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이철 옮김 / 신원문화사 / 2006년 4월




 푸슈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 많은 연애소설 중 기억에 남을 만하다. 이채로운 면에서도, 사랑이야기 자체만을 다룬 면에서도. 이 작품이 이채롭다 하는 것은 운문소설이라는 점과 작가가 직접 변사처럼 나서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끊기도 한다는 점.

 내용이 분명하고 행간의 의미가 잘 읽히며 화자의 촌평이나 독자를 끌고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진행이 흥미롭다. 그리고 운문소설이라지만 그건 원서를 읽을 때의 형식일테고 러시아어를 한국어로 옮긴 상태에서는 차라리 산문시라고 불러도 좋음직하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한마디로 한심한, 백수같은 지식인이다. 아주 젊어서는 사교계의 총아였으나 곧 겉만 화려하고 번드르르한 세계에 질려 버린다. 마침 아버지는 파산했으나 작은 아버지의 유산 상속자가 되어 시골의 지주로 한적한 전원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 이웃의 젊은 귀족 블라디미르 렌스키를 만난다. 렌스키는 솔직하고 정열적인 성격에 소년같은 멋쟁이 청년이다. 오네긴이 늙기도 전에 삶에 대한 회의를 품고 매사에 심드렁한 태도를 지녔다면 렌스키는 밝고 환한 태양의 앞면을 보여주는 긍정주의자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 둘은 한 형상의 앞면과(렌스키) 그 뒷면의 그늘을(오네긴) 같이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인간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마음의 양상과 무의식이 오네긴과 렌스키에게 현현되고 있었는지도.... 

 렌스키는 이웃 마을 올가를 사랑하고 있는데, 올가에게는 타치아나라는 언니가 있다. 렌스키는 오네긴을 소개하게 되고 오네긴을 본 타치아나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타치아나는 사랑의 번뇌에 괴로워하다 연서를  전하고... 할일없이 권태롭고 무의미했던 오네긴은 타치아나라는 여자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편지를 다시 건네주며 일단의 훈계마저 늘어놓으며 순진한 시골처녀의 마음을 상처로 물들인다. 

 그러나 오네긴의 실수 아닌 실수, 오네긴의 흐리멍덩한 이성은 또다른 사건을 일으키게 되니.... 그것은 타치아나의 영명축일에 발단이 난 사건으로,  이 사소하고 어리석은 짓은 렌스키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 사건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어찌보면 별 일이 아니었다. 그저 젊은 남자의 순간적인 변덕이 일으킨 유치한 짓에 불과하지 않았다. 오네긴은 그러니까 자신이 퇴짜를 놓은 타치아나의 괴로운 얼굴을 보는 것에 어떤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던 것이다. 자신에게 왜 타치아나같은, 소녀같은 여자를 만나게 해 이런 상황을 겪게 하느냐,하는 전가하고 싶은 마음(?). 거기에 괜스레 올가를 향한 렌스키의 순정에조차 심술을 느꼈던 것이었고. 

 이런 마음으로, 고의적으로 오네긴은 올가를 독점해 춤을 추고 올가를 기쁘게 해준다.  오네긴의 진짜 마음을 화자는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는다. 분명 오네긴은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지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타치아나에 대한 부담감과 그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렌스키가 원망스럽고 밉고, 그리고 올가를 향한 질투와 될대로 되라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 그러나 렌스키는 순간적으로 질투에 눈이 멀어 모든 것을 뒤집어놓을 결정을 내리고 만다. 결투.... 렌스키는 너무나 저돌적이고 그의 사랑은 너무 뜨겁고 너무 다급하다. 

 결투는 어이없게도 렌스키의 죽음을 불러온다. 오네긴의 완벽한 실수...  그의 책임이 될 수 밖에 없는 일. 자매는, 그것도 언니의 영명축일에 발단이 된  불상사이니 충격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우리의 졸렬한 주인공은 정처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고 타치아나는 수심에 쌓여 혼자만의 시간을 맞는다. 아름답고 탐스런 올가는 시간이 지나자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해서 떠나간다. 하긴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는다면 그 상처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타치아나는 그런데도 오네긴을 잊지 못한다. 망할 놈의 미친 사랑.

