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의 딸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이은연 옮김 / 소담출판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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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통틀어 셀 수 없는 위대한 인물들이 점점이 별들처럼 박혀있다면 푸슈킨 또한 빛나는 그별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겨우 38세에 세상을 떴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장르도 다르고 수에서도 적지 않다. 

 <대위의 딸>은 그의 또다른 몇 작품처럼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그 안에서 목숨을 걸고 그 경계를 넘나든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완전한 사실과 허구의 결합은 그냥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없는 강점을 지닌다. 무엇보다 푸슈킨의 용기가 새롭게 다가온다. 자신의 바로 앞 세대에서 벌어진 농민반란을 그대로 가져와 서사화시켰다는 점. 그는 겉으로의 모습보다 강직하고 또 연민을 아는 사람었을 것 같다.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건대 그런 사람들은 섬세한 감성과 강직함 그리고 열정을 늘 간직하고 있다. 아무나 진보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이유다. 


일단 푸가초프의 난에 대해

예카테리나 2세 치하의 러시아에서 일어나 대농민 반란사건으로( 1773년~1775년 ) 이 시대에는 지주 귀족의 농민지배가 강화되었는데, 돈코사프 출신의 푸가초프는 스스로 표트르 3세를 참칭하며 농노해방, 인두세 폐지 등을 주창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농민군은 전반적으로 장비가 나쁜데다 조직과 계획성의 결함으로 정부군에 패했다. 푸가초프는 체포되어 1775년에 사형당했다.(위키 백과)


 푸가초프의 난을 알아야 이 소설을 제대로(더 박진감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상상력으로 지어진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에 근거릉 둔 이야기는 그 무게가 다를 수 밖에.... 이럴 때 순수소설이라는 장르에 회의적인 시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한치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로쟈샘의 말처럼 소설의 범위는 무한하다. 소설이 질기게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과 섞여도 소설로 재탄생된다는 점이다(문학이론 강의 중에) 소설+역사, 소설+철학, 소설+정치, 소설+경제, 소설+ 알파 등등...


 이 소설 전체는 이제는 고인이 된 표트르 안드레비치 그리뇨프의 수기이다. 훗날 표트르 안드레비치의 손자 중의 한 사람이 그 조부 시대에 관한 저술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수기를 제공했다는 식으로 이야기의 출처를 밝힌다. 순수한 본문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지만 이런 텍스트의 테두리를 만드는 방식도 재미있다. 이 부분을 밝히는 부분은 마지막 페이지의 한 장도 차지하지 않지만 이런 디테일이 커다란 식탁보의 끝부분을 제대로 감치며 마무리하는, 그 기분 같다고 할까, 작품을 살아있게 한다. 


 <대위의 딸>의 인물들은 선과 악 중의 하나에 종사한다. 주인공과 그의 연인 마샤는 사랑의 순수한 열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한다. 주인공 표트르 안드레비치의 하인인 사베리치는 오직 주인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헌신한다. 그는 도련님을 위해 울고 화내고 애쓴다. 소설을 위해 전형적인 인간들을 푸슈킨은 탄생시킨다. 주인공의 부모와 마샤의 부모 또한 여타의 부모들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가장 다중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인물은 푸가초프이다. 그의 부대는 마을들을 초토화시키며 바람처럼 행군한다. 그의 부하들이 일반 백성에게 가하는 위해는 결코 백성을 위한 반란같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첫 뜻이 마지막까지 그대로 유지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죽음을 맞이하고 그의 사지는 찢겨져 여기저기 보내어졌다고 한다. 그 푸가초프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심정은 착잡하다. 가슴이 아렸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그는 푸가초프가 죽지 않기를, 더 심하게는 반란이 성공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대위의 딸 마샤와 행복하게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게 소설의 결말이지만 왠지 마음 한켠이 아프다. 우리네 동학혁명도, 이북에서 아주 오래전에 역사했던 작은 반란들도 성공하지 못했다. 민란이 성공한 적은 거의 없다. 우리 촛불혁명도 성공했지만 이렇게 개혁은 멀기만 하다. 

 

 오늘은 하루를 접대식사 접대산책으로 보내야 한다. 사소한 나의 일상에서도 위선과 작위가 가동되어야 할 때가 있다. 사랑하는 두 젊은 남녀, 표트르 안드레비치와 마샤처럼 있는 그대로 그 열정과 순수를 그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그 축복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계산적이다. 자본주의 땅에서는 모든 백성이 계산 속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소설이 필요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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