 없어도 믿음이 없어도 부상자들을 돕고 돌봐줄 수 있는 거라고, 헌신이 필요해서이지 믿음 때문이 아니라고..... 

또 아주 포스트모던한 소설답지 않은 말도 독일 수녀는 내뱉는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있어야 해요. 바보들, 천치들, 환청을 듣는 사람들, 방언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우리는 당신네들의 미치광이예요. 당신네들의 불신을 가능하게 하려고 우리는 우리 삶을 포기하죠....."


 막내인 와일더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내려가 고속도로를 가로지른다. 도로를 달리던 자동차 안의 운전자들이 경악해서 소리를 지른다. 숲속 높다란 집 이층 베란다에서 두 여자가 안타까운 소리를 지른다. 와일더는 수많은 경적소리와 인간들의 소리를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그대로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개천(?)으로 떨어진다. 아이는 안전하다. 이것이 드릴로가 말하는 희망이란 말인가. 난 아니라고 본다. 그애가 차에 치이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은 희망이 있다?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은 화이트 노이즈로 가득 채워져 있고, 자신의 공포를 잊기 위해 히틀러를 연구하는 교수가 있고, 겨우 엘비스 프레슬리(그 팬들에게는 미안하다)를 연구하는 객원교수가 있고.... 이런 세상에 무슨 희망이..... 

 

 그런데 세상을 희망이 없다고, 우매한 대중과 권력을 탐하는 인간들을 보면 진절머리가 나는 이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냐고 말하는 나는 과연 얼마나 청정한가, 나는 얼마나 우매한가... 나는 왜 자꾸 사념에 빠져드는가. 나는 왜 사념을 떨치지 못하고 혼란을 거듭하면서도 그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드릴로에게 감사하고 싶다. 이 작품은 모순투성이의 인간들을, 이 세계를, 이 악마적이면서도 한편 슬프게 아름다운 이 세상을 완벽하게 구현해냈다고 칭송하고 싶다. 화이트 노이즈와 죽음과 이 세계의 지독한 모순과 냉혹하면서도 거짓된 자본주의의 현대성과 쇠락하는 개인을 그리고 있는 드릴로의 장편 <화이트 노이즈>, 훌륭한 소설이다. 


p.s

 어쩌란 말이냐, 페이퍼를 쓰다 피곤한 것 같아 마구 빨리 써놓고 얼른 등록하기를 눌렀다. 그리고 아마 7시간이 지난 것 같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제일 중요한 이 책의 모티프이며  제재인 '화이트 노이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냥 줄거리를 쭉 대강 훑고 다 썼다고 생각한것..... 

 이 작품에서 군데군데 계속 한두 행의, TV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의미 없는(의미 있기도) 말들을 겹따옴표를 써서 그대로 들려주기도 하고 아예 상품명이나 상표명이 불쑥불쑥 나열되기도 하는데 이게 바로 '화이트 노이즈'이다. 

 나도 어려서부터 들어온, 광고를 위한 노래를 의미없이 흥얼거릴 때가 있다. 수많은 매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광고를 하고 선전을 하는.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브랜드를 소비하는 소비자가 왕인, 그런 시대.... 수많은 정보와 광고 속에서 인공적인 공간과 물질(상품)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같다고나 할까. 돈 드릴로는 이런 삶의 표피를 뚫고 심연까지 내려가 인생을, 죽음을 그리고 공포와 외로움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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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나 이론이 있다
무언가를 해명하기 위해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체계를 이론이라 한다면

또다른 이론도 있다
다른 의견이나 이의

내게는 이론이 있다
나를 설명하기 위해 나름의 논리가 정연하게
아니, 사실은 전혀 정연하지 못하게 정연하다

내게는 또 이론이 있다 내 생각과는
아주 다른 이의를 제기하는 내 안의 이론
그것은 꽤 정연하고 명징하다

나는 이 두 가지 이론을 언제나 지니고 있다
정연한 듯 정연하지 못한 양의 이론과
그 이론에 맞서는 정연하고 냉정한 음의 이론

어느쪽의 이론도 마땅치 않다
그저 나는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그냥 느끼는 바를 살고 싶다
어떤 이론도 내편이 아니니까

이론이 아닌 실제를 살고 싶다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넉넉히 맞이하고
비가 오면 그 비를 줄줄이 맞고
눈이 내리면 그 눈을 핥고 싶다