 타치아나는 혼자 남은 시골에서 오네긴이 살았던 집으로 매일 찾아가 그가 앉아있던 서재에서 그가 읽었던 책을 읽는다. 그런 날들이 계속될 때 타치아나는 얼마나 오네긴이 그리웠을까. 생각만 해도 눈물겹다. 그녀는 그렇게 어른이 되고 교양인이 되어간다. 그러다 그녀의 어머니는 노처녀로 늙어갈 것 같은 딸을 위해 모스크바로 딸을 진출시킨다. 타치아나의 성격에 맞지 않는 사교계는, 그러나 그런 그녀가 작정을 하자 오히려 그녀는 누구보다 품위있는 숙녀가 된다. 그녀는 장군의 아내가 된다. 이제 그녀는 사교계에서 명망 높은 여인이 된다.

 전능한 화자는 이제 오네긴을 데려온다. 우울하고 말없는 사나이가 사교계 한 구석에서 모든 지나가는 것들 앞에 그저 앉아있다. 그의 눈은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마음은 먼 곳에 있다. 먼 곳에 있는 그의 마음은 도무지 흐려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그는 놀랍게도 눈을 뜬다. 타치아나가 귀부인이 되어 사교계 한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는 갑자기 생동하는 인간이 된다. 그는 매일 귀부인이 된 타치아나를 따른다. 타치아나는 너무나 초연하다. 그녀는 그를 알아보는지 어떠는지 태도는 자연스럽고 마음은 차갑게 느껴진다. 오네긴은 자신을 질책하고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그의 연서가 시작된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답장이 없다. 그는 답장을 기다리다 미친 듯 그녀를 찾아간다. 용기가 가상하다.

 현관을 지나 그녀가 있는 곳으로 급히 걸어간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몇 번인가 닫힌 문을 열어젖히며 그녀를 찾는다. 거기 조용한  곳에 그녀가 앉아 있다. 연서를 읽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고 푸르러진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다. 오네긴은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타치아나는.... 자신은 아직도 오네긴을 사랑하고 있지만 자신은 결혼한 몸이라고, 이때 그녀의 남편이 나타난다. 


별안간 마차 소리가 들리고

타치아나의 남편이 모습을 나타냈다.

여기서 나의 주인공 예브게니를

그를 위해선 매우 불리한 지금 이때에

독자 여러분 우리 내버려 두고 갑시다.

오래...... 아니 영구히.

그의 뒤를 따라 우리들은 꽤 오래

단 하나의 길만을 골라 세계를 헤맨 셈입니다. 

지금은 서로 육지와 닿은 것만을 축복합시다.(48장, 295쪽)


푸슈킨이 7년이나 썼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읽기에는 고작 이틀이 걸렸지만 작가는 그걸 7년을 썼다. 그리고 그는 겨우 38세에 죽었다. 타치아나가 홀로 그리워했던 순정만큼, 렌스키의 속좁은, 그래서 더 열정적이고 가벼워지고 그러다 무거워진 사랑처럼,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은  한탄스러운 작품이다. 렌스키처럼 바보같이 결투로 죽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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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이은연 옮김 / 소담출판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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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통틀어 셀 수 없는 위대한 인물들이 점점이 별들처럼 박혀있다면 푸슈킨 또한 빛나는 그별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겨우 38세에 세상을 떴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장르도 다르고 수에서도 적지 않다. 

 <대위의 딸>은 그의 또다른 몇 작품처럼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그 안에서 목숨을 걸고 그 경계를 넘나든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완전한 사실과 허구의 결합은 그냥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없는 강점을 지닌다. 무엇보다 푸슈킨의 용기가 새롭게 다가온다. 자신의 바로 앞 세대에서 벌어진 농민반란을 그대로 가져와 서사화시켰다는 점. 그는 겉으로의 모습보다 강직하고 또 연민을 아는 사람었을 것 같다.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건대 그런 사람들은 섬세한 감성과 강직함 그리고 열정을 늘 간직하고 있다. 아무나 진보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이유다. 


