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지음, 강미숙 옮김 / 창비 / 2005년 9월




 이 책을 읽어야 할 때쯤부터 아프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건너뛴 책을 어제 새벽에 끝냈다. 성취감이란 없다. 너무 오래 읽었다. 열흘이 넘게 걸렸다. 왜냐면....   "화이트 노이즈"처럼 내 생각에 '노이즈'가 계속 구름처럼 껴있기 때문이다. 나란 인간이 원체 잡념이 많은 사람이지만 책장을 몇 장 넘길 수가 없다. 雜念이, 思念이 그리고 邪念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매일이 이런 '노이즈' 아닌 노이즈로 카오스 상태다. 언제가 되어야 '노이즈' 없는 청명한 시간을 구가할 수 있을까. 드릴로의  고차원적인 소설 <화이트 노이즈>와 나의 미망인 '노이즈' 사이에서 헤매이는 시간들.


 <화이트 노이즈>는 정말 포스트모던한 소설이다. 드릴로가 이 작품으로 작가의 반열에 선 것은 당연하다 여겨진다. 서두부터 드릴로의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지적인 안목이 드러난다.

 화자인 잭은 작은 도시의 대학에서 히틀러를 연구하고 강의하는 교수이다. 그는 히틀러를 강의하지만 독일어를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편이다. 그에겐 신뢰할 수 있는 매력적인 아내와 다양한 성격의 아이들이 있다. 그는 지금 아내가 네 번째 결혼이고 아이들은 전처들의 아이들과 현재 처의 아이들로 넷이나 된다. 거기다 헤어진 아내와 살고 있는 아이까지 합치면 엄청난 대식구를 이룬다. 아내 배비트 역시 재혼이고 전남편의 아이와 현재 남편인 잭의 아이를 데리고 있다. 이 대가족(예전과는 아주 다른 의미의 대가족)의 구성원은 핏줄만으로 이루어진 기존 가족 체계와는  다른 체계를 이루고 있다. 드릴로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져온 핵가족 체제가 와해되고 새로운 가정의 등장을 좀 빠른 시기에 소설의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 이혼이 다반사가 되고 있는 추세에서 어쩔 수 없는 현상 이기도.


 얼마 전에 이 대학에 온 머레이는 아주 독특하고 예언자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미국적 환경'학과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강의를 맡고 있다. 그와 화자는 우연히 대형마트에서 만나게 되고 그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머레이는 세상을 진단하고 그 정교하면서도 한편 어딘가 엉성하기도 한 자신의 논리에 따라 진지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현자이기도 하고 우매한 현대 미국인 같기도 하다. 이 인물은 상당히 재미있고 배울 게 많았다. 

 그리고 화자인 잭의 아이들 중 하인리히가 있는데 이 소년은 진취적이지만 냉소적이고 분석적이며 지나치게 영민해서 영악스럽고 엉뚱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일반 다른 소설들의 인물들보다 평면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달리 뜯어보면 몇 인물은 상당히 입체적이고 개성적인 캐릭터로 형성돼 있다고 보여진다. 


 또 잭과 아내 배비트의 관계는 처음엔 알콩달콩한 부부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여졌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 그들 부부의 사랑이란 표피적일 뿐, 자신의 내밀한 심연은 어쩔 수 없이 혼자만의 것이라는 진실 앞에 다다른다. 특히 배비트의 '다일러' 약 복용에 이르르면 안쓰럽다. 그녀는 다가올 죽음의 공포를 떨치지 못한다. 삶이 불안할 때, 어떤 정신적 신체적 평안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흔히 죽음의 사자를 본다고 한다. 우리 엄마 얘기다. 다른 할머니들 얘기다. 내가 맞이할 멀지 않은 미래의 이야기다. 검은 옷을 입은 내방객을 맞는다고 한다. 죽음의 사자라고.... 마지막 절망이나 무기력에 빠지면 인간은 죽음 앞에 다다라 있는 것이다.


 그런 일상 속에서 '유독가스 공중유출사건'이 발생한다. 잭은 대피과정에서 유독가스에 잠깐 노출되는데, 그런 그에게 전문가인 양 하는 담당자는 그가 여러 면에서 정상인과 다른 수치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언젠가 죽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언젠가 누구든 죽게 되어 있는데 말이다. 