한데 역사가 말한다 이론을 망치지 말라고
이론이 말한다 하찮아 보일지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다른 이론이 속삭인다 역사는 살아있지 않다고
단지 존재하는 양식일 뿐이라고
살아있는 것은 너
네가 살아있는 것이라고
너는 역사를 짓부술 수 있다고

나는 언제나 이 두 이론에
머리를 끄덕이고 머리를 내젓기를 반복하다
그 중간쯤에서 그 둘의 비위를 맞추고 빠져나온다
아니 그 두 이론 속으로 숨는다

나는 기실 세상에 없다
세상만 세상에 있고 나는 여기 없다

문학이론은 문학을 도구 삼아 잘난척을 한다
복잡한 체계를 이루고 싶어 논리에 논리가 더해진다
문학을 위한 문학이론인가
이론을 위한 문학이론인가

나는 나의 두 가지 이론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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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책을 읽는 게 생활인 사람들이 많다는 걸 이 블로그에 독후감을 적으면서 알게 되었다. 누가 한국인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함부로 말하는가? 하긴 전 국민 평균으로는 어림도 안되게 책들을 읽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독서도 양극화 시대다. 나는 어디쯤에  위치하는가? 

 아마도 나는 독서 중간 지대의 중하위권 쯤에 위치할 것이다. 아쉬운 문제다. 책을 향한 내 마음은 꼭 해야할 과제를 하지 못한 채 얼렁뚱당 다른 걸로 대체되어 학점을 받은 것처럼 찜찜하다. 이번 여름은 내게 이런 찜찜하고 아쉬운 마음이 각인된 계절이다. 내겐 가족과 애견이 있다. 피로가 일상이 되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독서가 일상이 되지 못한다. 거기다 3주일 넘게 내리 아팠다. 작년 여름에 한 고비를 넘겨봤기 때문에 애저녁에 나는 환자요, 모드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코맥 매카시처럼 특별한 소설적 재미가 없는 책은 독서대에 얹기 힘들었다. 때문에 <로드>나 <모두 다 예쁜 말들>은 독서 중간에 접었고, <핏빛 자오선>만이 완독을 향한 유일한 매카시의 책이었다. 그래서 <핏빛 자오선>을 다 읽었는가. 기실, 100페이지 정도는 읽지 않았다. 차라리 다른 책을 보는 게 경제적일 것 같았다. 그럼 다른 책은 읽었는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한 마디로 <핏빛 자오선>은 미국인들이 멕시코 국경지대에 사는 인디언들을 무차별 도륙하고 그들의 마을 전체를 지옥으로 만드는 일련의 학살프로젝트를 그리고 있다. 매카시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인물들의 이름마저그대로 썼다고 하니 얼마나 이 소설이 사실적일지. 믿어도 좋을 얘기다. 

 한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토록 잔학무도한 미국인들의 행태에도 불구하고 매카시의 자연을 묘사하는 문장과 분위기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것도 어쩌면 매카시의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자연은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든 언제나 비정하게 그 자리에 있고 그 자신의 순리대로 움직이고 있으니 인간은 결코 이 지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뜻일지도.....

 결코 악마적인 인간들이 승리하고 그 땅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되건만,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국은 멕시코의 땅을 먹어치웠고, 멕시코는 지금도 암울한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선이 악을 징벌한다는 것은 동화에서나 가능할 뿐, 역사적으로는 정반대일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인디언이면 누구나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도살해서 머리가죽을 벗긴다. 그 머리가죽을 꿰어 상금을 탄다. 이 상금에 눈먼 자들이 부대를 이루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인디언 마을마다 씨도 남기지 않고 (어린애나 여자나 노인들에 대한 배려도 없고 가축에게마저) 학살을 자행한다. 어찌보면 미국인들로서는 가장 확실한 남의 땅 빼앗기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그 죄에 대한 망설임이 있었다면 지금의 거대한 미국은 없었을지 모른다. 코맥 매카시는 이로써 써야할 작품을 썼다.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두는 것은 정말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했다. 일본인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데 인디언들은 어떻게 미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하긴 인디언들의 삶 하나하나를 기록한다면 미쳐서 죽고 울다가 죽고 격노 때문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고 소름끼친다. 미국을 원래 좋아하지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증오심을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도 한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매카시는 소년을 소설의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나 소년이라고 해서 배경이  바뀌거나 일말의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당시의(1800년대 중반쯤) 상황 그대로를 재현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인간 군상들의 더럽고 악의적인 행위들이 소년 앞에서 매일 매시간 벌어진다. 소년은 그래도 나름 악한들 중에서 가장 예의바르며 선한 편이다.