일단 푸가초프의 난에 대해

예카테리나 2세 치하의 러시아에서 일어나 대농민 반란사건으로( 1773년~1775년 ) 이 시대에는 지주 귀족의 농민지배가 강화되었는데, 돈코사프 출신의 푸가초프는 스스로 표트르 3세를 참칭하며 농노해방, 인두세 폐지 등을 주창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농민군은 전반적으로 장비가 나쁜데다 조직과 계획성의 결함으로 정부군에 패했다. 푸가초프는 체포되어 1775년에 사형당했다.(위키 백과)


 푸가초프의 난을 알아야 이 소설을 제대로(더 박진감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상상력으로 지어진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에 근거릉 둔 이야기는 그 무게가 다를 수 밖에.... 이럴 때 순수소설이라는 장르에 회의적인 시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한치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로쟈샘의 말처럼 소설의 범위는 무한하다. 소설이 질기게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과 섞여도 소설로 재탄생된다는 점이다(문학이론 강의 중에) 소설+역사, 소설+철학, 소설+정치, 소설+경제, 소설+ 알파 등등...


 이 소설 전체는 이제는 고인이 된 표트르 안드레비치 그리뇨프의 수기이다. 훗날 표트르 안드레비치의 손자 중의 한 사람이 그 조부 시대에 관한 저술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수기를 제공했다는 식으로 이야기의 출처를 밝힌다. 순수한 본문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지만 이런 텍스트의 테두리를 만드는 방식도 재미있다. 이 부분을 밝히는 부분은 마지막 페이지의 한 장도 차지하지 않지만 이런 디테일이 커다란 식탁보의 끝부분을 제대로 감치며 마무리하는, 그 기분 같다고 할까, 작품을 살아있게 한다. 


 <대위의 딸>의 인물들은 선과 악 중의 하나에 종사한다. 주인공과 그의 연인 마샤는 사랑의 순수한 열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한다. 주인공 표트르 안드레비치의 하인인 사베리치는 오직 주인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헌신한다. 그는 도련님을 위해 울고 화내고 애쓴다. 소설을 위해 전형적인 인간들을 푸슈킨은 탄생시킨다. 주인공의 부모와 마샤의 부모 또한 여타의 부모들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가장 다중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인물은 푸가초프이다. 그의 부대는 마을들을 초토화시키며 바람처럼 행군한다. 그의 부하들이 일반 백성에게 가하는 위해는 결코 백성을 위한 반란같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첫 뜻이 마지막까지 그대로 유지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죽음을 맞이하고 그의 사지는 찢겨져 여기저기 보내어졌다고 한다. 그 푸가초프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심정은 착잡하다. 가슴이 아렸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그는 푸가초프가 죽지 않기를, 더 심하게는 반란이 성공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대위의 딸 마샤와 행복하게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게 소설의 결말이지만 왠지 마음 한켠이 아프다. 우리네 동학혁명도, 이북에서 아주 오래전에 역사했던 작은 반란들도 성공하지 못했다. 민란이 성공한 적은 거의 없다. 우리 촛불혁명도 성공했지만 이렇게 개혁은 멀기만 하다. 

 

 오늘은 하루를 접대식사 접대산책으로 보내야 한다. 사소한 나의 일상에서도 위선과 작위가 가동되어야 할 때가 있다. 사랑하는 두 젊은 남녀, 표트르 안드레비치와 마샤처럼 있는 그대로 그 열정과 순수를 그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그 축복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계산적이다. 자본주의 땅에서는 모든 백성이 계산 속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소설이 필요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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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시간쯤 전부터 <문학이론>에서 굳이 내 취향에 밑줄을 그은 부분들을 일일이 베껴 적고 있었다. 오늘 아침 컴앞에 앉아 이 옮겨적기를 하려 한 까닭은 특히나 '욕구'와 '욕망'에 관한 단상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며칠 전 읽은 13장 자크 라캉의 말 때문이었다. "라캉은 욕망을 실현하는 일의 불가능성에 관해 말합니다. 욕망의 환유적 구조가 그가 '점근선적 경로'라고 부르는 것을 따르기 때문인데, '점근선적'이라는 말은 만나고 싶어하는 선을 향해 휘어져가지만 절대 닿지는 못하는 선을 뜻하며, 증상을 감춘다는 말을 연상시켜 언어유희의 느낌도 있죠"(303쪽)

