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책을 읽는 게 생활인 사람들이 많다는 걸 이 블로그에 독후감을 적으면서 알게 되었다. 누가 한국인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함부로 말하는가? 하긴 전 국민 평균으로는 어림도 안되게 책들을 읽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독서도 양극화 시대다. 나는 어디쯤에 위치하는가?
아마도 나는 독서 중간 지대의 중하위권 쯤에 위치할 것이다. 아쉬운 문제다. 책을 향한 내 마음은 꼭 해야할 과제를 하지 못한 채 얼렁뚱당 다른 걸로 대체되어 학점을 받은 것처럼 찜찜하다. 이번 여름은 내게 이런 찜찜하고 아쉬운 마음이 각인된 계절이다. 내겐 가족과 애견이 있다. 피로가 일상이 되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독서가 일상이 되지 못한다. 거기다 3주일 넘게 내리 아팠다. 작년 여름에 한 고비를 넘겨봤기 때문에 애저녁에 나는 환자요, 모드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코맥 매카시처럼 특별한 소설적 재미가 없는 책은 독서대에 얹기 힘들었다. 때문에 <로드>나 <모두 다 예쁜 말들>은 독서 중간에 접었고, <핏빛 자오선>만이 완독을 향한 유일한 매카시의 책이었다. 그래서 <핏빛 자오선>을 다 읽었는가. 기실, 100페이지 정도는 읽지 않았다. 차라리 다른 책을 보는 게 경제적일 것 같았다. 그럼 다른 책은 읽었는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한 마디로 <핏빛 자오선>은 미국인들이 멕시코 국경지대에 사는 인디언들을 무차별 도륙하고 그들의 마을 전체를 지옥으로 만드는 일련의 학살프로젝트를 그리고 있다. 매카시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인물들의 이름마저그대로 썼다고 하니 얼마나 이 소설이 사실적일지. 믿어도 좋을 얘기다.
한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토록 잔학무도한 미국인들의 행태에도 불구하고 매카시의 자연을 묘사하는 문장과 분위기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것도 어쩌면 매카시의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자연은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든 언제나 비정하게 그 자리에 있고 그 자신의 순리대로 움직이고 있으니 인간은 결코 이 지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뜻일지도.....
결코 악마적인 인간들이 승리하고 그 땅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되건만,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국은 멕시코의 땅을 먹어치웠고, 멕시코는 지금도 암울한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선이 악을 징벌한다는 것은 동화에서나 가능할 뿐, 역사적으로는 정반대일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인디언이면 누구나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도살해서 머리가죽을 벗긴다. 그 머리가죽을 꿰어 상금을 탄다. 이 상금에 눈먼 자들이 부대를 이루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인디언 마을마다 씨도 남기지 않고 (어린애나 여자나 노인들에 대한 배려도 없고 가축에게마저) 학살을 자행한다. 어찌보면 미국인들로서는 가장 확실한 남의 땅 빼앗기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그 죄에 대한 망설임이 있었다면 지금의 거대한 미국은 없었을지 모른다. 코맥 매카시는 이로써 써야할 작품을 썼다.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두는 것은 정말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했다. 일본인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데 인디언들은 어떻게 미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하긴 인디언들의 삶 하나하나를 기록한다면 미쳐서 죽고 울다가 죽고 격노 때문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고 소름끼친다. 미국을 원래 좋아하지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증오심을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도 한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매카시는 소년을 소설의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나 소년이라고 해서 배경이 바뀌거나 일말의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당시의(1800년대 중반쯤) 상황 그대로를 재현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인간 군상들의 더럽고 악의적인 행위들이 소년 앞에서 매일 매시간 벌어진다. 소년은 그래도 나름 악한들 중에서 가장 예의바르며 선한 편이다.
