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이시구로의 작품으로 네 번째 소설이다(내가 읽은 숫자로만). 이시구로는 참 조심스럽게 대해야 할 사람 같다. 만나본 적이 없지만(당연히) 아주 완벽하고 그런데 부드럽고 한편으로 배려를 세심하게 하고 그러나 무척이나 냉철한 사람. 이 작가의 인간성이나 됨됨이를 모르니 마냥 헛짚은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 하나하나가 그런 면모를 지니고 있다. 절제미와 원숙미 그러면서도 사려깊은 어조와 우회하는 문장들.... 참 어디 한 군데 흠을 잡을 수 없이 막강하고 완전한 작품들이다. 거기에 진짜 미덕은 쉽게 쓰여졌다는 점. 하지만 그렇다고 속도가 마구 나는 편은 아니다. 한 마디로 모든 걸 갖춘 작가다. 백년을 연습해도 이렇게 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시구로에 대한 찬탄은 해도해도 모자라지만 이만......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이전의 <남아있는 나날>과 유사한 점이 많다. 역자도 해설에서 밝히고 있지만 "직업적인 면에서 소모적인 삶을 산 한 인간을 탐구"했다는 점에서의 유사성을 말한다. 

 

 주인공 오노는 노년의 화가다. 지금은(1948년부터 1950년 사이의 일)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 손자와 놀고 지나간 날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일인칭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시구로의 전략은 자기자신에 대한 정확한 심리묘사를 처음부터 하지(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의 방법은 주인공이 남처럼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뭔가 자신은 잘 모르겠다는 시치미를 떼는 작전을 취한다. 이건 쉬운 방식이 아니다. 아주 계산적이고 서서히 진행시켜야 할 전략 같다. 작가가 주인공 마음에 너무 감정이입을 하면 힘든 방식이다. 작가는 주인공 화자가 자꾸 뭔가 미심쩍고 궁금한데 완전히 의식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상황을 애매하게 만드는 서술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독자는 뭔가 있겠구나, 근데 주인공한테 문제가 있나, 아니면 상황이나 지나간 어떤 사건이나 주위의 누가 문제가 있나,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러면 일단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오래 계속 여러 잡다하고 소소한 사건을 기억에서 불러오며, 또는 그런 상황을 만나며 주인공은 모종의 불안이나 회오에 젖어야 한다. 그것은 아주 서서히 진행되야 하기 때문에 소소한 상황과 기억은 다양하고 다채로와야 한다. 

 

 그러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건을 만나게 만든다. <남아있는 나날>에서는 미스 켄턴을 향해 여행을 하며 자신이 몰랐던, 옛 주인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듣게 되는 것이고,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는 작은 딸의 혼사가 그것이 된다. 노년의 화가는 한 번 어긋난 작은 딸 노리코의 혼사가 깨지지 않도록 자신의 과거를 정리해야 할 필요에 부닥친다. 일본에서는,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혼담이 오가게 되면 상대방 집안에 대해, 특히 그 부모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런 일이 하나의 관습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첫째 딸 세쓰코는 아버지인 오노에게 어떤 암시적인 말을 한다. 이번에도 혼사가 깨지면 안 되니까 예방차원에서(혼사의 상대집안에서 조사를 하기 전에 여기저기 미리 손을 써놓으라고) 조치를 취하라고 은근한 압력을 가한다. 아버지로서 딸의 혼사가 잘못된다면 평생에 씻지 못할 일이 될테니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오노는 지나간 동료를 찾아가고 자신의 수제자를 찾아간다. 자신에게 유리한 진술을 부탁하러.... 그것은 용기를 내야하는 일이고 과거가 스스로에게 죄 드러나는 일이 된다. 그러면서 그의 과거가, 가려져있던 과거의 행적이 수면위로, 드디어 독자들에게 드러난다. 독자는 그가 자신의 내면의 어떤 찜찜하고 불유쾌한 과거를 잊은 척, 또는 모르는 척 해왔다는 사실을 비로소 만나게 된다. 그러면 독자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중인격자였군. 아니면 무슨 어쩔 수 없는 사연이 있었겠지. 