 이 라캉의 말은 순식간에 문학적 사유를 불러왔다. 당장 인물이 그려지거나 사건들이 마구 떠올랐던 것은 아니지만 '점근선적'이라는 단어 속에 잠긴 수많은 절망과 깊은 허무가 난무하는 꽃잎처럼 흩뿌려지는 것 같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수없이 환유적으로, 점근선적으로, 정착도 아니고 뚜렷한 변화도 아닌, 헛되고 헛된 일이, 그러나 당장은 쉽게 끊어낼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라도 공감할 문장들이 아닐까.

 그래서 <문학이론> 책을 꺼내놓고 페이지를 넘기며 컴 앞에 앉아 밑줄을 그은 부분들을 일일이 옮겨적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운이 얼마나 나쁜지... 나는 컴맹이라 어찌 된 연유인지 모르는 이유로 몇 십줄의 글이 갑자기 날아가버렸다. 이유는 영원히 모른다. 모를 것이다. 그러더니 동생이며 동네 친구며 전화들을 해댄다. 전화를 받고 나서 다시 집중모드로 몇 십 줄을 베껴놨는데, 또 전화가 오신다. 안 받으면 그만이지만 상대가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 싶어 또 전화를 받았다. 얘기가 길어진다. 그러다 통화중에 팔꿈치인지 손가락인지로 자판 어딘가가 건드려졌나보다. 또 날아갔다. 날아간다는 의미가 새삼스럽다. 날아간 것을 다시 불러오는 건 그 날아간 새인지 컴인지의 명목을 모르고 그것의 체계를 모르는 나로서는 다시 되불러 올 수가 없다. 그런데 누구한테 화를 내나? 화 낼 누가 있어줘야 덜 화가 나는데, 화 낼 상대마저 없으니, 아니 그 상대가 오직 꼽자면 나밖에 없으니.... 한심하고 분하고 무능력한 나에게 서글프기도 하고...

  결국 기운이 확 떨어진 나는 책을 덮고, 그렇다고 그냥 컴 앞을 떠나기는 너무 서운해서 이런 글같지 않은 글을 쓴다. ㅠㅠ... 그렇다고 <문학이론> 베끼던 것 말고는, 특별히 쓸 무엇이 있지도 않다. 그러니 무얼하랴. 무얼 쓰랴. 알라딘에 미안하다. 내 시간에 대해 죄의식을 느낀다. 우리 감자에게 미안하다. 그 시간동안 감자에게 밥이나 줄 걸... 괜히 고생만 하고 컴에 빠져 그새 점심이 됐으니. 감자야 이제 밥 줄게 미안. 하긴 나도 아무 것도 안먹었으니 뭐 이해해줘. 

 점근선적인 내 삶이여. 이제 지쳤으니 은유로 끝을 내자. 아니, 아니다. 은유도 상징도 아니다. 온전한 현실로의 세계. 무지막지하게 맑고 냉혹한 현실의 세계. 그 곳으로 넘어가 얇고 좁게 쌓아놓은 기반이지만, 두 발은 고사하고 한 발 올려놓기도 힘든 어설픈 기반이지만, 그 위에 올라서 다음 여정을 해야 할 것 같다. 언제나 혼자였던 길들.... 곧 그 길을 찾아가야한다. 다른 좋은 길은 내게 없으니까.  어쩌다보니 그 목적지를 가야된다는, 이상하게 갑작스런 명분이 생기고 말았다. 정말 어쩌다보니... 이누므 컴퓨터 때문에 갑자기 낙서면서 낙서가 아닌 이상하게 휘어져버린 글. 하긴 내 안에 마지막 그 길은 항상 유보되어 있었다. 