그러나 그런 소년의 성품은 역사적인 악행 앞에서 나뭇잎 하나만도 못한 의미를 지닐 뿐이다. 어쩌면 그나마 독자에게 숨통을 틔여주는 한줄기 희미한 빛을 위해 동원된 인물일지도 모른다. 어쨋든 소년은 지옥같은 현실과 세상에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그 어른은 어떤 어른일까. 그 소년은 지금의 미국이 아닐까. 겉으로는 중재자인 척 행세하고 뒤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이나 타국민의 불행을 조장하고 억누르는 제국주의적 강대국.
이런 작품을 읽고 나면 독후감 쓰는 일이 더디고 재미없다. 싫은 사람을 만나 같이 밥을 먹어야 할 때 나는 대수로운 말도 잘 나오지 않는다. 밥먹고 앉아있는 일이 고역이 된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자연풍광을 이다지 아름답게 그릴 수 있을까, 매카시의 필력에 놀라면서 그 광경들을 필사하고 싶다고 느꼈다. 몇 문단만 옮겨본다.
"그들은 어둠이 내리고서도 계속 걷다 모래에서 개처럼 잠들었는데, 시커먼 존재가 밤의 대지에서 펄럭펄럭 날아와 스프롤의 가슴에 앉았다. 섬세한 손가락뼈가 붙은 가죽 날개를 지닌 그것은 가슴팍을 침착하게 노닐었다. 작지만 심술궂어 보이는 주름진 얼굴의 들창코 아래 맨 입술은 선뜩한 미소로 일그러졌고, 이빨은 별빛에 파리한 푸른빛으로 빛났다. 그것이 그에게로 몸을 숙였다. 그의 목에 작은 구멍 두 개를 교묘히 뚫고는 날개를 접고 피를 빨았다."(94쪽)
--- 베끼고 보니 아름답기보다는 흉측하고 섬뜩한데, 묘사가 확실해서 밑줄을 그어놓은 것 같다.
"그들은 웃자란 소나무 숲을 가로지르며 산속으로 들어갔다. 바람에 나무가 너울대고, 새들이 쓸쓸이 지저귀었다. 편자를 박지 않은 노새는 마른 풀과 솔잎 밭을 지그재그로 나아갔다. 북쪽 푸른 협곡에 오래전 내린 눈이 가느다랗게 꼬리를 뻗고 있었다. 그들은 촉촉한 검은 흙길에 황금 잎을 떨구며 외로이 서 있는 사시나무 한 그루를 지나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갔다. 낙엽이 수백만 반짝이처럼 창백한 숲길로 낙하했다. ......그들은 얼음 속에 잎이 박힌 좁다란 협곡을 올라가 해 질 녘에 산봉우리 사이의 오목한 지대를 통과했다. 그곳에서 야생 비둘기들이 바람을 타고 급강하하다 땅을 겨우 몇 미터 앞두고 방향을 틀어 조랑말 사이를 지나쳐 아래의 푸른 골짜기로 내려갔다. 부대는 어둑한 젓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자그마한 조랑말들이 희박해진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184쪽)
"황량한 산자락 아래 드넓게 펼쳐진 나트륨 평야를 가로지르는데 남쪽에서 마른 번개가 떨어지며 빛이 소문처럼 번져왔다. 방추형 달덩이 아래 말과 기수는 푸른 눈(하늘에서 내리는 눈) 빛깔의 땅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칭칭 묶인 듯했다. 폭풍이 다가오며 번개가 내려칠 때마다 그림자는 이 황량한 땅에 박힌 제 3의 존재인 양 수많은 쌍둥이로 증식했다. "(203쪽)
"북쪽 하늘을 빠짐없이 뒤덮은 뇌운에서 검은 덩굴처럼 벋어 내리는 빗줄기는 마치 비커에 묻어난 램프의 시커먼 그을음 같았다. 그날 밤 수킬로미터 너머에서 초원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그들에게까지 실려 왔다. 바위투성이 산길을 오르자니 저 멀리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산을 번개가 훤히 드러냈다. 벼락이 내려칠 때마다 바위가 울렸고 씻어 낼 수 없는 형광 물질 같은 푸른 불 다발이 말에 들러붙었다. 부드러운 용광로 빛이 금속 마구에 번지고 푸른빛이 총신을 물처럼 흘러 다녔다. 토끼가 푸른 섬광에 미쳐 날뛰다 우뚝 서고, 쩌렁쩌렁 울리는 높은 바위산에는 독수리가 익살스레 몸을 웅크리거나 천둥에 짓밟혀 한쪽 눈이 노랗게 갈라졌다. ..... 번개가 내려치는 잿빛 폭풍에 휘감겨 물이 차오른 평야를 건널 때면 물웅덩이에 둥둥 뜬 구름과 산 사이로 말 다리가 드리워졌다." (244쪽)