 그러나 그런 소년의 성품은 역사적인 악행 앞에서 나뭇잎 하나만도 못한 의미를 지닐 뿐이다. 어쩌면 그나마 독자에게 숨통을 틔여주는 한줄기 희미한 빛을 위해 동원된 인물일지도 모른다. 어쨋든 소년은 지옥같은 현실과 세상에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그 어른은 어떤 어른일까. 그 소년은 지금의 미국이 아닐까. 겉으로는 중재자인 척 행세하고 뒤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이나 타국민의 불행을 조장하고 억누르는 제국주의적 강대국.

 이런 작품을 읽고 나면 독후감 쓰는 일이 더디고 재미없다. 싫은 사람을 만나 같이 밥을 먹어야 할 때 나는 대수로운 말도 잘 나오지 않는다. 밥먹고 앉아있는 일이 고역이 된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자연풍광을 이다지 아름답게 그릴 수 있을까, 매카시의 필력에 놀라면서 그 광경들을 필사하고 싶다고 느꼈다. 몇 문단만 옮겨본다. 


"그들은 어둠이 내리고서도 계속 걷다 모래에서 개처럼 잠들었는데, 시커먼 존재가 밤의 대지에서 펄럭펄럭 날아와 스프롤의 가슴에 앉았다. 섬세한 손가락뼈가 붙은 가죽 날개를 지닌 그것은 가슴팍을 침착하게 노닐었다. 작지만 심술궂어 보이는 주름진 얼굴의 들창코 아래 맨 입술은 선뜩한 미소로 일그러졌고, 이빨은 별빛에 파리한 푸른빛으로 빛났다. 그것이 그에게로 몸을 숙였다. 그의 목에 작은 구멍 두 개를 교묘히 뚫고는 날개를 접고 피를 빨았다."(94쪽)

--- 베끼고 보니 아름답기보다는 흉측하고 섬뜩한데, 묘사가 확실해서 밑줄을 그어놓은 것 같다.


"그들은 웃자란 소나무 숲을 가로지르며 산속으로 들어갔다. 바람에 나무가 너울대고, 새들이 쓸쓸이 지저귀었다. 편자를 박지 않은 노새는 마른 풀과 솔잎 밭을 지그재그로 나아갔다. 북쪽 푸른 협곡에 오래전 내린 눈이 가느다랗게 꼬리를 뻗고 있었다. 그들은 촉촉한 검은 흙길에 황금 잎을 떨구며 외로이 서 있는 사시나무 한 그루를 지나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갔다. 낙엽이 수백만 반짝이처럼 창백한 숲길로 낙하했다. ......그들은 얼음 속에 잎이 박힌 좁다란 협곡을 올라가 해 질 녘에 산봉우리 사이의 오목한 지대를 통과했다. 그곳에서 야생 비둘기들이 바람을 타고 급강하하다 땅을 겨우 몇 미터 앞두고 방향을 틀어 조랑말 사이를 지나쳐 아래의 푸른 골짜기로 내려갔다. 부대는 어둑한 젓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자그마한 조랑말들이 희박해진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184쪽)


"황량한 산자락 아래 드넓게 펼쳐진 나트륨 평야를 가로지르는데 남쪽에서 마른 번개가 떨어지며 빛이 소문처럼 번져왔다. 방추형 달덩이 아래 말과 기수는 푸른 눈(하늘에서 내리는 눈) 빛깔의 땅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칭칭 묶인 듯했다. 폭풍이 다가오며 번개가 내려칠 때마다 그림자는 이 황량한 땅에 박힌 제 3의 존재인 양 수많은 쌍둥이로 증식했다. "(203쪽)