 어제 루시아형님이 말했다. 그래도 너는 무언가를 너를 위해 해왔지 않니? 그래도 그 정도면 너는 네 맘대로 살아온 거야. 그래도, 그래도를 세 번쯤 말했던 것 같다. 그래, 그래도 나는 괜찮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엉망진창인 삶을 잘 살아왔다. 루시아형님이 또 쐐기를 박았다. 잔소리말고 그냥 되는 대로 열심히 해. 하다보면 뭐가 되겠지. 잔소리하지 마. 

 잔소리 안 하련다. 투덜대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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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별 2019-10-20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어느 시골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읽는 글이었습니다.감사합니다.

lea266 2019-10-2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복소복 눈이 벌써 내린적이 있나요? 낙서같은 글을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벨킨 이야기 / 스페이드 여왕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최선 옮김 / 민음사 / 2002년 4월



 늦은 가을학기 첫 작품은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슈킨의 <벨킨이야기, 스페이드 여왕>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한 푸슈킨의 소설답게 삶이 인간을 속이기도 하고 의외의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왜 삶이 그대를 속이는지, 왜 삶이 의외로 그대에게 행운을 주는지.... 

차례
고 이반 페트로비치 벨킨의 이야기 
발사
눈보라
장의사
역참지기
귀족 아가씨--농사꾼 처녀

스페이드 여왕

 
 1930년대의 소설이라 디테일과 핍진성에서 현대소설과 사뭇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소설'과 '이야기'의 중간쯤에 위치한 이 작품이 갖는 매력은 오히려 세련된 요즘소설보다 훨씬 재미있다. 이야기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런 소설이 더 친밀할 수도. 소설에서는 뭐니뭐니해도 독특한 인물을 보여주는 게 가장 바람직한 형상화작업이라 할 수 있는데 인물들을 좀 훑어보자면,아니 그보다 프롤로그 형식부터 보아야겠다. 일단은 고인이 된 페트로비치 벨킨이 쓴 이야기를 간행하기 위해 벨킨의 아버지의 친우였던 이웃의 증언이 담긴 편지가 그대로 게재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이야기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이며 여러 인물들에게서 벨킨이 직접 들었다고 하는 대목이다. 
 그런 후에 위의 5편이 차례로 이야기된다. 이 단편들 각 장마다 중요한 인물 한 사람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데 그 인물들을 따라가다보면 인간의 한 유형을 대면하게 된다.
 '발사'의 실비오는 겉으로는 무척 여유로운 사람처럼 비치지만 내면은 황량하다. 그는 매일 총쏘는 연습을 반복해서 사격술은 대단하지만 자폐적인 사람이다.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더 유능하고 여유로운 장교를 만나자 그는 그를 질투하고 그것은 그의 인생 전체를 병들게 한다. 그는 매일 사격연습을 하면서 그를 죽이기를 소망하지만 막상 그를 죽이러 가서는 그를 죽이지 못한다. 그는 인생을 허비한 사람이다.
 '눈보라'의 마랴 가브릴로브나는 프랑스소설에 빠져 어떤 환상적인 사랑을 꿈꾼다(마담보봐리도 그렇고 많은 여자들이 현대에도 사랑에 있어서는 환상에 속고 만다). 가난한 소위보와 사랑의 탈출을 감행하는 그녀는 로맨틱한 삶을 꿈꾸었지만 상대는 일면 계산적인 남자였다. 그는 전장으로 나가고 그녀는 혼자가 된다. 정절을 평생 지킬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 또다른 남자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행운을 만날 수 있을까. 그는 우연히 교회에서 아주 잠깐 그녀와 혼인식을 치른 남자였다. 둘은 행복한 결혼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이런 기적같은 일은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은 내게서 가장 먼 곳에서, 어쩌다 딱 한 번 소문으로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장의사'의 장의사는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있지만 이웃집 파티에서 자신에 대한 비하적인 농담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자신이 묻어준 영혼들과 차라리 파티하기를 원하게 된다. 술김에 혼잣속으로 한 상상. 그런데 정말 그는 그들과 조우한다. 꿈이었다. 별로 행복하지 않은 꿈..... 꿈에서 깨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역참지기'의 역참지기는 딸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녀에게 의존적인 삶을 사는 아버지 이야기이다. 딸이 사랑하는 남자와 떠나자 그의 삶은 엉망이 된다. 그는 딸이 납치되었다고 생각하고 불행해질 딸을 기다린다. 그러나 딸은 멀쩡하게 잘 살고 있으며, 그의 애타던 마음은 단지 딸을 향한 의존에서 비롯된 무지와 오해일 뿐이었다. 
 '귀족아가씨'는 유쾌하고 유머스런 콩트 한 편이 생각나는 작품이다. 한 아가씨의 재기 넘치는 용기와 귀여운 일탈.... '모든 것이 보기에 좋았다' 같아서 일견 어이없을 정도.

