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이철 옮김 / 신원문화사 / 2006년 4월
푸슈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 많은 연애소설 중 기억에 남을 만하다. 이채로운 면에서도, 사랑이야기 자체만을 다룬 면에서도. 이 작품이 이채롭다 하는 것은 운문소설이라는 점과 작가가 직접 변사처럼 나서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끊기도 한다는 점.
내용이 분명하고 행간의 의미가 잘 읽히며 화자의 촌평이나 독자를 끌고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진행이 흥미롭다. 그리고 운문소설이라지만 그건 원서를 읽을 때의 형식일테고 러시아어를 한국어로 옮긴 상태에서는 차라리 산문시라고 불러도 좋음직하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한마디로 한심한, 백수같은 지식인이다. 아주 젊어서는 사교계의 총아였으나 곧 겉만 화려하고 번드르르한 세계에 질려 버린다. 마침 아버지는 파산했으나 작은 아버지의 유산 상속자가 되어 시골의 지주로 한적한 전원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 이웃의 젊은 귀족 블라디미르 렌스키를 만난다. 렌스키는 솔직하고 정열적인 성격에 소년같은 멋쟁이 청년이다. 오네긴이 늙기도 전에 삶에 대한 회의를 품고 매사에 심드렁한 태도를 지녔다면 렌스키는 밝고 환한 태양의 앞면을 보여주는 긍정주의자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 둘은 한 형상의 앞면과(렌스키) 그 뒷면의 그늘을(오네긴) 같이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인간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마음의 양상과 무의식이 오네긴과 렌스키에게 현현되고 있었는지도....
렌스키는 이웃 마을 올가를 사랑하고 있는데, 올가에게는 타치아나라는 언니가 있다. 렌스키는 오네긴을 소개하게 되고 오네긴을 본 타치아나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타치아나는 사랑의 번뇌에 괴로워하다 연서를 전하고... 할일없이 권태롭고 무의미했던 오네긴은 타치아나라는 여자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편지를 다시 건네주며 일단의 훈계마저 늘어놓으며 순진한 시골처녀의 마음을 상처로 물들인다.
그러나 오네긴의 실수 아닌 실수, 오네긴의 흐리멍덩한 이성은 또다른 사건을 일으키게 되니.... 그것은 타치아나의 영명축일에 발단이 난 사건으로, 이 사소하고 어리석은 짓은 렌스키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 사건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어찌보면 별 일이 아니었다. 그저 젊은 남자의 순간적인 변덕이 일으킨 유치한 짓에 불과하지 않았다. 오네긴은 그러니까 자신이 퇴짜를 놓은 타치아나의 괴로운 얼굴을 보는 것에 어떤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던 것이다. 자신에게 왜 타치아나같은, 소녀같은 여자를 만나게 해 이런 상황을 겪게 하느냐,하는 전가하고 싶은 마음(?). 거기에 괜스레 올가를 향한 렌스키의 순정에조차 심술을 느꼈던 것이었고.
이런 마음으로, 고의적으로 오네긴은 올가를 독점해 춤을 추고 올가를 기쁘게 해준다. 오네긴의 진짜 마음을 화자는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는다. 분명 오네긴은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지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타치아나에 대한 부담감과 그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렌스키가 원망스럽고 밉고, 그리고 올가를 향한 질투와 될대로 되라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 그러나 렌스키는 순간적으로 질투에 눈이 멀어 모든 것을 뒤집어놓을 결정을 내리고 만다. 결투.... 렌스키는 너무나 저돌적이고 그의 사랑은 너무 뜨겁고 너무 다급하다.
결투는 어이없게도 렌스키의 죽음을 불러온다. 오네긴의 완벽한 실수... 그의 책임이 될 수 밖에 없는 일. 자매는, 그것도 언니의 영명축일에 발단이 된 불상사이니 충격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우리의 졸렬한 주인공은 정처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고 타치아나는 수심에 쌓여 혼자만의 시간을 맞는다. 아름답고 탐스런 올가는 시간이 지나자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해서 떠나간다. 하긴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는다면 그 상처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타치아나는 그런데도 오네긴을 잊지 못한다. 망할 놈의 미친 사랑.
타치아나는 혼자 남은 시골에서 오네긴이 살았던 집으로 매일 찾아가 그가 앉아있던 서재에서 그가 읽었던 책을 읽는다. 그런 날들이 계속될 때 타치아나는 얼마나 오네긴이 그리웠을까. 생각만 해도 눈물겹다. 그녀는 그렇게 어른이 되고 교양인이 되어간다. 그러다 그녀의 어머니는 노처녀로 늙어갈 것 같은 딸을 위해 모스크바로 딸을 진출시킨다. 타치아나의 성격에 맞지 않는 사교계는, 그러나 그런 그녀가 작정을 하자 오히려 그녀는 누구보다 품위있는 숙녀가 된다. 그녀는 장군의 아내가 된다. 이제 그녀는 사교계에서 명망 높은 여인이 된다.
전능한 화자는 이제 오네긴을 데려온다. 우울하고 말없는 사나이가 사교계 한 구석에서 모든 지나가는 것들 앞에 그저 앉아있다. 그의 눈은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마음은 먼 곳에 있다. 먼 곳에 있는 그의 마음은 도무지 흐려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그는 놀랍게도 눈을 뜬다. 타치아나가 귀부인이 되어 사교계 한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는 갑자기 생동하는 인간이 된다. 그는 매일 귀부인이 된 타치아나를 따른다. 타치아나는 너무나 초연하다. 그녀는 그를 알아보는지 어떠는지 태도는 자연스럽고 마음은 차갑게 느껴진다. 오네긴은 자신을 질책하고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그의 연서가 시작된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답장이 없다. 그는 답장을 기다리다 미친 듯 그녀를 찾아간다. 용기가 가상하다.
현관을 지나 그녀가 있는 곳으로 급히 걸어간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몇 번인가 닫힌 문을 열어젖히며 그녀를 찾는다. 거기 조용한 곳에 그녀가 앉아 있다. 연서를 읽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고 푸르러진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다. 오네긴은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타치아나는.... 자신은 아직도 오네긴을 사랑하고 있지만 자신은 결혼한 몸이라고, 이때 그녀의 남편이 나타난다.
별안간 마차 소리가 들리고
타치아나의 남편이 모습을 나타냈다.
여기서 나의 주인공 예브게니를
그를 위해선 매우 불리한 지금 이때에
독자 여러분 우리 내버려 두고 갑시다.
오래...... 아니 영구히.
그의 뒤를 따라 우리들은 꽤 오래
단 하나의 길만을 골라 세계를 헤맨 셈입니다.
지금은 서로 육지와 닿은 것만을 축복합시다.(48장, 295쪽)
푸슈킨이 7년이나 썼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읽기에는 고작 이틀이 걸렸지만 작가는 그걸 7년을 썼다. 그리고 그는 겨우 38세에 죽었다. 타치아나가 홀로 그리워했던 순정만큼, 렌스키의 속좁은, 그래서 더 열정적이고 가벼워지고 그러다 무거워진 사랑처럼,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은 한탄스러운 작품이다. 렌스키처럼 바보같이 결투로 죽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