"북쪽 하늘을 빠짐없이 뒤덮은 뇌운에서 검은 덩굴처럼 벋어 내리는 빗줄기는 마치 비커에 묻어난 램프의 시커먼 그을음 같았다. 그날 밤 수킬로미터 너머에서 초원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그들에게까지 실려 왔다. 바위투성이 산길을 오르자니 저 멀리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산을 번개가 훤히 드러냈다. 벼락이 내려칠 때마다 바위가 울렸고 씻어 낼 수 없는 형광 물질 같은 푸른 불 다발이 말에 들러붙었다. 부드러운  용광로 빛이 금속 마구에 번지고 푸른빛이 총신을 물처럼 흘러 다녔다. 토끼가 푸른 섬광에 미쳐 날뛰다 우뚝 서고, 쩌렁쩌렁 울리는 높은 바위산에는 독수리가 익살스레 몸을 웅크리거나 천둥에 짓밟혀 한쪽 눈이 노랗게 갈라졌다. ..... 번개가 내려치는 잿빛 폭풍에 휘감겨 물이 차오른 평야를 건널 때면 물웅덩이에 둥둥 뜬 구름과 산 사이로 말 다리가 드리워졌다." (244쪽)


 이 밖에도 많지만, 지면상... 이렇게 자연에 대한 세밀하고 복잡한 문장은 작가라 해서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묘사는 무엇보다 작가의 섬세함과 집중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

코맥 매카시의 다른 두 권의 책(완독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접은)


<로드>

 아버지와 아들의 희망 없는 여정. 지구의 종말이후, 문명이 사라지고 각 개인들과 소수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서로를 적대하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암흑시대. 아버지는 그러나 아들에 대한 사랑 하나로 이 희망 없는 세상을 떠돈다. 아들의 생존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로 한 아버지,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태어났지만 이상하리만치 도덕적이고 휴머니티한 그리스도 같은 아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결말.... 아버지는 죽고 아들은  인간적이고 평화로워보이는 가족을 만나 여정을 이어가게 된다. 아들은 불을 나르는 책무를 지고 있다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과연 아들은 불을 후세에 남기는 사람이 될까, 대다수가 악한 세상에서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매카시가 어린 아들과 여행을 떠났을 때, 아들은 한쪽에서 자고 있고 자신은 깨어 창밖을 보며 혼자 상상한 이야기란다. 얼마나 아들을 사랑하면 이런 부정적인 상상까지 가능할까. 그렇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오히려 이런 상상을  하게 된다. 이 사람이 여기 없으면, 이 세상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면, 그래도 나는 이 사람을 지킬 거야.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너를 지킬 거야. ---- 나도 내 딸에게라면 가능한 상상! 



<모두 다 예쁜 말들> 

 한 소년이 혼자가 된다. 이거야말로 전형적인 성장소설인데 단지 배경이 미국 남서부이고 말을 타고 다닌다는 점이 조금 특이할 뿐이다. 아버지는 존재가 없는 존재이고 경제적 터가 되줄 어머니는 도시로 떠나버린다. 더구나 부모가 이혼을 해 소년은 갑자기 천애고아가 된 상태. 소년은 말을 타고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향한다. 친구가 있고 중간에 더 어린 소년을 만나기도 한다. 드디어 농장을 가진 지주의 눈에 들어 자신이 잘 하는 일을 할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지주의 딸과 사랑에 빠진 것이 화근. 지주에게 소년은 일 잘하는 노동자에 불과하다. 자신의 딸을 넘보는 노동자는 용서할  수 없다.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아무 것도 없이 방황하게 된 소년, 어느덧 성인이 되어있다. 수많은 일을 겪었고 도전했고 용감했지만 무일푼이 되어 다시 방랑해야 하는 소년을 벗어난 성인. 타 성장소설과 다른 점은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떠돌아야 한다는 점....




코맥 매카시는 자연풍광에 대한 묘사가 누구보다 뛰어나고 비전 없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 남다르다. 특히 <핏빛 자오선>은 기존의 어떤 소설보다 차별화할 많은 요소를 안고 있으며,특이한 점은 무협지를 연상시킨다. 어릴 때 몇 페이지 읽었던 무협지처럼 사람을 죽이는 묘사가 비일비재하고 감정이 들어있지 않다. 무협지도 간혹 자연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아름다울 때가 있는 것 같다. 서부의 셰익스피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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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구조된지 벌써 3주일 쯤
달은 지금 우리 아파트 후문을 떠나
새주인이 사는 장지동에 살고 있다
사랑받으면서 사는 것 같다
입양한 새주인이 보내준 사진이
너무 사랑스러워 눈물이 나려한다