 사실 그 두 예단은 맞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오노는 과거를 수정할 수 없는 상황에 있지 않은가. 그러니 불리한 과거는 꺼내어 드러내고 싶지 않으니 이중 또는 삼중의 인격자가 될 수 밖에 없고, 과거의 그는 그 당시의 당위성으로 필요한 일을  했었던( 지금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것일 뿐..... 이 과거와 현재의 모순, 시대와 이념이 달라진데서 한 개인이 겪는 고초를 작가는 그리고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주인공 오노는 갑자기 자신의 전력에 대해 회한의 념을 정직하게 발설한다. 노리코의 혼사 때문에 양가가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는 잘못되었다고,  그런데 그러자 그의 주변이 오히려 밝아지고 상대측 가족들이 더 스스럼없어진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 첫째 딸도 둘째 딸도 아버지의 그런 고백은 상당히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고, 아버지를 특별히 전범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아이러니는 어디에서 유래되는가. 읽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질 것 같은 부분이다. 


 나라는 독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오노는 상당히 정신적인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작은 딸이 결혼을 못하게 되면, 자신의 책임이 되는 상황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과거를 성형하고 싶다. 그러나 성형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그리고 세세하게 통찰해보니 자신은 그 시대에 나름의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 오히려 용기까지 내야했었다. 그러나 또 자명한 사실은 과거의 자신의 용기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했던 면이 있으니 오점이 될 수도 있다......는 자각.

 그래서 그는 고통스런 회한을 그렇게 격식있는 자리에서 오히려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그러자 상황은 달라진다. 자기 자신이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상견례가 그래서 잘 마무리 되었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건 그에게는 완연한 사실이지만 어쩌면 상대측 가족에게는 특별한 의미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 나라는 독자의 추리는 분명 그 자리가 화기애애하게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할 것 같다. 우리 중의 누군가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발설할 때 그에게 느껴지는 순수한 감정, 오히려 괜찮다고 덮어주고 싶은 마음,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리라.  

 그러나 작가는 이렇게 단순하게 오노가 자신의 과거를 회한한다고 결론을 맺지 않는다. 작가에게 주인공은 긴 세월을 나름의 인내와 성실성 그리고 용기로 살아온 의인이지 않은가. 부유화를 그리는 편안한 삶에서 고통에 직면한 대중을 그리기로 작정한 것부터가  당시로서는 엄청난 용기가 아니었던가. 그런 오노에게 긍정할  이유도 있다는 일면을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오노가 통찰이 부족하다고, 전범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화가가 무슨 자긍심이냐고만 몰아부치기 어려운 면을 나라는 독자는 이해한다. 그러면 작가는 성공한 것이 아닐까. 지금과 아주 다른 시대가 있었고 개인이 그 역사적 순간에 얽혀들 수 밖에 없었던 지점을 보여주었다는 면에서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상당히 피곤한 감상문이었다. 단순한 이야기가 줄줄이 엮어진 서사는 독후감도 쉬운데 어떤 형이상이나 이념에는 참 조응하기 힘들다. 나의 지적 능력은 되는데 술술 풀리는 언어가 안되는 걸 보면 단순무식하게 사는 삶에 너무 절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존경을. 에밀졸라 이후 처음으로 극존경을 바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소설가는 다 훌륭하다. 



**두꺼운 글씨체는 작가가 이 작품에서 행한 일종의 전략과 독자가 인지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나름 간략하게 설명한 부분이다. 이시구로의 독자를 '살짝 속이기' 전략은 상당히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지만( 물론 전문비평가들은 다 연구해놨을 테지만)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아 그만두고 이 전략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두꺼운 글씨체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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