 그리고 두 번째 작품'스페이드 여왕'은 물질적인 욕망 때문에 사랑을 이용한 게르만이 종내는  정신병동에서 죽어가는 이야기이다. 그는 백작부인에게 이길 수 밖에 없는 카드 세 장을 가르쳐달라고 하소하다 그것이 통하지 않자 총을 빼어든다. 늙은 백작부인은 지레 의자에서 떨어져 죽고 그는 살인자에다 순정한 여자의 사랑마저 잃게 되는데 그러고도 꿈에서조차 백작부인에게서 그 비밀을 전수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스스로 만든 함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걸 잃고 미쳐서 카드의 숫자를 부르며 정신병동에 갇혀 죽어간다. 

 이 작품들 (귀족아가씨 한 편을 제외하고) 대부분 주인공들은 객관적인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실체(자아)와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실비오, 소설같은 사랑을 갈구하는 마랴 가브릴로브나, 어린애같은 자의식에 빠져 상상을 불러일으킨 장의사, 자신의 딸이 어떤 상황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그 딸을 제대로 책임질 줄 모르는 역참지기 등...
 이들은 미성숙한 어른들이다. 아이를 벗어난 지 오래지만 정신은 크지 못한 미숙한... 자신의 어떤 중독적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세상과 마주하려니 버겁고 괴롭다. 미숙한 사람들은 쓸데없는 일로 자신을 힘들게 하고 간혹 상대에게 그 여파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니 그 상대는 얼마나 또 곤혹스러울까....
 소설 속 인물은 나 자신과 동일시 될 수 밖에 없다. 내가 그들처럼 괴롭고 한심스러우니 그들을 통해 저절로 알게 되고 배우게 된다. 감정이나 감성이 유달리 예민하거나 부풀려진 사람들은 남들은 그냥 지나치는 일을 괜히 붙잡고 자신을 그곳에 함몰시킨다. 누가 그러라고 시키지도 않았고 누군가 지목해서 '너'라고 한 적도 없건만.... 공연히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든다. 떡줄 사람이 없는데 김칫국을 마신다.... 그러고나니 한심하고 주책스럽다. 문자를 통해 감정을 익히면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 음성언어로 직접 언표된 게 아니라면 믿어서는 곤란하다. 행위가 없는 일은 없는 일이다. 있는 행위가 있는 일이고 사실이다. 나머지는 모두 환상에 가깝다. 
 미성숙을 벗어나는 일은 객관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감정에 싸여서는 안된다는 것. 성숙해지려고 노력해봤자 평생 안 될 사람은 오직 현실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푸슈킨의 <벨킨 이야기>--- 어떤 의미도 다른 의미와 상통된다. 비슷한 의미들은 엮이고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을 것 같다. 의미들은 하나의 세계면서 무한한 세계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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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가을학기가 미뤄진 계기로 남는 시간을 이용해 이 책을 읽었다. 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작년 쯤이었던가,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살 때 같이 샀던 책이다. 그 때의 계획으로는 '마담 보바리'를 읽으며 견주어서 읽고 싶어서였는데(사실은 이 채털리부인 말고도 안나카레니나나 그 외의 불륜의 주인공인 부인들을 몇 편 더 읽고 비교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었다) 늘상 그렇지만 독서속도가 지나치게 느린 나로서는 항상 텍스트 하나에 온 시간을 허비하는지라 결국 구석에 놓아둔 채 '하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려니 밀린 책을 읽는다는 데서 오는 뿌듯함도 있었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시간이 좀 아깝다,라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이야기가 재미있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묘사나 설명이 너무 닳고 닳지 않았나 하는 느낌 때문이었다. 왜 그 유명한 로렌스의 '채털리'가 내게 불만스러웠을까. 일단은 숲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지나치게 아름다운 숲의 풍경이 거슬렸다. 왜 그렇게 숲이 환하고 꽃은 심어놓은 듯 아름다운지..... 특히 사냥터지기 오두막 뒤의 풍경은 일부러 가꾼 듯 꽃들이 아름답다. 자연 자체만으로 아름다운게 진짜 아름다움이고 그게 자연스러움이라고 생각된다. 사냥터지기 또한 너무 잘 생겨서 매력이 오히려 반감됐다. 사냥터지기가 사냥터지기처럼 생겨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랬다면 코니가 그렇게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날렵한 몸매에 흰 피부, 큰 키, 잘생긴 외모. 사실감이 오히려 떨어진다. 진짜 매력은 외모보다 그만의 어떤 개성적인 분위기나 특별함이 있어야 사랑에 빠질 요인이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코니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긴 대부분의 문학작품의 여자주인공은 대부분 아름답다. 그것은 거의 정해진 규칙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최근 문학작품에서는 이 부분에서 완전히 달라진 것 같고, 요즘은 오히려 인물의 외모를 묘사하지 않는 편인 것 같다. 그냥 어떤 상황에 이르렀을 때에만 그 상황에 맞는 표정의 주인공을 짧게 묘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인물을 점진적으로 드러내 주는데에 합치된다. 