 잭은 죽음의 공포를 완전히 끌어안고 아내가 먹었다는 약 '다일러'를 찾는다. 쓰레기통을 뒤진다. 배비트가 그 약 때문에 성적인 관계를 맺어야했던 남자를 찾아간다. 그는 그 남자를 쏘아죽이고 다일러를 빼앗아 오겠다는 시나리오를 만든다. 하지만 그는 이제는 폐인이 된 그 남자를 쏜 뒤 인간적 연민에 빠져 그를 병원에 데려간다. 그러면서 그는 고양된 자신의 정신을 체험한다. 아이러니 정도가 아니라 희비극적인 코미디가 연출된다. 그는 아내를 성적으로 유린했던 이제는 거의 미치광이가 된 남자를 쏘고 피를 흘리게 만들고 죽게 만들었던 자신이 그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 목숨을 살렸다는 데서 어떤 정신적 고양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유쾌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드릴로의 재기가 번쩍인다. 모순적인 인간성의 이해를  특별히 각인시켜준 드릴로가 정말 작가라고 느껴진다. 


 잭이 부상자를 데리고 들어간 병원에는 수녀들이 처치를 하고 간호를 한다. 독일 수녀와의 대화가 압권이라 할 만하다. 수녀는 말한다. 천국은 없다고, 이 시대에 천국을 말하려거든 썩 나가라고, 당신들이 믿는 그 믿음은 그런 믿음이 필요해서일 뿐, 자신들은 천국이 없어도 믿음이 없어도 부상자들을 돕고 돌봐줄 수 있는 거라고, 헌신이 필요해서이지 믿음 때문이 아니라고..... 

또 아주 포스트모던한 소설답지 않은 말도 독일 수녀는 내뱉는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있어야 해요. 바보들, 천치들, 환청을 듣는 사람들, 방언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우리는 당신네들의 미치광이예요. 당신네들의 불신을 가능하게 하려고 우리는 우리 삶을 포기하죠....."


 막내인 와일더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내려가 고속도로를 가로지른다. 도로를 달리던 자동차 안의 운전자들이 경악해서 소리를 지른다. 숲속 높다란 집 이층 베란다에서 두 여자가 안타까운 소리를 지른다. 와일더는 수많은 경적소리와 인간들의 소리를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그대로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개천(?)으로 떨어진다. 아이는 안전하다. 이것이 드릴로가 말하는 희망이란 말인가. 난 아니라고 본다. 그애가 차에 치이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은 희망이 있다?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은 화이트 노이즈로 가득 채워져 있고, 자신의 공포를 잊기 위해 히틀러를 연구하는 교수가 있고, 겨우 엘비스 프레슬리(그 팬들에게는 미안하다)를 연구하는 객원교수가 있고.... 이런 세상에 무슨 희망이..... 

 

 그런데 세상을 희망이 없다고, 우매한 대중과 권력을 탐하는 인간들을 보면 진절머리가 나는 이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냐고 말하는 나는 과연 얼마나 청정한가, 나는 얼마나 우매한가... 나는 왜 자꾸 사념에 빠져드는가. 나는 왜 사념을 떨치지 못하고 혼란을 거듭하면서도 그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드릴로에게 감사하고 싶다. 이 작품은 모순투성이의 인간들을, 이 세계를, 이 악마적이면서도 한편 슬프게 아름다운 이 세상을 완벽하게 구현해냈다고 칭송하고 싶다. 화이트 노이즈와 죽음과 이 세계의 지독한 모순과 냉혹하면서도 거짓된 자본주의의 현대성과 쇠락하는 개인을 그리고 있는 드릴로의 장편 <화이트 노이즈>, 훌륭한 소설이다. 


p.s

 어쩌란 말이냐, 페이퍼를 쓰다 피곤한 것 같아 마구 빨리 써놓고 얼른 등록하기를 눌렀다. 그리고 아마 7시간이 지난 것 같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제일 중요한 이 책의 모티프이며  제재인 '화이트 노이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냥 줄거리를 쭉 대강 훑고 다 썼다고 생각한것..... 

 이 작품에서 군데군데 계속 한두 행의, TV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의미 없는(의미 있기도) 말들을 겹따옴표를 써서 그대로 들려주기도 하고 아예 상품명이나 상표명이 불쑥불쑥 나열되기도 하는데 이게 바로 '화이트 노이즈'이다. 

 나도 어려서부터 들어온, 광고를 위한 노래를 의미없이 흥얼거릴 때가 있다. 수많은 매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광고를 하고 선전을 하는.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브랜드를 소비하는 소비자가 왕인, 그런 시대.... 수많은 정보와 광고 속에서 인공적인 공간과 물질(상품)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같다고나 할까. 돈 드릴로는 이런 삶의 표피를 뚫고 심연까지 내려가 인생을, 죽음을 그리고 공포와 외로움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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