달은 영문도 모르고 태어났을 것이다
자신이 냥이인지도 모르고 태어났을 것이다
2미터 가까운 좁고 긴 구조물 안 바닥에서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환한지 몰랐을 것이다

어느날부터인지 자꾸 아기냥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아파트 후문을 지날때
어린 냥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래도 대부분은 그냥 지나쳤다
이제와 다시 사건을 구성해보면
어미는 다섯마리의 새끼를 낳은 듯 하다
네 마리는 후문 길고 넓은 울타리안에서 키웠는데
희한하게도 달만 아파트명패를 높다랗게 붙인
그 구조물 안 깊은 바닥에서,
혼자 버려졌던 것이다 아니 살았던 건지도 모른다
우리가 모르는 저간의 사정이 있으리라

그러다 어느날 101동 모자가 후문을 지날때
냥, 냥, 냥, 애처롭게 우는 아기냥이 울음소리에 멈춰섰다
맞아도 괜찮을 만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냥이를 구조하려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구조물 맨 위에
비닐과 의자깔개를 덮고 다음날을 기약했다
잠들기 전, 컴컴한 어둠 저 아래서
어린 고양이가 그새 죽어있을까봐 두렵고 불안했다.

다음날 오전 냥이를 걱정하는 사람들과
관리소장과 직원들이 나서서 구조물 아래,
인조 대리석 한장을 뜯어내고 냥이를 구조했다
털은 꾀죄죄하게 빗물에 젖어있고
야구공보다 크지 않은 얼굴은 애처롭게 떨고 있었다

101동 모자가 냥이를 일단 데려갔다
내 딸은 사진을 찍어 고양이 카페에 올렸다
이튿날 새벽엔
냥이를 상자에 넣어 후문에 놓아두기도 했다
제 어미가 찾을지도 모르니 데려가라고...
하지만 어미는 데려갈 마음이 없다
사람 손타면 절대 데려가지 않는다고
어미는 상자안의 냥이를 보고도 잠시 그 주위를 배회할 뿐
상자안 제 자식을 정말 데려가지 않는다
끝내는 상자 주위를 떠나
울타리 끝에 올라앉아 하늘을 보고 거리를 내려다본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구조된 아기냥이
괜히 구조했나 괜히 버림받을 상황을 만들었나
감정이입이 심한 아줌마 셋이서 마주 앉아 한숨만 쉰다
그러다 카페에서 사진을 보고 사연을 읽은 몇 사람이 입양을 신청해왔다
천만다행! 감사하고 뿌듯하고.....

그렇게 열흘 가까이 여러사람 맘을 들었다놨다했던
아기냥이는 입양자를 만나 떠나갔다

며칠 잠을 설치고 어린 냥이 때문에 불안하고 걱정하던 마음이 탁 놓이니 
일견 뿌듯하고 일견 애잔하고 또 일견 속이 후련하다

태어나서 살아야한다는 것
고달픔, 불안, 좌절,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생명에의 애끓음

새주인은 오늘 냥이의 사진을 보내왔다
아직 어려서 무조건 귀여운 냥이는 새주인의 '달'이 되었다
냥이의 주인아가씨는 냥이를 '달'로 부른단다
우리도 냥이를 이젠 달로 부른다
달은 어미를 잃고 인간어미를 만나 달이 되었다
달을 볼 때마다 달을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달은 이제 아주 다른 달이 된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밝게 환하게 새엄마랑 잘 살아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잊지마 너 때문에 2박 3일 잠을 못자서 그후로
내가 더 심하게 아프고 있다는 걸
우리가 너를 구조하려고
비를 맞고 서서 아파트 후문을 못떠났던 걸
네 어미가 널 데려가게 하려고
새벽녁에 널 넣은 상자를 멀리서 눈이 아프게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그때부터 내가 아직까지 아프고 있다는 걸

아니야, 아니야, 다 잊어
아, 넌 아무것도 몰라, 모를 거야
근데 몰라도 돼
그냥 달처럼 보름달처럼 환하게 살아
나는 달을 볼 때마다 네가 환히 빛나는 달로
주인이랑 살고 있다는 걸 느낄테니까

달은 지금 장지동에서 새주인이랑 살고 있다
오늘 새주인아가씨는 달의 사진을 보내왔다
귀여운 데는 못 당해,
달은 사랑받고 있다. 귀여운 게 최대 무기인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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