 그런데 도대체 남자 주인공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사냥터지기의 이름이.... 그는 그런데 굉장히 정직하고 올곧은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용기있고 더구나 자신을 일부퍼 낮출 줄 아는 멋진 남자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팽창해가면서 세상이 얼마나 물질적인 가치로 재단되고 있는지, 계층(계급)의 문제가 인간을 가혹하게 구속하고 희망없는 미래를 강요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펼치는데 이는 로렌스의 사상의 일부를 집약해 놓은 것으로 보였다. 로렌스는 사냥터지기와 코니를 통해서 서로 다른 계층(계급)을 화해시키고 결합시키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자체를 배제하고 주변적인 요인으로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현상에 대해 분노했던 것 같다. 

 그러나 로렌스의 애정관에 대해서는 어떤 여자라도, 특히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공격 대상이 될 것 같다. 물론 성적인 부분이 사랑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성인이라면 익히 아는 바이지만, 그렇더라도 남자주인공의 코니를 향한 사랑에 성적인 부분이 그렇게 크게 작용한다는 점에서는 일말의 회의가 들었다. 

 하지만 로렌스의 엉뚱한 이 소설은 상당히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다. 사냥터지기가 보낸 편지로 대미를 장식하고 끝나는데 그 부분은 일견 동화적일 정도로 다부지고 건설적이다. 보통의 리얼리즘이라면 사냥터지기는 쫓겨나 불행한 파멸을 맞고 코니는 남편으로부터 부정한 여인으로 지목되어 사회적으로 매장이 될 텐데 말이다. 그래서 완전히 딴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 같은 결말이지만 오히려 신선했다. 왜 하층계급은 행복할 수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보다 이런 반전이 반가웠다는 뜻이다. 하지만 역시 소설이야. 이런 생각이 드니 나도 참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리얼리티 희생자란 생각이 든다. 주위 친구들은 내가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비난 아닌 비난을 할 때도 있는데... 하긴 인생 자체가 환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시간을 활용해서 <마담 보바리>를 완전히 그 구조와 디테일을 따져서 분석하고 독후감 이상의 독후감을 쓰고 싶었는데 또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하는 일도 별로 없이..... ㅠㅠ

 정말 시간이 되면 이삼일 날을 잡고 '보바리'를 심층 분석해보리라, 또 다짐만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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