이 밖에도 많지만, 지면상... 이렇게 자연에 대한 세밀하고 복잡한 문장은 작가라 해서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묘사는 무엇보다 작가의 섬세함과 집중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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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의 다른 두 권의 책(완독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접은)
<로드>
아버지와 아들의 희망 없는 여정. 지구의 종말이후, 문명이 사라지고 각 개인들과 소수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서로를 적대하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암흑시대. 아버지는 그러나 아들에 대한 사랑 하나로 이 희망 없는 세상을 떠돈다. 아들의 생존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로 한 아버지,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태어났지만 이상하리만치 도덕적이고 휴머니티한 그리스도 같은 아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결말.... 아버지는 죽고 아들은 인간적이고 평화로워보이는 가족을 만나 여정을 이어가게 된다. 아들은 불을 나르는 책무를 지고 있다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과연 아들은 불을 후세에 남기는 사람이 될까, 대다수가 악한 세상에서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매카시가 어린 아들과 여행을 떠났을 때, 아들은 한쪽에서 자고 있고 자신은 깨어 창밖을 보며 혼자 상상한 이야기란다. 얼마나 아들을 사랑하면 이런 부정적인 상상까지 가능할까. 그렇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오히려 이런 상상을 하게 된다. 이 사람이 여기 없으면, 이 세상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면, 그래도 나는 이 사람을 지킬 거야.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너를 지킬 거야. ---- 나도 내 딸에게라면 가능한 상상!
<모두 다 예쁜 말들>
한 소년이 혼자가 된다. 이거야말로 전형적인 성장소설인데 단지 배경이 미국 남서부이고 말을 타고 다닌다는 점이 조금 특이할 뿐이다. 아버지는 존재가 없는 존재이고 경제적 터가 되줄 어머니는 도시로 떠나버린다. 더구나 부모가 이혼을 해 소년은 갑자기 천애고아가 된 상태. 소년은 말을 타고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향한다. 친구가 있고 중간에 더 어린 소년을 만나기도 한다. 드디어 농장을 가진 지주의 눈에 들어 자신이 잘 하는 일을 할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지주의 딸과 사랑에 빠진 것이 화근. 지주에게 소년은 일 잘하는 노동자에 불과하다. 자신의 딸을 넘보는 노동자는 용서할 수 없다.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아무 것도 없이 방황하게 된 소년, 어느덧 성인이 되어있다. 수많은 일을 겪었고 도전했고 용감했지만 무일푼이 되어 다시 방랑해야 하는 소년을 벗어난 성인. 타 성장소설과 다른 점은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떠돌아야 한다는 점....
코맥 매카시는 자연풍광에 대한 묘사가 누구보다 뛰어나고 비전 없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 남다르다. 특히 <핏빛 자오선>은 기존의 어떤 소설보다 차별화할 많은 요소를 안고 있으며,특이한 점은 무협지를 연상시킨다. 어릴 때 몇 페이지 읽었던 무협지처럼 사람을 죽이는 묘사가 비일비재하고 감정이 들어있지 않다. 무협지도 간혹 자연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아름다울 때가 있는 것 같다. 서부의 셰익스피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